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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28)화 (428/1,004)

428화 감히 못 할 게 뭐가 있나

소영화는 육장봉이 손을 뻗는 순간, 진작 옆으로 물러섰다.

그는 야율융진의 꼴사나운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이마를 짚으며 아무것도 못 본 척했다.

진작에 이럴 줄 알았다.

‘망신이 따로 없군!’

“흠흠…….”

주나라의 관리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을 죽였으니 주나라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며, 육장봉을 탓할 수 없었다. 야율융진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들이 육장봉을 싫어하기는 했다. 하지만 육 대장군의 이번 공격은 통쾌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네 번 이긴 것뿐이잖아? 북요인은 뭘 이렇게 잘난 척하는 거야?’

‘이제 겨우 일차전인데. 아직도 두 번이나 남았다고.’

개인전인 일차전에서 지더라도, 나머지 이, 삼차전은 단체전이었다. 주나라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주나라는 이미 전장에서 북요를 이긴 적이 있었다.

순간, 주나라의 관리들은 자신만만해졌다. 하나같이 가슴을 활짝 펴고 북요 관리를 기세등등하게 노려보았다.

소영화는 다시 눈을 떴다. 주나라의 관리들이 아까처럼 초조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사기가 드높아진 모습이 보였다.

그는 속으로 묵묵히 야율융진의 경솔함을 탓했다. 야율융진이 이유 없이 육장봉에게 위엄을 세우고 기세를 북돋을 기회를 준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아무리 후회해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소영화는 마음속의 울화를 가라앉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야율융진의 옆으로 다가가 그를 의자에서 ‘뽑아’ 냈다.

“전하, 일단 일어나십시오.”

“꺼져!”

야율융진은 도발이 실패한 것은 물론, 육장봉에게 망신만 당하자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손에 든 칼을 맞은편의 주나라 관리들에게 던졌다. 육장봉처럼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율융진의 칼이 날아오자마자 육장봉이 탁자의 자기 조각을 던졌다.

챙!

자기 조각과 야율융진의 칼이 허공에서 부딪혀 맑은 소리를 내더니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휴…….”

야율융진의 표적이었던 주나라 관리는 자기가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다. 뜻밖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육장봉에게 도움을 받았다.

‘육장봉이 내 목숨을 구했구나! 반드시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야지.’

그 관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놀라움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떨리는 몸으로 일어났다.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육장봉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나중에 육장봉을 탄핵할 때, 사람들에게 배은망덕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막 일어났을 때였다. 야율융진이 한발 앞서 육장봉을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육장봉, 네놈이 감히!”

“감히 못 할 게 뭐가 있나.”

육장봉은 뒷짐을 지고 태연한 기색으로 있었다. 야율융진의 울화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네놈이…….”

야율제는 화가 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나 육장봉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또 앞으로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소영화가 그를 꽉 잡고 있었다.

“전하, 여기는 주나라입니다.”

“주나라면 또 어떠냐? 우리 북요에게 패한 놈들이 아니냐? 당당한 대황자가 어찌 저자를 무서워하겠느냐?”

야율융진은 소영화를 밀치고 오만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턱을 위로 한껏 쳐들고 육장봉을 도발적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에는 음험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육장봉은 태연하게 그를 힐끗 보고는 손을 들었다.

사람들은 육장봉의 동작을 보자, 이상하게 가슴이 떨렸다. 그들은 숨을 참고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육장봉의 말을 놓칠까 두려웠다.

육 대장군이 큰일을 벌일 게 분명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는 북요를 상대할 때, 주먹이라면 몰라도 절대 말로 하지 않을 위인이었다.

단지 ‘감사하다’라는 말 한마디로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갚으려고 했던 주나라의 관리도 상황을 보았다.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기회를 노려야 했다.

“대장군!”

육장봉이 손을 들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육이가 바로 한걸음 다가왔다.

“가서…….”

육장봉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태연한 기색으로 명령을 내렸다.

“북요의 대황자께 새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드려라.”

“엥?”

“어?”

“뭐라고?”

육장봉의 명령을 들은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의심했다.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옆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보다 더 어리둥절한 표정인 걸 보자, 그제야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음을 알았다.

모두는 하나같이 쓴웃음을 지었다.

‘육 대장군은 우리를 놀리는 건가?’

단, 그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신호는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을 뿐, 놀라지 않았다.

육장봉이야말로 타고난 반골(反骨)이었다.

“육장봉, 겁먹은 거냐?”

야율융진은 처음의 경악한 표정에서 바로 원래의 얼굴을 되찾았다. 그리고 비웃으며 비꼬았다.

“계속 싸울 텐가?”

육장봉이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야율융진이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자리에 앉아 줄곧 말없이 있던 신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전하, 다섯 번째 시합이 곧 시작됩니다. 무슨 일이든 비무가 끝나고 다시 말씀하시지요. 주나라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 관리를 죽였습니다. 이 일은 주나라에서 조만간에 우리에게 제대로 해명해야 할 겁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신호의 거칠고 듣기 싫은 목소리는 아주 우렁찼다. 그가 입을 열자, 모두의 목소리가 묻혀 버렸다.

야율융진은 화난 표정을 감추기 힘들었다. 하지만 신호가 입을 열었으니, 내키지 않더라도 한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대원수가 말한 대로 하지!”

신호가 입을 열자, 야율융진도 물러섰다. 북요의 관리들 역시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곧 병사가 올라와 처참하게 죽은 북요 관리를 들어서 옮겼다. 관람석의 망가진 탁자와 의자들도 치웠다.

이제 더는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육장봉에게 도움을 받은 관리는 바로 일어서서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현장의 분위기가 괴이할 정도로 조용함을 알아차렸다.

“이…….”

그 관리가 입을 열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바로 그때, 육장봉의 호위병이 앞으로 다가와 그를 위해 의자를 닦는 모습을 보았다. 의자가 깨끗해지자, 육장봉은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고 태연하게 자리에 다시 앉았다.

육장봉이 자리에 앉자마자, 등 뒤에 있던 다른 호위병 하나가 새 다구를 들고 앞으로 왔다. 그리고 그의 앞의 어수선한 탁자를 말끔히 치웠다.

육장봉은 찻주전자를 들고 직접 차를 따랐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대장군이 차를 마시는 중이니, 역시 감사 인사를 하기에 적당한 기회는 아닌 것 같군.’

감사 인사를 하려던 관리는 열었던 입을 또 다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못 본 척 자리에 다시 앉았다. 육장봉을 묵묵히 바라보며 그가 손에 든 차를 다 마시기만을 기다렸다.

육장봉이 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관리는 누구에게 기회를 뺏길세라 다급히 일어났다.

“대…….”

바로 이때, 병사 넷이 새 탁자와 의자를 들고 쿵쿵거리며 걸어왔다. 그들은 탁자와 의자를 야율융진 앞에 두었다.

“대황자, 탁자와 의자는 여기 두면 되겠습니까?”

‘왠지 지금도 입을 열 때가 아닌 것 같군.’

그 관리는 머쓱한 표정으로 또 묵묵히 제자리에 앉았다.

병사들이 의자를 두고 내려갔다. 그 관리는 기회가 온 것 같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

둥!

비무대에서 심판을 맡은 사람이 큰북을 세게 쳤다.

“다섯째 시합, 시작!”

관리는 지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또 감사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는 원래 여기서 감사 인사를 하고 일을 매듭지으려고 했다. 나중에 육장봉을 탄핵할 때, 배은망덕하다고 욕을 먹기 싫어서였다. 그런데 그것이 왜 이렇게 힘들까?

그의 양쪽에 앉은 관리들은 동정의 시선으로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로 육 대장군이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없는 일로 하려고 했을 텐데, 그건 안 될 모양이야!’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빚으로 남을 수밖에 없겠네!’

그 관리는 몇 번이고 일어났다, 앉았다 했다. 육장봉이 못 보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가 야율융진의 칼을 떨어트린 것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북요인이 주나라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육장봉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태연하고 덤덤한 얼굴로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비무대에서 한참이나 기다린 조계안은 드디어 시합을 시작하라는 신호를 받았다.

그는 손목을 움직였다. 칼자국이 얼기설기 난 얼굴에는 음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시작하네!”

“주나라 겁쟁이, 내 주먹맛 좀 봐라!”

조계안과 함께 비무대에 서 있는 북요 장사는 조계안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그러나 몸집은 두 배 정도나 되었다. 그의 몸은 군살이라고는 하나 없이 전부 딱딱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가 비무대에 서자, 마치 움직이는 작은 산처럼 보였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임시로 지은 비무대가 흔들렸다.

소처럼 강한 북요의 장사 앞에 서 있는 호리호리한 조계안은 확실히 왜소하고 연약해 보였다. 북요인들이 비웃을 만도 했다.

이 두 사람을 한데 세워 놓으니, 척 보아도 같은 체급이 아니었다. 조계안의 호리호리한 몸은 상대방의 한주먹도 당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후…….”

북요의 용사는 몸집이 거대했지만, 아주 날렵했다. 그는 아무런 꼼수도 쓰지 않고, 조계안에게 바로 주먹을 뻗었다.

그의 이 주먹은 빠르고도 강했다. 주먹을 휘두름과 동시에 거센 바람이 일었다.

조계안은 제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 북요 장사의 주먹이 내리꽂히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끝장이다!’

‘다섯 번째 패배로군.’

이 장면을 보자, 관람석의 주나라 관리들은 차마 더는 볼 수 없어 하나둘 고개를 돌려버렸다.

‘끝났구나!’

비무대 아래에서 주변을 지키던 주나라의 병사도 이 장면을 보자, 긴장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했다.

북요인은 비겁한 수단으로 비무에서 이겼다. 주나라 사람들은 이를 반드시 기억해 둘 것이다.

오늘, 그들은 북요인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전장에서 오늘의 피맺힌 원한을 갚아 주리라.

그와 반대로, 북요인들은 흥분해서 고함을 질렀다.

“저자를 죽여라!”

“숨을 붙여놔. 그 주나라 놈을 피떡으로 만들어 버려!”

“우오오……. 죽여라!”

“죽여라!”

북요인들은 하나같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앞서 육장봉에게 눌려 꼼짝달싹하지 못했던 울화를 전부 퍼부으려는 듯했다.

야율융진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대신 야멸찬 시선으로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육장봉이 자기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손을 펼치고 다섯 손가락을 비틀면서 ‘너를 짓이겨 죽이겠다’라는 뜻을 드러냈다.

육장봉은 그를 힐끔 보고 덤덤하게 시선을 돌렸다.

너무 멍청했다. 차마 쳐다보기도 힘들 수준이었다. 저런 멍청이에게 적수로 여겨지는 것조차 수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린 육장봉이 겁을 먹은 줄 알고, 야율융진은 방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탁자 위의 찻주전자를 들어 올려 입안에 바로 콸콸 쏟아부었다.

그러나 막 한 모금을 삼킨 순간이었다. 야율융진은 그 자리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그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자신이 본 것을 차마 믿을 수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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