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화 모든 우연에는 흔적이 남는다
월령안은 몰래 숨을 들이마셨다. 온 힘을 다해서야 겨우 조계안의 따귀를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조 대인, 도대체 무얼 알고 싶으세요? 하실 말씀이 있으면 터놓고 하세요. 만약 대인께서 기어이 제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사고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면,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죽음은 마음속의 건드릴 수 없는 상처이기는 했다. 그래도 기어코 말하게 한다면, 아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조계안이 이걸로 그녀의 심리적 방어선을 뚫기는 불가능했다.
그와 별개로 그녀는 분노했다.
조계안은 지금 세상에 없는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모독하고 있었다.
“네 집에 있는 그 영감, 정체가 뭐냐?”
조계안은 월령안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강요해도 소용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강자를 만나면 더욱 강해졌다.
월령안은 입술을 깨물고 말하지 않았다.
조계안은 양손을 벌리더니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봐. 내가 기회를 주지 않는 게 아니라니까. 네가 그 기회를 잡지 않은 거야.”
“영감님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분이 어떤 사람이든,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예요.”
월령안은 조계안이 의심을 한 이상,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음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영감의 정체는 아주 중요해.”
그가 의심하게 된 것은 암황의 영패와 그 증거가 너무나 공교롭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황숙은 우연을 절대 믿지 말라고 직접 가르쳤다.
이 세상의 모든 우연에는 흔적이 남는다.
그가 흔적을 따라 찾아본 결과, 월령안의 집에 있는 노인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월령안은 눈시울을 살짝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은 이제 겨우 일 년밖에 못 살아요. 여생 정도는 편안히 보내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그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모든 사람이 햇빛 아래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건 아니야.”
조계안은 타협의 여지도 없이 싸늘하게 말했다.
월령안은 조계안에게는 어떤 방법과 수단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다시 시도해 보았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월령안은 뭐든 할 수 있었다.
“영감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분이 제 곁에 온 순간부터, 그분은 제 가족이었어요.”
“흥. 얼마나 많은 정탐꾼이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십 년에서 이십 년, 심지어는 몇 대나 이어가며 잠복할 수 있는지 알기나 하느냐?”
월령안은 아직도 너무 천진난만했다. 이 세상에는 겉으로 좋아 보이면서 안에는 위험을 품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기 위해, 수십 년을 잠복하고 충성할 수도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일들을 너무 많이 봐 왔다.
월령안은 너무 훌륭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그래서 천진난만하게도, 내력이 수상한 낯선 사람이 자신을 진심으로 대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분이 없으면 이 세상에 월령안도 없었어요. 제 목숨은 그분이 구해 준 거예요. 그러니 그분이 어떤 목적을 가졌어도 전 개의치 않아요.”
노인이 딴마음을 품고 자기 옆에 온 게 아닌지, 그녀도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다음부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노인에게는 목적이 있거나, 모종의 음모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개의치 않았다.
이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란 없다. 노인이 아무 목적 없이, 아무 이유 없이 그녀에게 잘해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무서운 일이었다.
“그자의 신분은 네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개의치 않는다고, 별일 없는 게 아니다.”
조계안은 월령안의 미세한 표정과 동작을 통해, 그녀가 정말 노인의 신분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월령안이 그를 기만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속여 넘길 수 있다면 그것도 그녀의 재간이었다. 그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높이 샀다.
조계안은 더는 노인의 신분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대신 한담하듯 말했다.
“그래, 그 사람의 신분은 모른다고 치자. 그럼 우리 다시 칠 년 전의 일을 이야기해 보자. 그때 네가 성 밖에 있던 사흘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나한테 정신을 잃은 상태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지는 마라. 그런 말은 너 자신조차도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 정말 모릅니다.”
월령안의 굳어진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냉담했다.
“칠 년 전, 소여방은 권력자의 자제들과 사사로운 왕래를 빈번하게 했더군.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영녕후부, 평정후부(平定侯府), 제국공부(齊國公府), 영국공부(榮國公府), 영군왕부(寧郡王府), 예왕부(睿王府) 같은 집 자제들과 왕래를 끊었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바로 네가 유괴된 지 꼭 보름이 지난 다음이었지. 네가 이 두 가지 일과 아무 연관이 없고, 그냥 우연이라고 하면, 내가 정말 믿을 것 같으냐?”
그가 칠 년 전의 일을 조사하려면, 당연히 월령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칠 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내막을 아는 사람은 대부분 입막음을 당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그 사실을 깊이 숨기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심혈을 기울여야 겨우 실마리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대인께서는 그들에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 만만한 사람을 골라 괴롭히겠다는 건가?’
하지만 조계안에게 감사해야 할 부분도 있었다. 그때 공모자 중에 귀족의 자식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다.
그녀는 줄곧 소여방과 왕래한 사람은 모두 문관 가문의 공자라고 여겼었다. 예상외로 소여방은 왕족에게도 몰래 줄을 대고 있었다.
소여방이 한 짓은 참 주도면밀했다.
“그래서,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도 안다는 거군?”
조계안은 예리했다. 월령안의 말에서 빈틈을 찾아냈다.
“그럼 우리 이야기 좀 해 볼까. 교환 조건으로 더는 노인의 신분을 따져 묻지 않겠다.”
월령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속으로는 자신이 말이 많았다며 후회했다.
‘역시, 말이 많아지면 실수가 느는군.’
“이렇게 거부하다니, 무척 기분 나쁜 일인가 봐?”
조계안은 심술궂게 웃었다. 두 손을 탁자 위에 얹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맞혀 볼까? 칠 년 전, 너는 열한 살이었지. 그해 변경에서 시녀가 많이 죽었다. 어린 사람은 칠팔 세, 나이가 들었다 해도 이십 대 초반밖에 안 되었지. 시녀들은 죽은 뒤 시체도 찾아볼 수 없었어. 아마 죽은 모습은 매우 비참하고,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겠지.”
조계안은 말하는 와중에도 줄곧 월령안을 살폈다.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또 몸을 앞으로 바싹 기울였다. 살짝 격앙된 말투에는 표현하기 힘든 사악함을 띠고 있었다.
“조금 더 추측해 볼까. 꽃같이 예쁜 어린 아가씨들이 눈에 뵈는 게 없는 세도가 자제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럼 어떤 일을 당할까?”
조계안의 목소리에는 사악함뿐만 아니라, 제멋대로에 거만한 조소까지 띠고 있었다.
“그 어린 아가씨들은 분명 그들에게 노리개 취급을 받다가 죽었을 거다. 게다가 죽은 모습도 매우 비참했을 거야. 그럼 너는?”
조계안은 고의로 말을 끊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월령안은 그가 실망하게 했다. 그녀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계안은 웃고 말았다.
“왜? 내가 잘못 짚었나? 너는 그놈들의 마수에 걸리지 않았나? 사흘간이나 실종됐는데, 깨끗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고?”
짝짝짝…….
그에게 돌아온 것은 월령안의 가벼운 박수와 아무 감정도 없는 평가였다.
“무척 훌륭하네요. 역시 조 대인이십니다.”
“그렇다면…… 내 말이 다 맞았느냐?”
조계안의 눈빛이 음침해졌다. 말끝이 살짝 올라가며 사악한 느낌을 주었다. 그 바람에 이유 모를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월령안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얼굴로 무안을 주었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알지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 내 상처를 들춰서 남에게 보여줘야 하지? 원수를 갚으려면, 내가 할 수 있는데?’
조계안은 순간 울화통이 터졌다. 월령안은 협력을 거부했다. 당근도 채찍도 통하지 않았다.
‘월령안, 이 고마운 줄도 모르는 계집애 같으니. 내가 열 받아 죽는 꼴을 볼 작정이군!’
그는 황성사를 다시 움직이느라, 벌써 며칠째 눈을 붙이지 못했다. 이렇게 개처럼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도, 칠 년 전의 일을 직접 조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인데?’
월령안은 호의를 거절했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원망했다.
‘전생에 내가 월령안에게 빚을 졌었나?’
탕!
격노한 조계안이 앞에 놓인 탁자를 부수면서 굉음이 울렸다. 나무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면서, 월령안에게 몇 조각이 날아갔다.
월령안은 재빨리 피했지만, 나뭇조각에 손등을 긁히고 말았다.
그녀는 아파서 신음을 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조계안을 만나서 좋을 게 없다니까.’
조계안도 그 모습을 보았다. 얼굴에는 미안함이 스쳤지만, 입으로는 강경하게 말했다.
“한숨은 무슨 한숨. 까짓 피가 좀 난 것 가지고. 황성사에 와서 피를 안 본 사람은 없다. 왜, 이제 피가 좀 났다고 못 견디겠느냐? 내가 네게 너무 잘 대해 준 건가?”
월령안은 그의 단점만 기억했다. 그의 장점은 기억해 주지도 않았다.
‘내가 없었으면 여기에 이렇게 평안하게 앉아 있을 수나 있는 줄 알아?’
황성사에 들어오면 죽지는 않더라도, 반죽음이 된다.
‘네가 지금 여기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건 전적으로 내 덕분이라고!’
“조 대인, 관대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건성으로 예를 올렸다.
그녀는 정말 조계안과 대화하기 싫었다. 매번 조계안과 소통할 때마다 진이 다 빠지고는 했다. 그녀는 조계안과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눌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대화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조계안이 싫었다.
조계안은 너무 막무가내였다. 너무 제멋대로이고, 너무 자기중심적이었다.
사실 막무가내에 자기중심적이라면 육장봉도 만만찮았다. 그래도 육장봉은 조계안처럼 변덕스럽지는 않았고, 함부로 손을 쓰지도 않았다.
조계안이 갑자기 책상을 부수는 순간, 얼마나 무서웠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녀는 조계안이 자신을 때리려고 주먹을 날린 줄로만 알았다. 머리를 감싸고 움츠릴 준비까지 했다.
“내가 관대하게 봐줬다는 걸 알았으니 됐다.”
조계안은 도도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월령안이 자기에게 화를 내지 않은 걸 보자, 다시 오만하게 말했다.
“월령안, 나는 칠 년 전의 일을 반드시 확실하게 조사할 거다. 넌 말하기 싫어도 말해야 해. 알겠느냐?”
“마음껏 조사해 보세요.”
그때의 사람과 일은 거의 다 정리했다. 만약 조계안이 조사해 낸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정작 조계안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때 그 사건에 누가 참여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 알 기회가 있기는 했다. 다만 그때의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워낙 약하고 어려서, 원수가 누구인지 알 용기조차 없었다. 그 사람들에게 입막음 당하지 않기 위해, 사건을 무마할 수밖에 없었다.
칠 년 전, 그 부잣집 도련님들 배후에 있는 가족들은 그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무려 수백 명을 죽였다.
만약 그때 그 굴욕을 참아내지 않았더라면, 원수의 모습을 보려는 마음을 억누르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오늘까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