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426)화 (426/1,004)

426화 내가 나가겠어

월령안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엄숙하게 말했다.

“영감님, 이런 생각은 좀 위험한데요. 혹시 최근에 무슨 쓸데없는 책을 본 거 아니에요? 영감님, 제가 말했잖아요. 책은 사람이 쓴 것이고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요. 이 연세가 되어서 어쩜 아직도 책 내용에 속을 수 있어요. 요즘 약을 많이 드셔서 머리가 잘못된 것 아니에요?”

노인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입가를 실룩거리더니 퉁명스럽게 월령안의 손을 찰싹 때렸다.

“망할 꼬맹이가, 뭐라고 하는 거냐. 어서 썩 꺼져!”

월령안은 폴짝 뛰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노인에게 손을 저었다.

“영감님, 좀 순수하게 사세요. 연세도 있는데 이젠 심신을 닦고 교양을 쌓으셔야죠. 맨날 그런 쓸데없는 생각만 하시지 말고요. 영감님 연세에 풍류가 무슨 소용이에요. 몸이 마음을 못 따르잖아요.”

“이 망할 꼬맹이, 어서 꺼져!”

노인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내가 다시 육장봉을 편들어 주면 조씨 성을 간다!’

* * *

성 밖 군영.

상석에 앉아 양국 비무를 관람하던 육장봉이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관람하는 자리에는 육장봉과 주나라의 관리들 말고도, 북요의 대황자 야율융진, 북요의 대원수 신호, 북요의 관리들이 있었다.

주나라의 최고 사령관이자 이번 비무의 책임자로서, 육장봉의 일거수일투족은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그가 재채기를 하자, 수많은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특히 북요의 대황자는 바로 입가를 씰룩거리며 비웃는 기색을 드러냈다.

건수를 잡은 야율융진은 곧바로 육장봉을 비꼬았다.

“육 대장군, 지금 겁이라도 먹은 건가?”

그가 입을 열자, 북요 쪽의 관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놀라서 울음을 터뜨린 게 틀림없어! 주나라 놈들은 사기를 잘 치지. 우리가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이득을 보려는 거 아냐?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전신(戰神)이오, 절대 지지 않는 천하무적 장수라더니. 지금 허풍이 까발려지려고 하니 겁을 먹고 두 다리가 나른해진 게 틀림없어. 바지에 오줌을 쌌을지도 모르지.

시합을 세 차례 치렀는데 주나라의 병사는 전부 죽었잖아. 어디에서 찾은 계집애들인지, 하나같이 약해 빠져서는 제대로 버티지도 못해. 우리 북요 용사의 주먹 하나도 버티지 못하더라니까. 정말 약해 빠졌어.”

마치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비무대 위의 북요 용사가 주나라 용사에게 주먹을 휘둘러 비무대 밖으로 떨어트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주나라의 선수는 땅에 떨어졌다. 그는 진흙처럼 땅에 푹 퍼져 꼼짝도 못 하고 피만 철철 흘렸다.

비무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 광경을 본 주나라의 관리들은 굳은 얼굴로 하나같이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두렵고 불안한 시선에는 원망도 섞여 있었다.

누군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분노에 차서 소리를 쳤다.

“대장군, 네 번쨉니다.”

그들이 이제까지 치른 네 번의 시합은 모두 참패였다.

북요인은 그들의 상상보다 훨씬 강했다. 그들의 병사로는 북요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게 다 육장봉 탓이야. 육장봉만 아니었더라면 우리 주나라도 북요와 적이 되지는 않았겠지. 우리는 북요와 계속 잘 지내면서 양국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어. 이토록 체면을 모조리 잃고 비웃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야.’

육장봉은 그저 덤덤하게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 눈길을 주기는커녕 평온한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육일의 모습이 나타났다.

육장봉은 살짝 눈을 감고, 눈 속의 날카로운 빛을 숨겼다.

주나라 관리들의 안색이 나빠진 만큼, 북요 쪽 관리들은 기분이 좋아졌다.

“주나라가 연속으로 네 번이나 졌네. 매 시합 이렇게 처참하게 졌지. 우리가 너무 이겨서 미안해지려는 참이었어. 하지만 하는 수 없잖아. 당신네가 너무 약한걸. 우리가 주나라의 체면을 봐주려고 양보를 좀 해 주고 싶어도 안 되잖나.”

“육 대장군, 미안하게 됐소이다.”

야율융진도 입을 열었다. 눈에는 음산한 기운이 번뜩였다. 그는 육장봉을 오만하게 바라보면서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띠었다.

옆에 앉은 신호와 소영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계심과 안도가 함께 떠올라 있었다.

육장봉이 어떤 대책을 준비했는지, 그들은 오늘 아침에야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주나라의 관리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다. 그 틈을 타서 그들은 육장봉이 이길 가능성을 없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관람석에서 비웃음을 당하는 쪽은 바로 그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비웃음, 질책, 불신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육장봉은 여전히 태산처럼 견고했다. 심지어 야율융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명령을 내렸다.

“저자를 실어 가라. 다섯 번째 시합을 준비한다!”

“네, 대장군!”

육이는 육장봉 뒤에 서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병사들을 지휘해, 땅에 엎어져 있는 패배한 전사를 데려가게 했다.

벌써 네 번째 시합이 끝났다. 시합에 참가한 주나라 선수 네 명이 모두 죽었다.

‘북요인이 이토록 잔혹한데, 우리 주나라의 관리들은 여전히 북요인과 잘 지낼 생각을 하다니. 참 아둔하기 그지없군.’

육이는 떠나기 전에 속으로 몇몇 관리를 묵묵히 기억해 두었다. 그들은 질책의 시선으로 대장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자들은 원흉은 아닐지 몰라도, 공모자나 다름없어.’

“대장군, 앞으로 남은 다섯 시합은 자신이 있소?”

황제를 대신해서 오늘 비무에 출석한 종실의 친왕이 육장봉의 옆자리에 앉아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시합을 연속 네 번이나 졌다. 그것도 모두 처참하게 졌다. 여기서 또 진다면 주나라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

“괜찮습니다.”

육장봉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희비를 엿볼 수 없었다.

“육 대장군, 곧 다섯 번째 시합이오. 우리 북요가 만약 오 연승을 한다면, 주나라에서도 뭐 더 할 것이 있겠나? 이렇게 처참하게 졌으니 돌아가서 어떻게 보고할 텐가?

아니면 우리가 체면을 좀 봐 드리면 어떻겠소? 뒤의 다섯 차례 시합 중에서 네 시합은 비겨 드리리다. 마지막 한 판은 어차피 우리가 이길테니까. 그럼 주나라에서 준비한 선수들도 전부 출전할 기회가 있겠지.”

야율융진은 육장봉을 짓밟을 기회라면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았다. 기회만 잡았다 하면 육장봉을 비꼬기 바빴다. 모두에게 육장봉은 아무것도 아니고, 허풍만 칠 줄 아는 멍청이라고 알리지 못하는 게 한스러운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멍청이의 손에 진 북요는 무엇이 되겠는가.

그는 이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육장봉은 아무 말 없이 야율융진을 힐끗 훑어보았다. 그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은 사람을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야율융진은 고소해하는 기색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압도당해서 표정이 오묘해졌다. 정신이 번쩍 든 야율융진이 또 비꼬려는 순간이었다. 소영화가 갑자기 그를 끌어당겼다.

“대황자, 비무가 더 중요합니다.”

야율융진의 얼굴이 순간 흉하게 일그러졌다.

“다섯 번째 시합은 절대 봐 주지 말고, 천천히 진행해라. 주나라에게 우리 북요 용사의 용맹함을 보여줘라.”

“대황자,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비무에서 우리는 주나라 놈들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남겨 줄 겁니다.”

소영화는 변경에 도착한 뒤 겪었던 주나라 사람들의 무시와 경멸에 속이 끓던 참이었다.

북요는 반드시 비무에서 이겨 주나라의 위세를 꺾어야 했다. 예전처럼 주나라 사람들이 그들 북요의 이름만 들어도 덜덜 떨게 해야 했다. 북요가 병마를 기를 수 있도록 주나라가 예전처럼 순순히 공물을 바치고, 돈을 바치게 해야 했다.

시합 현장의 분위기는 아주 경직되어 있었다. 주나라 관리들은 모두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후방에 있는 군영의 분위기도 좋지 못했다.

기개가 굳센 사내들도 처참하게 죽은 동료를 바라보며 하나같이 눈이 벌게졌다.

“북요 놈들이 우릴 너무 업신여기네. 이렇게 비열한 수단으로 승리를 얻다니. 재주가 있다면 전장에서 제대로 겨루어 보자고!”

“기(器) 씨가 너무 처참하게 죽었어. 난 기씨를 위해 복수할 거야! 난 꼭 이길 거야!”

말을 한 병사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옆에 서 있던 키 큰 남자에게 잡혔다.

“내가 너보다 몸이 더 좋아. 다섯 번째 시합에는 내가 나가겠어! 북요의 저 개자식들은 전장에서 내 상대가 되지 못했잖아. 지금도 저놈들은 날 이길 재주가 없어!”

그는 몸집이 건장했고, 맷집은 더욱 좋았다.

북요에서 내보낸 선수들은 사람이라 부를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괴물이었다. 다들 칼이나 창으로도 살갗을 꿰뚫을 수 없고, 힘은 소보다도 강했다. 상대편을 쉽게 들어 내던졌다. 한 주먹만으로도 사람을 날려 보냈다.

이런 괴물을 상대로는, 다른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합 때 잠시나마 더 버티고, 두어 주먹 더 버텨서, 주나라가 처참하게 지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연속 네 번을, 그것도 매번 처참하게 졌다. 이 사실은 주나라 선수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그렇다 해도, 그들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들도 도움을 받지 않고는, 신체 개조를 거친 북요의 전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비무대에 오르면 죽음뿐임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더욱 기를 쓰며 자기가 먼저 비무대에 오르려고 했다.

“내가 가겠어. 난 몸이 날쌔서 잘 피하니까,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어. 그리고 난 저 북요인에게 약점이 없을 거라고는 믿을 수가 없어. 내가 시합에 나간 다음, 저놈들의 약점을 찾아내서 다른 사람에게 이길 기회를 마련해 줄 거야.”

“내가 간다고 했잖아. 난 몸이 좋고 맷집도 좋아. 저놈들의 주먹이 아무리 강해도, 나한테는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고.”

“내가…….”

일차전에는 장사 아홉 명이 참가한다. 육장봉은 강한 아홉 명을 외에도 후보 세 명을 더 준비해 두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비무 전에 두 명이 독을 먹고 자결했다. 이제 시합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여섯 명이 남았다. 그리고 지금, 이 여섯 명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가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한창 다투고 있을 때, 육일이 돌아왔다. 그리고 수횡천과 육비우를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손불사가 지은 약도 가져왔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육일의 모습을 보고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육일 형님, 돌아오셨군요! 손 신의가 지은 약을 가져왔습니까?”

“육일 형님, 어서, 약을 제게 주세요. 제가 가서 다섯 번째 시합에 참가하겠습니다. 손 신의가 지은 약이 있다면, 우리 몸도 북요의 저 개자식들처럼 강해지겠죠. 이제 진짜 실력으로 겨룬다면, 우리가 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육일이 오자,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하나같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육비우와 수횡천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했다.

그러나 구석에 숨어 있던 조계안은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수횡천을 힐끗 쳐다보았다. 가면 아래의 얼굴에서는 싫다는 기색이 스쳤다.

‘육장봉이 쓸 수 있는 사람이 이 얼간이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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