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월령안의 가장 큰 밑천
세 서생의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보다는 약자인 여인과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더욱 믿음이 갔다. 특히 그 여인들과 아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세 서생의 이름과 내력을 읊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더욱 의심이 사라졌다.
또 그 거지 노파는 더욱 쉽게 믿음을 얻었다. 그녀는 서생의 이름을 말한 뒤, 그가 고향에서 했던 악행을 쭉 나열했다.
구경하던 백성들은 바로 그 서생을 손가락질하며 욕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거지 노파를 도와 그 서생을 묶어 두기까지 했다.
또 오지랖 넓은 어떤 사람은 그들 모자를 성 밖까지 배웅해 주겠다며, 소달구지를 하나 끌고 왔다.
“우리도 성 밖에 살아요. 저희도 태워 주실 수 있나요? 여러분,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여(余)씨예요. 저를 여 낭자라고 부르셔도 돼요. 제 서방님은 마(馬)씨예요. 서방님께서 집의 돈을 가지고 과거를 보러 간다고 떠나신 지가 삼 년이나 됐어요.
그런데 아주버님이 우리 모녀를 팔겠다는 거예요. 저는 딸을 데리고 도망쳐 나와 구걸하면서 변경까지 왔어요. 우리 모녀는 지금 성 밖의 낡은 사당에서 지내고 있어요. 못 믿으시겠으면 저를 따라 함께 가요.”
이 여인이 말하자, 다른 두 여인도 분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들도 성 밖에서 지낸다고 했다. 다들 남편을 찾으러 왔는데, 성 밖에서 만나 서로를 위로해 주며 함께 사람을 찾았다고 했다.
성 밖에는 그녀들처럼 변경에 와서 가족을 찾는 사람이 여럿 있다고 했다. 그녀들은 운이 좋아 이렇게 가족을 찾았다고 했다. 이 서생들의 소문을 듣고, 인상착의가 비슷해 혹시나 해서 다 같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구경하던 백성들은 거지 여인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열정적으로 나섰다. 그녀들을 도와 서생들을 성 밖으로 데려다주기로 했다.
세 서생들이 도망칠까 걱정된 백성들은 서생들을 묶는 데 쓰라며 너도나도 허리띠를 끌러 주었다. 어렵게 찾은 남편들이 또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묶어 버리라는 뜻이었다.
최일은 마차에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원이 불분명한 거지 여인 넷이 환한 대낮에 사람을 데려갈 뿐만 아니라 구경하는 백성들의 도움까지 받자,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
월령안이 이 일은 아주 깔끔하게 해치웠다.
그러나 변경의 치안을 확실히 제대로 손볼 필요가 있었다. 특히 이 한가한 나머지 이리저리 오지랖을 피우는 저 백성들부터 단속해야 하리라.
최일은 행화루 밖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 네 서생이 사람들에게 잡혀가는 것을 보자마자 마부에게 최씨 저택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월령안의 일이 해결되었으니, 그도 드디어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거의 하루 밤낮하고 또 한나절을 꼬박 지새운 참이었다. 마차에서 눈을 붙이는 게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눈을 감고 잠들었을 것이다.
최씨 가문의 마차가 떠났다. 오래지 않아 행화루 밖을 둘러싸고 있던 백성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행화루 밖은 곧 원래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 * *
행화루 맞은편 다루에는 한 노인과 소년이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바로 장 부승상과 장 오공자였다.
그들이 앉은 자리는 마침 행화루 밖에서 벌어진 소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으슥했다.
“다섯째야, 무엇을 보았느냐?”
장 부승상은 온화한 표정이었다. 장 오공자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자애로움과 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월령안이 한 짓입니다.”
장 부승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장 오공자의 강인한 시선에는 날카로움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에게서 예전의 명랑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 부승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만약 너라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장 오공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들에게 거지 여인들을 계속 따라가게 하겠어요. 일벌백계로 다른 사람에게도 경고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위험이 숨어 있을 수 있단다.”
장 부승상은 찻잔을 들더니 차를 가볍게 들이마셨다.
“할아버지, 고작 서생 몇몇일 뿐이에요. 저자들이 감히 우리 장씨 가문을 어찌하겠어요?”
장 오공자는 거만한 미소를 짓고,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장 부승상은 웃으며 말했다.
“다섯째야, 지금 묻는 건 네가 만약 월령안이라면, 네가 만약 월령안의 자리에 있다면 넌 어떡할지를 묻는 거다.”
“만약 제가 월령안의 위치라면요?”
장 오공자는 순간 사색에 잠겼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 거지 여인들의 신분은 곧 들통날 거예요. 만약 제가 월령안이라면 서생들을 죽여서 입막음할 거예요. 아니면 다시는 변경에 돌아오지 못하게 멀리 보낼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게 틀리지는 않았단다. 하지만 어디로 보낼지, 어떻게 보낼지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장 부승상은 장 오공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또 말을 이었다.
“다섯째야, 내가 방금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아느냐?”
장 오공자는 장 부승상을 바라보며 말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꼭 앙다문 모습을 보면 자기가 잘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만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장 부승상은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
“다섯째야, 이럴 필요는 없단다. 넌 월령안이 아니니까, 그런 조무래기들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이런 놈들이 감히 우리 장씨 가문을 건드리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장 부승상이 건넨 위로는 장 오공자의 기분을 풀어 주지 못했다. 장 오공자는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월령안은 어떻게 했나요?”
“월령안의 수법도 너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 하지만 수법이 조금 더 깔끔하고, 안전했지. 월령안은 절름발이 육을 찾아가서 서생들을 모조리 개인 소금 광산에 팔아버리라고 했단다. 소금 광산은 다른 곳과 다르다. 황자나 공주가 간다 하더라도,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말아야 하는 곳이지.”
장 부승상의 눈에는 기쁨이 기색이 드리웠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실망감도 들었다.
기쁨은 손자가 자기의 부족한 점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실망은 손자가 월령안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라면 월령안은 장 오공자의 숫돌이 아닌, 그림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도 평생 떨쳐버릴 수 없는 그림자였다.
정말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월령안을 죽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장 부승상은 장 오공자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손자는 재능을 드러냈지만, 우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장 부승상은 월령안을 숫돌로 삼은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월령안이라는 돌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장 오공자는 찻잔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졌다.
“월령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쓰지 않았어요. 행화루와도 깔끔하게 선을 그었죠. 심지어 최일도 끌어들이지 않았잖아요?”
“그렇지.”
장 부승상은 속으로 한탄했다.
‘다섯째는 지금 월령안과 겨룰 셈이구나. 이것은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기기 위헤서야.’
장 부승상이 모르는 새, 월령안은 이미 장 오공자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장 부승상은 머뭇거리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
“다섯째야, 월령안은…….”
“할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지는 알아요.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장 오공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제가 여인 하나도 이길 수 없다면 앞으로 벼슬길에서 무슨 성적을 낼 수 있겠어요?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게는 반드시 월령안을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잖아요.”
장 부승상 얼굴의 미소가 심각함으로 바뀌었다.
“최일과 너는 같은 세대 사람이 아니다. 넌 최일과 겨룰 필요가 없단다.”
“아니에요, 같은 세대 사람이 맞아요! 최일과 저는 할아버지와 소 승상과 같아요. 지금 저와 최일은, 예전의 할아버지와 소 승상이에요. 저는 평생 최일에게 억눌리기 싫어요. 그러려면 반드시 월령안을 눌러야만 해요. 그러면서 최일의 모든 도움도 잘라내야 해요. 지금부터 계획을 짜야겠어요.”
장 오공자의 눈에는 굳센 의지가 드리웠다. 비록 재차 좌절을 겪었지만, 이걸로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똑바로, 더욱 먼 곳을 보았다.
장 부승상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섯째가 다 컸구나.”
“단지 목표와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을 뿐이에요.”
장 오공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찻잔을 움켜쥔 손가락의 힘이 조금 풀어졌다.
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는 아직 그가 필요했다. 그는 예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계시는 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지금은 누가 권력을 쥐든지 간에, 자기가 직접 권력을 가진 것만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그를 아낀다 해도, 그를 위해서 가문의 이익을 희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할아버지 옆을 따라다니면서 똑똑하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단지 쓸모가 있으니까 그를 아끼는 것이다.
‘만약 어느 날, 내가 큰형, 둘째 형처럼 못나게 군다면, 또는 원아처럼 가문에 폐를 끼치게 된다면, 할아버지께서는 분명 날 가차 없이 포기하실 거야.’
그래서 그는 월령안과의 싸움을 반드시 계속해야만 했다. 또한,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그렇게 해야만 할아버지의 사랑을 계속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장씨 가문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장 오공자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자신의 처지가 못내 서글프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처음에 할아버지의 제안에 승낙하고, 이 길을 걷기로 한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었다.
한 걸음이라도 물러선다면, 윗자리에 오른 다른 형제들은 그를 제일 먼저 처리하려 들 것이다.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장 오공자는 손에 든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미 마음을 차분하게 굳혔음이 드러났다.
장 오공자가 이렇게 냉철한 것을 보고, 장 부승상은 속으로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다섯째야, 월령안의 가장 큰 밑천이 무엇인지 아느냐?”
“돈입니다.”
장 오공자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돈은 확실히 월령안의 밑천 중 하나지. 하지만…….”
장 부승상은 인내심을 가지고 장 오공자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다섯째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다. 최일만 봐도 그렇다. 최일도 월령안 못지않게 부유하지. 월령안이 돈을 얼마나 들여야 최일을 매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장 오공자는 다시 입술을 꼭 닫고, 고집스러운 얼굴을 했다.
장 부승상도 화를 내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다섯째야, 우리는 상대의 강함을 인정해야 한단다. 강한 적을 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랑할 만한 일이지. 모두가 다 월령안을 적으로 둘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생각해 봐라, 월령안의 저번 적은 누구였더냐? 북요의 남원대왕이었지. 그리고 우리 주나라의 장공주, 영녕후였던 적도 있고, 소 승상 일가였던 적도 있었다. 네게 월령안 같은 적수가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다.”
장 오공자는 고개를 숙이고 볼멘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도 월령안의 가장 큰 밑천이 인맥인 건 알아요. 하지만 월령안은 결국 돈으로 강한 인맥을 만들어 냈죠. 최일도 월령안에게 바라는 게 있어 교제하는 게 아닌가요?”
“이 점은 나도 부인하지 않아. 하지만 너도 월령안이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거다. 그게 아니라면, 고작 이익만으로는 최일이 월령안 때문에 순천부윤이라는 애물단지를 받아들이게 할 수 없을 거다. 또한 육장봉이 보호하겠다고 나서게 할 수도 없단다.”
장 부승상은 월령안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월령안의 주변에는 이미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