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너 때문에 시작된 거잖아
“기분이 좋은 것 같구나.”
월령안이 웃자, 조계안도 덩달아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그는 똑바로 앉는 대신 부잣집 한량 같은 자세로 의자에 기댔다.
“대인 덕분입니다.”
월령안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황성사에서 형벌을 받지 않고 심문만 받는 것은 전적으로 조계안 덕분이었다.
“사리가 밝군.”
조계안은 도도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손에 든 책자를 탁자 위에 홱 던졌다.
“그럼 명월산장에 있는 김씨 노파부터 이야기해 보자.”
“대인께서는 이미 그분의 내력을 조사하시지 않았습니까?”
월령안은 물을 마시고 나자, 목 상태가 조금 나아져서 아까처럼 갈라져 있지 않았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하는 모습은 만사가 두렵지 않다는 듯한 여유를 보여 주었다.
“나는 네가 직접 말하는 걸 듣고 싶다.”
조계안은 이글대는 눈빛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무엇이라도 찾아내려는 것만 같았다.
“그럼 물 한 잔과 바꾸어도 될까요?”
월령안은 피하지 않고, 나무 의자에 몸을 기댔다. 두 손을 교차하여 가슴 앞쪽에 놓고, 두 다리를 모아 약간 옆으로 기울인 자태가 우아하고 느긋해 보였다. 그 모습은 전혀 심문받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조건을 들이대는 것이냐?”
음침하고 차가운 조계안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장 변덕을 부릴 기세였다.
월령안은 속눈썹을 가볍게 떨었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상인으로서의 버릇입니다. 대인, 나무라지 말아 주세요.”
“내가 너를 나무랄 생각이었으면, 그 예쁜 머리는 진작 떨어졌을 거다. 알고 있느냐? 너 때문에…… 지금 밖이 얼마나 소란스러운지?”
조계안도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어둠에 묻힌 가면을 쓴 얼굴이 음침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월령안은 눈을 살짝 반짝였다. 어느 정도 짚이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대인, 저를 너무 높이 보시는군요. 저 같은 게 뭐라고요. 제가 무슨 재주로 밖을 소란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조계안이 황성사를 움직였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 대신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하면, 황성사의 부활을 막기 위해 조정의 원로 대신들은 황제를 협박하고, 황성사를 포기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황성사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쌍방의 요구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면 황제와 조정 대신들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조계안의 말대로 바깥은 혼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와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녀는 기껏해야 바둑알 하나에 불과했다.
월령안은 자신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계안의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고 싶었다.
이 사람은 분명 그녀를 이용했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모든 일을 그녀에게 뒤집어씌웠다.
‘요즘 남자들은 다들 책임을 떠미는 데는 선수로군?’
월령안은 시선을 살짝 내려, 눈 속에 비친 조소를 감추었다. 곧 조계안이 농담처럼 하는 말이 들렸다.
“너 때문에 시작된 거잖아.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하지는 못하겠지.”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눈을 들었다. 눈 속의 조소도 차분함으로 바뀌었다.
“저는 보잘것없는 바둑돌 하나에 불과합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가 있겠죠. 밖의 정세를 뒤흔들고, 언제쯤 세상을 시끄럽게 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대인뿐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광풍의 한가운데에 끌어들였다며 조계안을 탓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러자 조계안은 오히려 자기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인정하라고 하고 있다.
‘나에게 네 죄를 덮어씌우지 마. 내가 네 은혜를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지도 마.’
그야말로 우습기 짝이 없었다.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다. 바깥의 모든 사람은 내가 여인을 위해 미친 짓을 했다고 알고 있거든. 너를 위해 시위를 움직여 사람을 잡아들이고, 궁문을 봉쇄했으며, 장 부승상을 억류했다고 말이야.”
조계안은 여전히 조소와 악취미가 섞인 말투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때? 감동하지 않았어? 바깥의 대인들은 모두 너를 남자를 망치는 요녀로 알고 있거든.”
“대인께서는 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냥 하시지요. 저는 우둔하여 빙빙 에둘러 하는 말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월령안은 치미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남자들이 왜 모든 일에서 여자 탓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인을 위해서 천하를 저버리면, 자신이 고귀해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네 저택에 있는 그 영감은 정체가 무엇이냐?”
조계안은 농담을 끝내고, 드디어 정상으로 돌아왔다.
“제 사부예요. 월씨 가문에 몸담은 지 오래된 분입니다.”
월령안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여기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이 문제는 아까도 시위가 물어보았다. 월령안은 이 대답을 끝까지 고수했다.
“김씨 노파가 네게 준 증거를 넌 누구에게 주었느냐?”
조계안이 또 물었다.
“돈을 써서 천목신교 사람에게 부탁해 조정에 넘겼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조계안이 조사해 보면, 그녀와 천목신교가 연락한 적이 있음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단, 구체적인 거래에 대해서는 조사해 내지 못할 것이다.
천목신교는 비록 사교였지만, 신용이 있었다. 그들은 고용주의 일을 받아들이면, 절대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네가 그들과 연락할 수 있단 말이냐?”
천목신교라는 소리에 조계안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월령안을 보는 눈빛에는 깊은 생각이 스며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있습니다.”
월령안이 대답했다.
조계안이 또 물었다.
“그 영감은 언제부터 네 곁에 있었느냐?”
두 질문은 서로 연관이 없었고, 대답하기도 쉬웠다. 전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관성적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월령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박에 대답했다.
“아홉 살을 넘기고 열 살에 접어들었을 때예요.”
“그해 너는 왜 소씨 저택에서 나왔지?”
조계안이 또 물었다. 여전히 앞의 질문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월령안은 이미 황성사의 방식에 익숙해졌다. 예전 대답 그대로 대답했다.
“소여방, 소함연 두 남매와 사이가 안 좋았어요.”
그녀는 모든 질문에 거짓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마디도 더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안 좋았느냐?”
“그들은 하마터면 저를 죽일 뻔했어요. 저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났습니다.”
“네 어머니께서는 왜 돌아가셨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네 어머니와 소 승상은 결혼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왜 자식이 없었느냐?”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사부라는 영감은 너에게 뭘 가르쳐 주었느냐?”
“장사요.”
“열한 살 되던 해, 너는 성 밖에서 사흘을 머물렀어. 그 사흘 동안 뭘 했느냐?”
“유괴당했어요.”
“유괴된 사람 중에 또 누가 있었지? 기억하고 있느냐?”
“전 계속 정신을 잃은 상태여서 모릅니다.”
“그 영감은 무공을 알지?”
“네.”
“그 사람이 그때 널 구해 준 거 말고, 또 뭘 했느냐?”
“모릅니다. 기절했어서요.”
“소여방과 소함연은 어떻게 널 괴롭혔지?”
“제 물건을 뺏거나, 저를 속여 헛간 같은 곳에 가두거나 하는 짓을 했습니다.”
월령안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마치 모두 지난 일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싶었다.
조계안은 줄곧 월령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아무 이상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대답은 기존의 대답에서 정말 한 글자도 더 보태지 않았다.
칠 년 전의 일에 대해서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는 이유로 모든 대답을 피했다.
월령안은 매우 영리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계안은 바로 그 영리함 때문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칠 년 전, 그녀가 실종되었던 사흘 동안 벌어진 일은 고작 유괴당한 정도의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조계안은 윗몸을 앞으로 기울여 탁자를 짚었다. 절대적으로 압박하는 자세로 물었다.
“소여방과 소함연이 죽었으면 좋겠지?”
“아니요. 저는 그들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기를 바랍니다.”
소여방은 그녀가 죽인 게 아니기에, 그녀는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여방의 죽음은 너와 상관없느냐?”
조계안이 따져 물었다.
“상관없습니다.”
조계안은 비웃음을 보내더니 계속 캐물었다.
“소함연은? 소함연이 북요 귀족과 왕래하고 결혼을 피해 도망친 것도 너와 상관없느냐?”
월령안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제야 대답했다.
“제가 몰래 부추겼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함연 같은 귀족 여인이 어떻게 외국 귀족과 접촉할 기회가 있겠는가.
그녀가 짠 판이었다. 그러나 소함연이 그 판에 뛰어든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는 소함연의 취향과 허영심에 걸맞게, 북요의 상장군 소영화를 골라 소함연과 접촉하게 했다. 하지만 소함연이 소영화를 좋아할지, 소영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할지, 어느 정도를 할지는 그녀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소함연에게 선택지 하나를 더 주었을 뿐이다. 최종 결정권은 여전히 소함연에게 있었다.
조계안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월령안, 말해 봐라……. 육장봉이 만약 자기 약혼녀가 도망간 게 네 탓이라는 걸 알면, 네가 자기에게 시집가느라 다른 아가씨의 장래를 망쳐 놓았다는 걸 알면, 너를 어떻게 볼까?”
월령안은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눈 똑바로 뜨고 보겠죠.”
예전 같았으면 그녀는 몹시 긴장했을 게 뻔했다. 자신이 얼마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지, 얼마나 악독한지를 육장봉이 알게 될까 봐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녀는 육장봉을 좋아했다. 당연히 육장봉이 자기의 좋은 면만 보기를 바랐다. 자신의 추악하고 악랄한 면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계안이 어떻게 말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여기서 기가 죽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면 월씨가 아니지.’
“쯧쯧쯧……. 이젠 잃을 것도 없나 보네.”
조계안은 흥분해서 고개를 젓더니, 두 눈을 반짝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너처럼 악독한 마음을 가진 여인이 어찌 우리의 대영웅인 대장군과 어울리겠느냐.”
이렇게 못된 월령안은 그와 가장 잘 어울렸다. 육장봉처럼 햇빛 아래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월령안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월령안은 웃었지만, 말을 받지 않았다.
조계안도 개의치 않았다. 도로 자리에 앉더니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월령안, 우리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 너희 집 그 영감과 네가 함께 지내오면서 겪은 소소한 것까지 말이다. 그자가 월씨 가문에 오래 몸담은 사람이라고 했지? 자, 그럼 청주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해 봐. 상세하면 상세할수록 좋아.
기억하지 못한다고는 말하지 마. 다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아니까!”
월령안은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디가 잘못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계안이 노인의 신분을 의심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대인께서는 농담도 참 잘하시네요. 제 기억력이 늦되어서, 일곱 살 이후의 일만 기억하거든요. 그 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월령안이 태연하게 대답하자, 조계안이 갑자기 순순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월령안이 일곱 살 이후의 일만 기억한다고 하자, 그럼 기억하고 있는 것만 말하라고 했다.
월령안은 조계안의 인성이 갑자기 변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일곱 살 그해 벌어진 일을 한 번 다 이야기하자, 이번에는 여덟 살 나던 해의 일을 말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특별히 강조했다.
“나는 네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사고가 난 부분을 듣고 싶다.”
‘조계안, 고의로 이러는 거지! 비열한 자식! 소인배!’
월령안은 이를 꼭 악물었다. 겹친 손을 꽉 부여잡았다. 분노에 차서 조계안을 노려보았다.
조계안은 오히려 더 활짝 웃었다.
“왜 그러지? 그 일은 잊은 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