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수횡천은 뭔가를 느낀 듯, 조계안을 힐끔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수횡천은 조계안의 정체를 바로 알아챘다. 그는 뒤로 한걸음 물러선 뒤, 조계안에게서 신경을 껐다.
수횡천은 육장봉의 계략에 빠져 육장봉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 건 전부 잠한성이 조왕을 죽일 뻔했기 때문이다.
‘이 조왕은 지독한 놈이다. 잠 선배를 속임수에 끌어들이려고 목숨을 걸고 모험을 했어.’
그는 음모에 관해서라면 자신은 조왕의 상대가 못 된다는 것을 시인했다. 조왕을 건드릴 수 없다면, 피할 수밖에 없었다.
육일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도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육 대장군의 칠 할 정도는 되는 위엄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약봉지를 꺼내더니, 칼날 같은 시선으로 군영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약은 가져왔다. 지금 먹고 다음 비무를 준비해라.”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육일과 가장 가깝게 있던 사람이 다급히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육일이 손에 들고 있는 약을 건드리지 않았다. 심지어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육일과 거리를 유지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기대에 부풀어 신체 능력이 순간적으로 강화되는 약을 얼른 먹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손을 내밀어 뺏거나 난리를 치지 않았다.
전에 손 신의가 지은 약이 못 쓰게 되었다. 바로 그들 중 누군가가 한 짓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대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전처럼 그들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육일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기뻐했다.
그들 중 두 사람이 매수당했다. 그러나 한마음인 사람이 더욱 많았다.
장군이 말한 것처럼, 언제나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보다 많기 마련이다. 그들 중 배신자가 나왔다고 해서 모두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육일은 시선을 거두고 무겁게 말했다.
“다섯 번째 시합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이겨야만 한다. 손 신의가 만든 약은 일각이 지난 다음에야 약효가 발휘된다. 다섯 번째 시합은 바로 코앞이니 너희가 지금 약을 먹어도 소용없다. 그러니 다섯 번째 시합은…….”
육일은 조계안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포권하며 예를 올렸다.
“장군은 대인께서 나서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대인께서 이기는 동시에 최대한 시간을 끌어 주십시오. 우리가 준비할 시간을 만들어 주십시오.”
조계안은 당장 승낙하는 대신 수횡천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수횡천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무공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보다는 위였다.
수횡천이 이 자리에 있고, 또 육일이 지켜보고 있다. 그러면 잡귀신 같은 소인배는 절대 날뛰지 못할 것이다.
조계안은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 몸에 걸친 검은색 피풍의를 벗자, 장사들과 같은 군복 차림새가 드러났다.
날렵하고 깔끔한 군복은 조계안이 평소보다 음산하지 않고, 강건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는 옷매무새를 느긋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벗었다.
조계안은 올 때부터 가면을 쓰고 있었다. 군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궁금해했다. 사이가 좋은 사람들끼리는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계안은 기세가 날카롭고 위험했다. 그렇다 보니 감히 다가가서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궁금하더라도 자기들끼리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직접 손을 뻗어 가면을 벗었다. 군영 안의 모든 사람이 대놓고, 또는 슬그머니 그를 훑어보았다. 다들 가면 아래에 숨겨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조계안은 그런 시선을 느낀 듯 냉소를 지었다. 일부러 가면을 벗는 속도를 늦추자, 사람들은 조급해져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조계안이 그 반응을 실컷 즐기고 난 다음에야 가면을 벗었다. 가면 아래, 검고 딱딱한 흉터로 뒤덮인 얼굴이 나타났다.
“역시 상처가 있었네. 내 추측한 것이 맞아. 댁도 참, 고작 상처 몇 개 가지고 그랬나? 사내자식이 신경 쓰기는. 뭘 가면으로 가리고 난리야. 가리긴 뭘 가려? 우리가 댁을 싫어할 것도 아니고.”
가면 아래 숨겨진 조계안의 얼굴을 보자, 군영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도, 경멸도 담겨 있지 않은, 단순히 진실을 알고 난 다음 터트리는 기쁨의 웃음이었다. 마치 조계안의 얼굴에 상처가 있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했다.
자기 추측이 틀린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참 못난 자식이구먼. 난 또 반안(潘安 – 중국 서진 시대의 문장가로 미남의 대명사)이나 난릉왕(蘭陵王 – 북제 시대의 명장으로 잘생긴 얼굴로 적들에게 얕보이자 험상궂은 가면을 쓰고 출정했다고 함)처럼 너무 잘생겨서 가면으로 미모를 숨기는 줄 알았지. 상처를 왜 숨겨야 하는데? 우리 모두 전장에서 목숨을 거는 사람들 아니야? 몸이나 얼굴에 흉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딨어?
예전에 내 친구 하나는 북요인 손에 얼굴 반쪽이 깎였어. 얼굴이 귀신 같아졌지만, 가면을 쓰지 않았다고. 너는 못생긴 것도 아니면서 왜 가면을 써?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아.”
맞힌 사람이나, 틀린 사람이나 모두 악의가 없었다. 단지 호의적으로 농담을 건넬 뿐이었다.
‘내가 답답하다고?’
조계안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하얗다 못해 핏기없는 입술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음울한 눈매도 살짝 가늘어지며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수횡천은 또 말없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이 조왕 전하가 아주 무섭게 느껴졌다. 심지어 육장봉보다도 무서웠다.
육장봉은 교활하고 간사하지만, 그래도 정상인이었다. 일 처리를 할 때는 법칙이 있었다.
하지만 이 조왕은 달랐다. 조왕은 미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무려 조왕씩이나 되는 자가 굳이 시합에 나가겠는가? 어째서 북요의 그 정상적이지 않을 게 뻔한 놈들과 싸우려 하겠는가?
이기더라도 아무 영예를 누릴 수 없었다. 진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군대의 병사 대부분은 키가 크고 건장했다. 그들은 긴긴 훈련을 거쳤기에 다들 근육이 튼실하고, 기운이 넘쳤다.
반면, 조계안은 달랐다. 몸집이 호리호리하고, 입술은 창백했다. 음산한 눈에는 병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어떻게 보아도 강한 전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내뿜는 기세는 강했다. 일거수일투족에는 차가움과 날카로움이 묻어 있었다. 주나라의 병사들은 그의 몸이 호리호리하다고 해서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북요인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북요인은 힘을 숭배했다. 그들 눈에는 남자는 건장해야만 했다.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여야만 강하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계안이 걸어 나왔을 때, 북요의 관리들은 전혀 사양하지 않고 마음껏 비웃었다.
“주나라에서는 사람이 없는 건가? 어쩌다 이렇게 왜소한 기생오라비를 내보냈지? 우리 북요 용사들에게 겁을 먹은 모양이군!”
“어? 기생오라비 노릇도 못 하겠는걸. 저 상처투성이 얼굴 좀 보라지. 저 얼굴의 상처는 딱 봐도 우리 북요인이 남긴 게 아닌가. 이렇게 약해서야 주먹 하나도 못 버티는 거 아냐?”
북요의 관리들은 조롱하는 거로도 모자란 모양이었다. 개중 일이 커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자도 있었다. 발 한쪽을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육장봉을 가리키며, 으스대며 말했다.
“육 대장군, 우리 북요인 꽉 막힌 사람들이 아니오. 이렇게 하면 어떤가? 당신이 무릎을 꿇고 내 다리 사이를 기어가면 이번 시합은 주나라가 이긴 거로 하지. 그럼 저 기생오라비는 죽는 걸 면하겠지.”
야율융진도 일이 커지는 것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장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참 좋은 생각이군. 육 대장군, 생각 좀 해 보시겠나? 무릎을 꿇고 기어가기만 한다면 사람 하나는 덜 죽을 게 아닌가. 당신네 주나라는 항상 인의를 중시했잖나? 지금, 이 대황자께서 인의를 발휘할 기회를 주겠네. 육 대장군, 어떤가?”
팍!
육장봉은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꽉 움켜쥐어 부숴 버렸다. 찻물과 찻잔의 파편이 탁자 위로 떨어졌다.
이 광경을 보고, 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육장봉에게 그의 다리 사이를 기어가라던 관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육 대장군, 지금 화가 나더라도…….”
하지만 다음 순간,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육장봉이 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그의 손안에 있던 자기 파편이 날카로운 화살처럼 북요 관리의 목울대를 그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파편이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렸다. 고개를 숙이더니 끊임없이 피가 솟구쳐 나오는 자기 목을 바라보았다.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어떻긴.”
육장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야율융진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육이가 건네준 손수건을 받아들고 손의 물기를 깨끗하게 닦았다.
“육장봉, 이놈이……!”
야율융진은 탁자를 내리치며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육장봉의 시선은 그의 너머에, 목을 베였는데도 여전히 넘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서 있는 북요 관리에게 닿아 있었다.
육장봉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화나지 않았다.”
사람이 죽고 나서야 육 대장군은 귀하신 몸을 낮추어 한마디 대답해 주었다. 참으로 방자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주나라와 북요의 관리들은 일제히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한참이나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사신을 죽이다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라고?’
비무의 현장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쿵!
도발에 실패하고 목이 베인 북요 관리가 쓰러지고 나서야 이 고요함이 깨졌다.
야율융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육장봉, 네놈이 사람들 앞에서 우리 북요의 관리를 죽였다. 네놈 눈에 우리 북요가 있기는 하느냐?”
북요와 주나라는 양쪽으로 나누어 앉아 있었다. 야율융진은 오른쪽의 상석에, 육 대장군은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만약 옆에 앉았던 소영화가 잡아당기지 않았더라면, 야율융진은 진작에 칼을 뽑아 육장봉에게 휘둘렀을 것이다.
“이치를 따져 보자는 건가?”
육장봉은 일어서서 한쪽 발을 의자 위에 올려 두고 윗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주 공격적이고 협박성이 짙은 태도였다.
“먼저 내 다리 사이를 기어가고 난 다음에 이치를 따져라!”
“감히 이 대황자를 모욕해!”
야율융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소영화도 더는 야율융진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는 소영화의 제압에서 벗어나더니, 칼을 뽑아 육장봉에게 휘둘렀다.
“전하……!”
소영화는 재빨리 쫓아갔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야율융진은 이미 칼로 육장봉을 벤 뒤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신호는 이 광경을 보자, 눈을 휘며 웃었다. 추악한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가 이래 봬도 이치대로 따지는 걸 좋아하지!”
야율융진의 칼이 육장봉을 베려는 순간이었다. 육장봉은 몸을 돌려 피하더니, 바로 야율융진을 걷어차 버렸다.
쿵!
발에 채인 야율융진이 허공을 날아 등 뒤에 있던 탁자를 부수었다. 그의 몸이 원래의 자리에 주저앉았다.
야율융진이 워낙 세차게 떨어지는 바람에 의자가 부서졌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의 엉덩이는 의자에 붙어 있는데 두 다리는 허공에 떠 있어서 아주 우스꽝스러웠다.
야율융진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넋이 나간 채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