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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40)화 (440/1,004)

440화 잃은 다음에야 소중함을 아는 법

반 시진이 지나 주나라와 북요의 관리들은 또다시 관람석에 나타났다.

이미 날이 저문 때였다. 군영 안에는 횃불이 켜져 있어 사물을 식별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횃불이 타오르며 나오는 열기가 사람들을 못 견디게 했다.

북요의 관리들은 견디다 못해 웃통을 벗어젖히고, 탄탄한 상체를 드러냈다.

주나라 관리들은 의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하지만 관람석에는 횃불이 훨씬 많았다. 이글거리는 화염이 세차게 타오르고 있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웠다. 옷들이 땀에 젖어 몸에 들러붙는 바람에 문인의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 중 횃불의 영향을 받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무장인 육장봉이었다.

그는 오늘 일품 장군복을 입고 있었다. 옷차림은 단정하고 각이 잘 잡혀 있었다. 입체적인 옷깃과 허리띠는 그의 위풍당당함을 돋보이게 했다. 그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위엄이 풍겨 나왔다.

무엇보다도 하루가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여전히 이른 아침의 모습 그대로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차가운 얼굴 때문에 더 멋스러워졌다.

하지만 자리에 있던 누구도 육장봉을 감히 훑어보지 못했다.

주나라와 북요의 관리들은 서로 마지못해 인사를 나눈 뒤 제각기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나라의 관리가 먼저 물었다.

“귀국에서는 결정했소?”

육장봉은 북요에 반 시진 안에 대답을 달라고 했다. 지금 거의 반 시진 정도가 지났다. 주나라도 북요와 이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시시콜콜하게 따지지는 않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군마 백 필, 준비했소.”

북요 대황자와 상장군 소영화는 모두 육장봉과 말도 섞으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자마자, 얼굴을 한쪽으로 돌리고 싸늘한 태도를 보였다.

육장봉은 입을 열지 않았다. 신호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한 사람은 북요의 관리뿐이었다.

육장봉이 탁자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육이가 즉시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검수하겠소.”

북요의 관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신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신호의 동의를 얻은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소!”

쌍방은 내려가서 거래를 시작했다. 말 백 필은 적은 수량이 아니었다. 육이가 나서서 북요인에게 인수인계하는 것은 수량을 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군마의 질을 검사하는 동시에 북요인이 꼼수를 썼는지 검사하기 위해서였다.

군대 안에는 뛰어난 말 감별사가 많았다. 이각 뒤, 육이는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으며, 북요인이 군마에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군마의 인수인계가 끝나자, 홍려시의 조 대인이 일어나서 물었다.

“귀국에서 누가 출전하오?”

“찰격(扎格), 우리 대원수의 호위병이오.”

북요인들은 이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했다. 곧바로 아래쪽에 있던 무사 하나를 지목했다.

관람석 아래에 있던, 힘이 세 보이고 우람한 몸매를 한 무사가 일어나더니, 여러 사람에게 포권했다.

육장봉의 시선이 그 사람의 몸에 잠깐 멈추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 대인도 허락을 받더니 육비우를 가리켰다. 그는 사람들 속에 서 있으면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교위(校尉) 육비우입니다.”

육비우는 본래 종사품(從四品)의 선위(宣威) 장군이었다. 하지만 잇따른 실수 때문에 육장봉이 계속 강등 처분을 내렸다 보니, 지금은 구품 교위였다.

이 정도의 신분으로 신호의 호위병에 대적하면, 공평하다고 할 수 있었다.

육비우는 자기 이름을 듣자, 마음속의 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포권했다.

그는 수횡천에게서 열 번의 공격을 가까스로 받아냈다. 육장봉은 이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확답을 해 주지는 않았다. 단지 옷을 갈아입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 나와서 서 있으라고 했다.

그와 함께 앞에 나와 선 사람은 육삼, 육십이, 수횡천이었다.

육비우는 원래 자기에게 희망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뜻밖에도 넷째 형님은 여전히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육비우는 참 익숙한 이름이군. 육 장군의 먼 친척인가?”

북요의 관리는 주나라에서 출전하는 사람의 이름을 듣고 웃었다.

과연 주나라의 옹색한 유학자들은 대원수가 말한 대로, 군자의 품격을 따지기 좋아했다.

그들은 주나라 군대에 고수가 있는 것을 분명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호위병을 출전시키자, 주나라에서는 뜻밖에도 고수 대신 보잘것없는 병사를 출전시켰다.

그들이 볼 때 주나라 사람들은 어리석었다.

그들은 이길 수만 있다면 규칙 같은 건 따질 필요가 없었다.

승자만이 왕이 되고, 패자는 그냥 개가 될 뿐이다.

군자의 품격 따위는 확실히 이긴 다음에 이야기해도 되는 것이었다.

주나라 쪽에서는 북요 관리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관리는 홀로 득의양양해서 주나라의 반격을 기다렸다. 그러나 주나라 사람들은 시선조차도 주지 않았다.

그 관리는 다소 난처해하다가 육장봉의 어두운 얼굴을 보았다. 곧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답답한 듯 자리에 앉았다.

둥!

비무대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북요의 찰격과 육비우는 비무대에 동시에 뛰어올랐다.

찰격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허리춤에 감겨 있던 검은 사슬을 풀어서 비무대를 세차게 후려쳤다.

촤락!

하는 소리와 함께 비무대가 부서지면서 자갈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내 무기, 사편(蛇鞭)이다.”

찰격은 아주 만족스러운 듯했다. 고개를 들고 육비우를 도발적으로 바라보았다.

육비우는 손에 검은 천을 감고 있었다. 사편에 튕긴 돌멩이에 손등을 긁히자 핏자국이 생겼다. 그는 손을 들어 손등에 묻은 피를 핥고 말했다.

“내 무기는 장창이다!”

“받아라!”

비무대 아래에 있던 육삼이 육비우에게 장창을 던져 주었다.

이를 본 찰격은 육비우의 장창을 떨어뜨리려고 당장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육비우가 손을 내밀자, 장창은 눈이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속도를 내더니 그의 손에 깔끔하게 떨어졌다.

찰격의 공격은 빗나갔다.

탁!

장창이 육비우의 손에 떨어지면서 소리가 났다. 육비우는 양손으로 장창을 잡더니 창 자루를 휙 회전시켰다. 창끝이 갑자기 쪼개지더니 하나하나 예리한 무기로 변하여 찰격에게 날아갔다.

찰격의 사편은 아직 공중에 떠 있었다. 그 사이에 육비우의 공격이 얼굴까지 들이닥쳤다. 찰격은 연신 물러서면서 채찍을 휘둘러 막았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팍!

찰격의 어깨를 예리한 창날이 파고들었다.

그는 고함을 지르더니 조금도 멈추지 않고 육비우를 공격했다. 손에 든 사편을 멈추지 않고 빠른 속도로 연신 후려쳤다.

관람석의 사람들은 채찍의 그림자가 육비우 앞에서 이리저리 뒤얽히는 광경만 볼 수 있었다. 육비우는 연신 물러서기만 할 뿐, 도저히 막아내지 못했다.

찰싹!

육비우는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검은 채찍에 호되게 얻어맞았다. 사람들의 귓가에 살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이 한 방에 육비우는 비무대에서 쓰러질 뻔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장창에 의지해 몸을 가눌 수 있었다.

“비우 도련님이 괜찮을까요?”

관람석에 있던 육십이는 걱정이 되었다.

“저 장창은 월 낭자가 비우 도련님에게 맞춰 만든 거다. 장창이 있는 한은 지지 않을 거야.”

육사는 육십이의 어깨를 다독여 그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육십이의 검은 얼굴이 뿌루퉁해지더니 불쾌해서 말했다.

“무슨 낯으로…… 우리 월 누님이 보낸 병기를 쓴대요! 부러워서 죽겠네. 월 누님은 어쩜 저렇게 좋은 병기를 저놈에게 줬을까요! 저 병기가 없었다면 지금 겨루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였을 텐데.”

“그건 옛날 일이고 앞으로는…… 아마 없을걸.”

육사는 자신도 시샘이 나는 걸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그 시절만 해도 비우 도련님은 장군이 중시하던 사촌 아우였다. 월 낭자는 대장군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으니, 당연히 비우 도련님을 빠뜨리지 않았다.

비우 도련님은 말할 것도 없고, 그때는 그들조차도 월 낭자에게서 좋은 물건을 많이 받았었다.

아쉽게도 그때 월 낭자가 보내준 좋은 물건을 쓰면서도, 월 낭자의 정성을 한 번도 기억하지 않았다. 심지어 월 낭자를 비웃기까지 했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휴! 역시 잃은 다음에야 가졌을 때의 소중함을 아는 법이지.’

* * *

성 밖에는 교전 소리가 한창 드높았다.

육비우와 북요의 찰격은 비무대에서 접전을 벌였다. 마치 맹수끼리 육박전을 벌이듯, 매번 상대방의 급소를 공격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독기로 가득했다.

성안에서는 어두운 물결이 일렁이고 있다.

이반반이 사람을 통해 장 부승상과 육부 상서들의 가문에 전갈을 보냈다. 이제 성안의 소식통도 모두 알게 되었다.

황궁에서 갑자기 궁문을 봉쇄했다. 금군이 황궁을 인수하여 관리하며,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육부의 상서들과 장 부승상은 모두 황궁에 있었다. 아무 정보도 밖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감히 알아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궁문이 닫힌 상태에서 아무 정보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의 생사마저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함부로 움직이겠는가.

일순간 변경의 모든 관리들은 불안을 느꼈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겁을 먹었다.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어제 폐하께서는 병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멀쩡하셨는데. 아무리 편찮으시다 해도 궁문을 봉쇄할 필요까지는 없잖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누가 나와서 한마디 하는 사람도 없다더냐? 아무 소식도 없으니 참 찜찜하군.”

“혹시 황궁이 습격을 받은 건가?”

“육 대장군의 군대가 성 밖에 있는데. 이 상황에서 누가 생각 없이 황궁을 습격하겠나? 어디 황제 자리에 제대로 앉아 보기나 하겠어?”

“장 부승상과 육부 상서들이 모두 궁중에 있다니. 이거 참 큰일이군!”

“이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미리 황후의 친정에 가서 비위를 맞춰야 하나? 아니, 아니지. 그래서는 안 돼. 폐하에게는 아우님이 계시지 않나. 조왕 전하가 육 대장군과 절친한 친구라던데. 만일 폐하께 일이 생기면 육 대장군은 조왕의 즉위를 지지할 가능성이 커.”

세도가들을 포함한 대신들은 모두 당황할 뿐이었다. 감히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궁문을 봉쇄하는 것은 큰일이었다. 설령 황제가 갑자기 붕어하더라도, 궁문은 쉽사리 닫지 않았다.

뜬금없이 궁문을 닫았을 뿐만 아니라, 장 부승상과 육부의 상서들도 황궁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황권을 교체하려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황제는 아직 젊었고, 황자도 어렸다. 정말로 황권이 바뀐다면, 겨우 안정된 주나라가 또다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문을 꽁꽁 닫아걸어라. 아무도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

“육 대장군은 확실한 황제파다. 폐하께서는 줄곧 육 대장군을 믿고 그의 병권을 거두어들이시지 않았어. 육 대장군이 있는 한, 그분이 지키고 있는 한, 주나라가 혼란에 빠지지는 않을 거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침착해야 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누군가는 나랏일을 걱정했다.

“북요인들이 아직 성 밖에 있잖아. 만약 이들이 폐하께 일이 생겼고, 우리 주나라의 황권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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