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나를 배웅해 주시오
육장봉은 최일을 만난 뒤, 사람을 거느리고 성을 나가 바로 명월산장으로 갔다.
양국 비무가 코앞이었다. 육장봉은 주나라 쪽의 책임자였다. 주나라가 늘 북요인에게 첩자를 붙여 감시하듯, 북요의 첩자도 육장봉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육장봉이 하루에 명월산장을 두 번이나 드나들었다. 이 광경을 본 북요의 첩자는 멸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기에, 육장봉은 여인이나 걱정하고 있다니. 이런 사람에게 지는 것은 북요의 수치가 아닌가.’
첩자는 이 소식을 전했다. 신호의 추한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피어올랐다. 겉으로 툭 튀어나온 눈에 사나운 빛이 번뜩였다.
“역시 얼굴이 반반한 녀석은 어딜 가나 그놈을 위해 힘을 쓸 여인이 있군.”
황태자 야율융진은 첩자가 보고한 내용을 들으며 오만하게 웃었다.
“일개 여자 상인일 뿐이다. 육장봉에게 돈 말고 더 줄 게 뭐가 있겠나? 비무가 코앞인데 육장봉은 아직도 그 계집을 걱정하기에 바쁘지. 이번 비무는 그놈들이 질 게 뻔해.”
신호는 그를 힐끗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야율융진이 모르게, 수하에게 육장봉을 잘 지켜보라고 분부했다.
육장봉은 마음속에 남녀 간의 사랑만으로 가득 채울 놈이 아니었다. 특히 그가 왔으니, 육장봉은 더욱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명월산장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고, 그의 직감이 알려 주고 있었다.
* * *
북요의 첩자는 육장봉이 명월산장에 들어선 뒤로, 뚫어지게 그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명월산장에는 호위가 몇 명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육장봉의 열두 친위대가 지키고 있었다. 또한 수횡천이라는 최고의 고수도 있었다.
그들은 도저히 명월산장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명월산장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밤이 되자, 모든 불이 꺼지고 아무 기척도 나지 않았다. 밖에 있는 북요의 첩자들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차단된 내부에는 불빛이 환했다. 사정을 모르는 정 장군 일가와 휴식이 필요한 노인을 빼고, 다른 사람은 모두 자지 못했다. 그중에는 월령안과 손불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손불사는 월령안의 요구대로, 그녀가 필요하다고 한 약을 제조해 주었다. 그래서 지금 약을 시험해 보는 중이었다. 미리 약물 양을 조절해 두어야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월령안은 천궁각의 공숙무와 함께, 지금 있는 병기를 어떻게 개조할지 연구하고 있었다.
육장봉은 병기 제작에 능한 조 선생과 유 선생을 친위대 속에 끼여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육일에게도 사사로이 많은 병기를 가져오게 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여기 온 뒤에도 공숙무와 어울리지는 못했다.
조 선생과 유 선생은 모두 병기 제작의 대가였다. 하지만 정통적인 노선을 걸었던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만든 병기도 모두 전장에서 쓸 수 있는 예리한 무기들이었다. 자연히 암기 종류는 잘 몰랐다. 적어도 그들이 아는 것들은 공숙무의 눈에 차지 않았다.
공숙무와 두 사람은 잠시 교류해 본 뒤, 상대방도 그와 마찬가지로 무기를 만드는 기술만 있을 뿐, 새롭고 특이한 발상이 없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는 바로 두 사람과 손을 잡고 병기를 제작할 생각을 포기했다. 그리고 육장봉에게 월령안을 찾아오게 했다.
“월령안이 기관 장치와 암기를 만들 줄 안다고?”
공숙무의 요구를 들은 육장봉은 꽤 놀랐다.
공숙무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월 낭자는 만들 줄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단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천궁각은 원래 병기는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만든 병기와 암기는 모두 월 낭자가 생각해 낸 겁니다. 말하자니 부끄럽습니다만, 우리가 교묘한 암기를 많이 만들긴 했어도, 전부 월 낭자의 요구대로 만든 겁니다. 월 낭자가 요구 사항을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정말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칠연발 쇠뇌를 이길 병기를 만들게. 나는 이미 요구를 제시했네만?”
육장봉이 물었다.
“안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두루뭉술합니다. 평소라면 그나마 괜찮겠지요. 제가 천천히 생각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그런데 그런 두루뭉술한 요구만 하시면, 제가 도무지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공숙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간의 주름이 모기도 눌러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깊어졌다.
그들처럼 손재주가 매우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원하는 것을 제시해 주면, 그걸 구현할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애매한 요구 하나만을 제시한다면, 당장 손을 대기는 힘들었다.
육장봉은 공숙무의 말을 듣고 바로 깨달았다. 그리고 육삼에게 월령안을 데려오라고 분부했다.
월령안은 금방 왔다. 그녀는 하늘색의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어 늠름하고 씩씩해 보였다. 강호 여인다운 기개도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 평소의 정중하고 단정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활기로 충만한 분위기였다.
그녀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호흡은 조금 어지러웠다. 옷에도 조금 주름이 진 걸 보니, 여기 오기 전에 크게 움직인 게 분명했다.
“대장군.”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포권하며 예를 올렸다. 그 동작은 깔끔하면서도 기운이 넘쳤다.
육장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매의 차갑고 거만한 기색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곧 무언가 떠오른 듯, 그의 표정이 또 차가워졌다.
“가서 일 보게.”
공숙무는 옆에 서서 육장봉이 이 말을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육장봉이 입을 열자마자, 공숙무는 월령안을 끌고 갔다.
“월 낭자, 어서 말해 보세요……. 만약 월 낭자라면, 자기보다 신체 능력이 강하고 화살도 연사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면 어떡할 거예요?”
“아까 얘기했잖아요? 그자가 일곱 개의 화살을 연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몸에 쇠뇌를 한 줄로 매달아서 일곱 개의 화살을 잇달아 쏘는 거예요. 그때는 누구의 손이 더 빠른지 보면 되겠죠.”
앞서 그녀는 공숙무와 이미 상의를 마쳤다. 공숙무도 그녀가 제시한 방향에 동의했었다.
월령안은 이미 끝난 일이라 생각했으나, 육삼이 그녀를 데리러 오자 깜짝 놀란 참이었다. 그녀는 그런 기색을 숨기고, 태연하게 공숙무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장군이 거느린 병사는 기병이에요. 활을 몸에 잔뜩 걸치면 말이 버틸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움직이겠어요? 게다가 활을 몸에 잔뜩 걸치면, 목표가 너무 눈에 띕니다. 당연히 북요인도 방어하지 않겠어요?
물론, 이것들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유일하게 해결 못 할 문제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 짧은 시간에는 도저히 그렇게 많은 활을 만들 수 없어요. 만약 칠연발 쇠뇌를 하나만 만든다면, 무기 방면에서는 그럭저럭 대등하겠죠. 하지만 다른 방면에서는 여전히 우세를 점하기 힘들 겁니다. 알겠어요?”
그들이 북요의 용사보다 뒤떨어지는 건 무기만이 아니었다. 신체적 능력과 군마도 그러했다.
월령안은 잠시 침묵하더니 공숙무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무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요.”
“어떤 무기라야 그놈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요?”
공숙무가 또 물었다.
“그건…….”
이 질문에는 월령안도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사색에 잠겼다.
월령안에게 암기와 기관 장치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암기를 이용하여 목숨을 지키는 데는 대단히 능숙했다. 그녀에게는 늘 신기하고 기발한 발상이 많았다. 그 발상은 공숙무에게 연구하는 방향을 제시해 주고는 했다.
월령안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공숙무에게 두 가지 생각을 건의했다.
공숙무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실현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조 선생, 유 선생과 함께 월령안이 제시한 발상대로, 각각 두 대의 무기를 만들었다.
날이 밝기 전, 공숙무는 두 대의 무기를 개조했다. 그리고 육장봉에게 건네주어 가서 비교해 보라고 했다.
한편, 하룻밤 동안의 시험을 거친 끝에 손불사의 약도 완성이 되었다.
그의 약을 복용하면, 평범한 병사도 한 시진 동안은 전투력을 최고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시진이 지나면, 곧 몸이 쑤시며 힘이 사라졌다. 심지어 서 있을 기력도 남지 않았다.
“한 시진이면 충분합니다.”
육장봉은 손불사가 만든 약에 대단히 만족했다.
그는 약을 복용한 사람의 전투력이 얼마나 강한지 직접 시험해 보았다.
원래 보통 병사는 육장봉의 공격 한 번에도 버티지 못했다. 그러나 약을 복용한 뒤, 무려 스무 번이나 받아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스무 초식이나 겨루다니. 이 정도라면 북요에서 가장 용맹한 장사와도 견줄 만한 힘이었다.
육장봉은 약과 공숙무가 개조한 병기를 받았다. 이제는 입궁해서 황제에게 보고해야 했다. 또한, 공숙무가 개조를 마친 병기도 시험해 보아야 했다.
만약 성능이 괜찮다면, 공부에 넘겨 서둘러 생산하라고 해야 했다. 삼차전 참가자들에게 새 무기 하나씩 돌아갈 만큼을 확보해야 했다.
육장봉은 약과 병기를 육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월령안 앞으로 걸어갔다.
“갑시다. 나를 배웅해 주시오.”
“대장군…….”
월령안은 밤을 꼬박 새우는 바람에 지금은 졸려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거절하는 말을 하기도 전에 육장봉이 말했다.
“밖에 북요의 첩자들이 있소. 그들에게 내가 명월산장에 온 진짜 목적을 모르게 하고 싶다면, 나를 대문까지 배웅해 주시오.”
월령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육장봉을 쳐다보았다.
‘지금 내 명성을 망가뜨리지 않고는 속이 시원하지 않다는 거야, 뭐야? 한 번, 또 한 번 우리 집에서 밤을 보내고, 또 다리가 풀릴 정도로 기진맥진한 사람에게 배웅하라니. 너무한 거 아냐? 나는 명성도, 염치도 없는 줄 아는 건가?’
“갑시다.”
육장봉은 손으로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입가의 웃음기를 감췄다. 일부러 그랬다는 건 월령안에게는 비밀이었다.
월령안은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지요.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내가 뭘 어쩌겠어?’
북요인은 원래부터 그녀를 눈엣가시로 보고 있었다. 공원 밖에서 서생들이 소란을 피운 것은 북요인의 작품이었다.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북요인은 야율제 하나가 아닌 게 분명했다.
육장봉이 명월산장에 온 진짜 목적을 북요인에게 들킨다면, 북요인은 그녀를 더욱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명월산장과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북요인에게 자기가 값싸게 군다는 오해를 심어 주어야만 했다. 육장봉에게 내쳐지고도 그와 재미를 보는 거로 여겨져야만 했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나는걸!’
아무래도 육장봉의 속임수에 걸려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월령안은 속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당장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육장봉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찬물로 세수를 해서 정신을 맑게 했다. 그런 다음에야 이 외딴 건물을 나가, 본채로 돌아가서 옅은 색깔 옷으로 갈아입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하녀에게 화장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냥 빨개진 눈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앞뜰로 나가 육장봉과 만났다.
육장봉도 은색 두루마기로 갈아입었다. 검은색 바탕에 붉은 무늬가 든 허리띠를 매자, 늘씬하면서도 힘 있는 허리가 도드라지고 다리도 길어 보였다.
그는 앞뜰에 서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새빨간 태양이 그의 등 뒤에 높이 걸려 있었다. 태양이 대지에 흩뿌린 첫 번째 햇빛이 마침 그의 몸에 떨어지고 있었다.
햇빛에 둘러싸인 육장봉은 마치 본인이 빛을 내뿜는 것처럼 보였다.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