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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48)화 (448/1,004)

448화 화나지 않았어요

월령안은 잠시 멍한 얼굴을 하더니, 곧 웃었다.

“대장군께서는 정말 제게 미안하셔야 해요. 그동안 대장군께서는 당신이 저를 좋아하는 거라고, 제가 당신에게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했어요. 대장군은 저에게 희망을 주셨고, 또다시 저를 절망하게 했네요. 그러니 확실히 제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셔야 해요.”

“당신 말이 맞소.”

‘당신은 특별하오.’

월령안은 가볍게 자신을 비웃었다.

“하지만 대장군의 탓만은 아니에요. 제 탓도 있지요. 방금은 대장군께서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믿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월령안은 말을 마치자마자 과감하게 육장봉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지난 삼 년 동안, 또 조금 전에도 대장군께 폐를 끼쳤군요. 대장군께서 절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감히 지난날을 되돌아보지 못했다. 내려놓았다고 말만 했을 뿐, 사실 애써 외면해 왔다.

그러나 지금 노인은 목숨을 구하는 약으로 그녀를 이해시켰다. 아무리 진심을 다해도 일방적인 호감은 결코 ‘좋아한다’라는 한마디조차 얻지 못한다. 호감은커녕, 때때로 상대방의 혐오감까지 일으킬 수도 있다.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녀는 모든 비난을 짊어지더라도 그 약을 남겨 두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녀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냥 약을 보내왔다.

노인이 자기를 위해서 그랬음을 알았지만, 그녀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육장봉에게 두 번이나 실망했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육장봉은 월령안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제때 한 걸음 물러섰다.

육장봉의 손은 허공에 뻗은 채,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월령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조금 어두웠다. 그는 손을 뒤로 돌렸다.

“양국 비무가 끝나면 폐하께 개인 창고를 열어 달라고 부탁드리겠소. 필요한 약이 있다면 무엇이든 폐하의 개인 창고에서 가져갈 수 있소. 반년 안에 모든 약재를 구해 주겠다고 약속하오.”

“그러면 대장군께 폐를 끼치겠습니다.”

월령안은 어깃장을 놓느라 싫다고 하지 않았다. 바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확실히 노인의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약이 필요했다.

“폐가 되지 않소.”

예전에도, 지금도 모두 폐를 끼치는 게 아니었다.

육장봉은 지금의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원래는 많은 심혈과 온갖 말로 월령안을 달래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가 달래지 않아도 월령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 바람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쉬움도 남았다.

비록 사람을 달래는 재주는 없었지만, 월령안을 위해서라면 전례를 깨뜨릴 수도 있었다.

월령안은 그가 달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녀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태도에 그는 슬그머니 불안해졌다.

육장봉은 앞을 가리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나와 함께 걷지 않겠소?”

이렇게 월령안을 보내서는 안 되었다. 꼭 돌파구를 찾아 털어놓고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녀가 더는 화를 내지 않게 하고, 더는 멀리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월령안은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육장봉의 안내를 받아 주둔지를 천천히 거닐었다.

밤의 군영은 평온하고 조용했다. 병사 대다수는 막사에서 휴식하고 있었다. 단지 순찰병만이 왔다 갔다 했다.

북요인이 있기에 순찰병도 하나같이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있었다. 육장봉과 마주쳐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만 할 뿐, 멈추고 예를 올리지 않았다.

육장봉도 월령안과 함께 있다 보니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곧 두 사람은 자그마한 언덕에 도착했다.

육장봉이 먼저 언덕에 올라갔다. 월령안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을 보자, 손을 내밀어 끌어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괜찮아요. 저 혼자 올라갈 수 있어요.”

언덕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거뜬히 올랐을 수도 있지만 월령안은 온종일 음식도 먹지 못하고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피곤한 상태였다. 그녀는 힘에 부쳐 쉽사리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육장봉과의 신체 접촉을 거절했다. 몰래 이를 악물고 올라갔다.

그녀는 육장봉 옆에 서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추스를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육장봉이 군영에서 가장 밝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이 북요인이 머무는 곳이오. 지금 북요 전군이 갈팡질팡하고, 사기가 떨어졌을 것이오.”

월령안은 육장봉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담담했다.

그녀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육장봉은 그런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오늘 육비우는 주나라를 위해 첫 승리를 거두어 사기를 진작시켰소. 그 덕분에 주나라는 군마 백 필도 얻어냈소. 육비우는 지금 영웅이오. 약간의 기회라도 있다면 살려내야만 하오.”

월령안은 시선을 내려 눈 속의 조소를 감추었다. 그녀는 표정을 숨기며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

“대장군, 제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화내지 마시오.”

월령안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자, 육장봉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보상으로 한 가지 요구를 들어주겠소.”

“제가 정말 그런 보상을 받아도 되나요?”

월령안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머릿속으로는 어떤 요구를 제출해야 수지가 맞을지 궁리했다.

“당신은 받을 자격이 있소.”

월령안이 거절하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이때 월령안은 상인으로서의 영리함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대장군에게요, 아니면 조정에요?”

“물론…… 나한테 하는 거요.”

그러나 월령안이 조정에서 주는 이익을 원한다면, 그것도 들어줄 수 있었다.

“그럼…… 번거로우시겠지만, 나중에 육 대장군께서 보내셨던 예물을 도로 가져가 주시죠. 제 저택이 불타 버려서 그 물건을 둘 곳이 없거든요.”

여든여덟 상자나 되다 보니, 저장용 움이며 빙고를 모조리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물건은 도저히 넣을 공간이 없었다. 그녀가 다년간 쓰던 물건들도 모두 큰불에 태우고 말았다.

육장봉의 얼굴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다른 조건으로 바꿀 수는 없소?”

“대장군, 전 지금 화가 나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이변이 없다면 소씨 가문에서 절 고발한 사건이 끝나는 대로 저는 청주로 갈 겁니다. 제 집은 폐허가 되었고, 다시 지을 생각도 없어요. 보내주신 예물을 둘 곳이 정말 없어요.”

월령안의 말투는 경쾌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욱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청주에 그 많은 걸 가져갈 수 없어요. 장군께서 정 가져가지 않으시겠다면, 팔 수밖에 없어요.”

육장봉은 불쾌해서 말했다.

“당신 물건이니 당신 마음대로 처리하시오.”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대장군, 정말 가져가시지 않을 거예요?”

“안 가져갈 거요.”

‘예물을 도로 가져가는 경우가 어딨어? 월령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럼 전 예물을 팔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가서 대장군께서 저를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월령안은 다시 한번 육씨 가문의 예물을 팔겠다는 말을 했다. 그런 말을 해도 자기 마음에 아무 파문도 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희망이 있으면 사람은 달라진다.

예전에 육장봉이 그녀를 내칠 때는 분명 더욱 심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아무 기대도 품지 않았었다. 마음이 상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변변치 못한 것을 탓했지, 감히 육장봉을 원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육장봉이 그녀의 마음을 정말 아프게 했다.

“탓하지 않을 거요.”

그가 월령안에게 준 것이므로, 그녀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녀가 정말 팔아 버린다면, 까짓거 도로 사들여서 다시 보내면 그만이다.

“그럼 대장군의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다른 일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도 될까요? 밤바람이 좀 차네요. 제 옷이 너무 얇아서요.”

월령안은 옷을 꼭꼭 여미더니, 고개를 돌려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은 대답하는 대신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아직도 화났소?”

월령안은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웃었다.

“아니, 화나지 않았어요.”

앞으로 더는 그에게 화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월령안에게 그는 이제 그럴 만한 가치가 없으니까.

* * *

육비우는 행운아였다. 노인이 보낸 목숨을 구하는 약을 먹고 그날 밤 위험에서 벗어났다.

이튿날이 되었다. 육비우는 아직 깨어나지는 못했지만, 호흡은 안정되었다. 손불사는 한 번 검사하고 나더니 군의에게 맡겼다.

“정리해라. 우린 돌아가자.”

손불사는 송언에게 분부한 다음, 육삼을 찾아가서 명월산장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는 어제 월령안의 성미를 제대로 건드렸다. 지금 돌아가서 노인을 돌봐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다가 노인에게 변고라도 생긴다면, 월령안은 평생 그를 원망할 것이다.

육삼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손 신의, 이 일은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장군께 여쭤보겠습니다.”

“그럼 어서 가서 물어보게.”

손불사는 간밤에 육비우를 돌보느라 눈을 붙이지 못했다. 지금은 짜증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육삼도 감히 지체할 수 없었다. 즉시 육장봉을 찾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보초병에게 묻고 나서야, 이른 아침에 황성사에서 월령안을 데려가려고 사람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장군은 지금 황성사의 사람들과 교섭하고 있었다.

“대장군께서 직접 교섭한다고? 혹시 조왕 전하께서 오셨나?”

육삼은 깜짝 놀라 물었다.

보초병은 고개를 저었다.

“조왕 전하께서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최 대인께서 오셨다고 합니다. 대장군께서는 아마 최 대인을 만나고 계실 겁니다.”

육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조왕 전하께서는 대장군이 월 낭자를 보내 주지 않을 걸 알고, 일부러 최 대인을 보냈군.”

간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월 낭자는 분명 마음이 상했다.

‘장군이 달래지 못하고 이대로 돌려보냈다가는 앞으로는……. 아니. 아마 ‘앞으로’란 게 없겠지.’

육삼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손님을 접대하는 바깥 주둔지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미처 가까이 가기도 전에 육이가 가로막았다.

“가지 마라!”

“싸우고 계십니까?”

육삼이 안쪽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육이는 육삼을 한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월 낭자가 방금 들어갔어.”

“월 낭자는 어때요? 아직도 화가 나 있어요?”

육삼이 목소리를 낮추어 슬그머니 물었다.

육이는 잠깐 궁리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육삼은 조급해졌다.

“방금 월 낭자를 봤잖아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육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월 낭자는 아무 이상이 없었어. 평소와 다름없었다.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아 보였어.”

육삼은 떠보듯 물었다.

“혹시 월 낭자가 마음을 바꾼 걸까요?”

육이가 되물었다.

“넌 그럴 것 같냐?”

어젯밤 그들 모두가 월령안이 뭐라고 말했는지,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꿀 리가 없었다.

정말 마음을 바꿨다면, 아마 장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럼 대장군께서 월 낭자를 달래는 데 성공한 걸까요?”

육삼이 또 말했다.

“어제 밖에 있던 애들한테 물어봤어. 대장군이 쫓아왔을 때 월 낭자는 이미 멀쩡한 상태였대. 대장군은 월 낭자를 전혀 달래지 않았다고 했어.”

육이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눈망울 한번 움직이지 않았다.

육삼은 불안에 떨며 말했다.

“전 아무래도 월 낭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게만 느껴지는데요? 이젠 장군에게 화도 안 난다는 거 아닙니까? 예전에 이혼할 때만 해도 월 낭자는 장군께 화를 냈었다고요. 이거 월 낭자가 장군을 완전히 포기한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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