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제가 다시 정리해 드릴게요
월령안은 그를 마주해 걸어가다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빛 속에 서 있는 육장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순간 황홀경을 느꼈다.
이 남자는 참 잘생겼다.
그는 마치 하늘의 친자식 같았다. 하늘이 가장 좋은 것을 모두 이 사람에게 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남자는 참 악랄했다.
이 악랄한 남자는 영원히 저럴 것이다. 제자리에 서서, 그녀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또 그녀가 다가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월령안은 마음속에서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멈칫했을 뿐, 곧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와 육장봉은 단 한 번도 공평했던 적이 없었다. 늘 그녀가 육장봉을 쫓아가야 했다. 예전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월령안이 앞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육장봉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월령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멍하니 뭐 하는 거요? 얼른 가지 않고.”
월령안은 확실히 멍한 상태였다. 육장봉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는 걸 차마 믿을 수 없었다.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육장봉은 이미 몸을 돌려 입구로 걸어가고 있었다.
월령안은 피식 웃고는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육장봉은 입궁하느라 마음이 급해 내 쪽으로 한걸음 다가왔을 뿐이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월령안은 빠른 걸음으로 육장봉의 뒤를 따라갔다. 미풍이 하늘하늘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스치고 지났다. 그녀는 다시 차분해졌다.
육장봉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러 속도를 늦추더라도 그의 다리가 길다 보니, 그녀가 빨리 걸어야만 따라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곧 입구에 도착했다. 육장봉은 일부러 월령안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하자 문턱을 넘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뒤를 따라 그가 문을 나서는 걸 배웅했다. 그리고 또 두어 걸음 더 걸어 나가더니, 육장봉이 계단을 내려가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헤어지기 싫더라도’, 월령안은 여기까지만 배웅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육장봉이 떠나는 것을 눈으로 배웅하려고 할 때였다. 육장봉이 갑자기 몸을 돌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북요의 첩자가 바로 맞은편에 있소. 한 사람이 아니오.”
육장봉과 월령안은 계단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 서 있는 육장봉은 월령안보다 키가 머리 반 개쯤 더 컸다. 두 사람이 말할 때 일부러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 거리는, 이 자세는 지나치게 친밀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숨결에 섞인 열기를 느낄 수 있을 듯했다.
이 눈높이가 조금 낯설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둘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저더러 뭘 하라는 건가요?”
“내 옷깃이 단정하지 못하지 않소?”
육장봉의 눈빛은 깊고도 또렷했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월령안을 희롱하거나, 수작을 부릴 뜻은 전혀 없어 보였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바라보며 잠시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웃는 얼굴을 하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손을 들어 육장봉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미 아흔아홉 걸음이나 간 마당에, 한 걸음 더 내디딘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었다.
친밀한 척하는 것뿐이다. 북요인이 어젯밤 육장봉이 명월산장에서 밤을 보낸 이유가 순수하게 사적인 감정이라고 여기게 하면 될 게 아닌가.
‘난 할 수 있어.’
월령안이 담담한 향을 풍기며 갑자기 다가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육장봉은 아주 침착했다. 어차피 처음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보다 더 친밀한 행동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월령안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목덜미 사이를 누빌 때, 육장봉은 온몸이 제어되지 않을 정도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호흡도 점점 거칠어졌다.
육장봉은 경계심이 대단히 강했다. 그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그가 믿는 열두 친위대라고 하더라도 그의 목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월령안은 처음이자 유일하게, 그의 목을 건드리고도 살의를 느끼게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월령안을 바라보는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월령안과 육장봉은 아주 가깝게 기대 있었다. 두 사람 사이는 고작 주먹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남들 눈에는 둘이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리였다.
명월산장 밖에 숨어 있던 북요 첩자들은 육장봉과 월령안이 대문 입구에서 껴안은 모습을 보았다. 찰싹 붙어서 한참이나 손을 떼지 못하자,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
개중 거만한 자는 참지 못하고 비꼬기까지 했다.
“주나라의 사내는 역시 계집애 같다니까. 온종일 여인밖에 모르는군. 저런 놈이 어떻게 우리 원수의 상대가 되겠나? 주나라는 이번에 질 게 분명해.”
계단 아래에 서 있는 육장봉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북요 첩자의 말을 들은 게 분명했다.
월령안은 밖에 북요 첩자가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몰랐다.
그녀는 진작 육장봉의 옷깃을 정리했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뜻밖에도 그녀의 손가락이 육장봉 목의 살결에 닿을 때마다, 그가 저도 모르게 긴장해 뻣뻣해지는 게 느껴졌다. 귀 끝도 점점 빨개지고 있었다.
육장봉은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녀에게 가만히 희롱당하고 있었다.
월령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짓궂게 육장봉의 옷깃을 무려 세 번이나 정리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손가락은 육장봉 목의 살갗을 무심결에 건드렸다. 육장봉은 그녀가 건드릴 때마다 한 번, 또 한 번 몸이 뻣뻣해졌다. 그의 귀 끝도 끊임없이 빨개졌다.
육장봉을 여러 번 반복해서 희롱한 월령안은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생긋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말했다.
“대장군, 이렇게 하면 되나요?”
“다 놀았소?”
육장봉의 눈에는 놀라움이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피로감과 무력감이 묻어 있었다.
‘북요 첩자가 바로 등 뒤에 있는 상황에서 정신을 놓다니. 정말 나답지 않군.’
사랑이란 애간장을 녹이는 독약이라는 말이 맞았다. 방금 그 순간, 월령안이 그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는 진작 천백 번도 더 죽었을 것이다.
“대장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전 못 알아듣겠네요.”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월령안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육이와 육삼을 비롯한 이들은 묵묵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티가 나지 않게 살며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고개를 돌리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했다.
그들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음을 대장군이 알아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방금 월 낭자가 어떻게 그들의 장군을 희롱했는지, 또 장군이 전혀 반항할 힘이 없는 순한 양처럼 월 낭자에게 당하고 있었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놀리는 데 재미가 들린 듯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대장군, 허리띠도 조금 잘못된 것 같은데, 제가 다시 정리해 드릴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 육장봉의 허리띠를 정리하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육장봉의 허리에 닿은 순간이었다. 육장봉이 갑자기 월령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오.”
그는 온몸의 힘을 다해 월령안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윽!”
월령안은 갑작스레 몸이 꽉 안겨지자 약하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육장봉은 곧바로 손을 풀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 말에 올라탔다.
‘대장군께서 박력이 넘치시네.’
육이와 육삼은 고개를 돌렸다가, 마침 육장봉이 월령안을 풀어 주는 장면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을 반짝이더니 정신을 차리고, 육장봉의 뒤를 바싹 쫓아갔다.
월령안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육장봉 일행의 모습이 눈앞에서 점점 사라지자, 월령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한순간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금 또 진 것 같았다.
‘역시, 염치없는 거로 치자면, 육장봉이 천하무적이지.’
월령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산장으로 들어갔다. 또 호원들에게도 접근하는 사람이 없도록, 순찰을 강화하라고 분부했다.
월령안은 밤을 꼬박 새웠더니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한마디 분부한 뒤에는 본채로 돌아와 잠을 보충했다. 그때까지도 한쪽 구석에 서서 그녀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수횡천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수횡천이 아무리 걱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월령안은 이미 북요인에게 노출되었다.
육장봉이 그녀를 찾아오지 않더라도, 북요인은 월령안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 * *
육장봉은 미친 듯이 말을 달려 성문 입구에 도착했다. 그러자 황실 시위가 앞으로 다가왔다.
“대장군, 폐하께서 대장군을 밤새 찾으셨습니다. 폐하를 뵈어야 하니 얼른 입궁하십시오.”
이 말을 전하는 시위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성문 입구에 있던 많은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 그들은 육장봉이 어젯밤 내내 성안에 없었고, 황제도 그를 찾지 못했음을 알았다.
평범한 백성 사이에 숨어 있던 첩자는 육장봉을 힐끔 보았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 틈에 슬그머니 끼어 들어가서, 평범한 행인인 척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주 은밀하게 움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육장봉이 그들의 사소한 움직임마저 모두 지켜보고 있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육장봉은 침착하게 훑어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위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황궁 쪽으로 말을 달려갔다.
육장봉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육이만 데리고 입궁했다. 나머지 호위병은 황궁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첩자는 황궁에 잠입할 능력이 없었다. 육장봉도 평소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바로 소식을 전하고는, 황궁 밖에 숨어 육장봉이 나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육장봉은 입궁하자마자 난각으로 달려갔다.
난각 안에는, 밤새 자지 못한 조계안이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어 눈매를 가려져 있었다. 그 바람에 아무도 그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그는 육장봉이 들어왔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육장봉은 들어오자, 황제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급히 일어서서 다가왔다.
“장봉아, 진척이 있느냐?”
“약은 손 신의가 지어 주었습니다. 신은 그 대가로 황궁에 있는 의서의 유일본은 베껴서 주겠다고 했습니다.”
육장봉은 애를 태우지 않고 황제에게 바로 확답을 주었다.
“정말이냐? 효과가 어떠했느냐?”
황제는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핏발이 선 눈에서 깜짝 놀랄 만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젯밤, 황제도 잠들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양국 비무는 주나라의 체면과 관련된 문제였다. 황제는 원래 이 문제를 대단히 신경 쓰고 있었다. 또 코앞에 닥쳐서야 북요인이 음험한 술수를 쓸 거라는 걸 알게 되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양국 비무에서 지면, 조정 대신들은 육장봉과 황제를 끊임없이 질책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둘에게 떠밀 것이다. 심지어 삼 년 전에 안간힘을 다해 북요와 전쟁을 벌인 것도 잘못된 결정이라고 할 것이다.
그들이 앞서 사람과 재물을 쏟아부어 거둔 승리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이는 황제가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신은 북요인이 비약을 섭취한 뒤, 신체가 얼마나 강화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병사가 손 신의의 약을 복용한 뒤, 신과 스무 합이나 넘게 겨룰 수 있었습니다. 손 신의는 모두 열 명 분을 지었습니다. 폐하께서 사람을 찾아 시험해 보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