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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12)화 (412/1,004)

412화 사치스러운 일상을 위해

관졸은 몸을 옴츠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장군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은 말할 자격도 없었다.

“대장군께 감사드려요.”

육장봉의 이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월령안은 전혀 사양하지 않았다.

그녀는 확실히 가기 싫었다. 대리시는 순천부와 비할 바가 못 됐다. 대리시 같은 곳에 일단 들어갔다가 무슨 고생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육장봉이 나서서 막아 주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물며 그녀는 육장봉이 맡긴 일을 처리해야 했다.

“음, 마음 편히 있으시오.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있으니까.”

월령안이 사양하지 않자, 육장봉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화청에서 나가기 전에, 관졸에게 혼절해 있는 동료를 데리고 가라고 일깨워 주기까지 했다.

관졸들은 불평할 엄두도 못 내고, 재빨리 그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눈치 빠르게 겉옷을 벗어 바닥의 핏자국을 말끔히 닦았다. 처음 왔을 때의 기고만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주 공손한 태도였다.

늑대 같은 관졸들이 순식간에 순한 양으로 변했다. 명월산장의 집사는 이 광경을 보며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월령안도 감탄하듯 한숨을 내쉬더니, 자조적인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돈이 아무리 많아도 권력보다 못하군.’

오늘 육장봉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가쇄와 수갑을 차고 성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녀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바로 정신을 차리고 곁채로 손불사를 찾으러 갔다.

육장봉이 그녀를 위해 나서 줬으니, 그녀도 육장봉이 맡긴 일을 잘해 내야 했다. 육장봉에게 그녀가 그래도 쓸 만하다는 걸 보여 주어야만 했다.

손불사는 말이 잘 통하는 노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궁의 귀중한 의서로 공세를 편 끝에, 월령안은 손불사의 대답을 얻어냈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신체의 기능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는 약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령안아, 명심해라. 이 세상에는 노력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없다. 바로 고수가 되고 싶다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내가 만들어 주는 이 약은 몸을 상하게 한다. 한 번 쓰면 적어도 석 달은 온몸이 쑤시고 힘이 없어,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다. 심하면 수명에도 영향이 가.”

“알겠어요. 제가 쓰는 사람에게 잘 말할게요.”

월령안은 손불사에게 약을 쓰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손불사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손불사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묻지 않는 것은 일부러 멍청한 척, 모르는 척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하면 손불사 본인의 규칙을 어기지 않은 셈이 되니, 규칙을 따질 필요가 없게 된다.

그녀는 줄곧 손불사가 자신을 편애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손불사의 정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그를 남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됐어, 넌 인제 그만 가 봐라. 내일 이 시간에 와서 약을 가져가면 된다.”

또 한 번 월령안 때문에 규칙을 깨뜨렸다. 손불사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그는 괜히 눈을 부릅뜨고 성을 냈다.

월령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송 어의의 손자, 송언에게 손불사에게 잘 배우라고 당부했다. 그가 빨리 손불사의 재주를 배워야, 그녀가 거액의 진료비를 들이지 않아도 되고, 헛된 돈을 쓸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월령안은 농담이었지만, 순진한 송언은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엄숙한 얼굴로 월령안에게 읍했다.

“월 누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손 신의한테서 재주를 배워서 누님께서 쓸데없이 돈을 쓰시지 않게 할게요.”

둘은 손불사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불사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월령안을 쫓아냈다. 그래도 마음이 물러 송언까지 내쫓지는 못했다.

월령안은 쫓겨난 뒤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는 웃음기가 드리웠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명월산장에 있고 싶었다. 노인과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손불사와 입씨름도 하고. 또 정 부인을 찾아 함께 차도 마시고, 수다를 떨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더없이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그녀에게는 사치였다. 아주 가끔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러운 일상이었다.

그녀는 그 ‘사치스러운 일상’을 위해서라면 일생을 거는 한이 있어도 싸울 수 있었다.

월령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공숙무를 찾아갔다.

그녀는 가는 길 내내, 어떻게 공숙무를 설득해야 할지, 만약 공숙무가 거절한다면 또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뜻밖에도 공숙무는 그가 개조한 무기를 북요와의 비무에 쓸 거라는 말을 듣자,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승낙했다.

월령안은 멍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걱정이 안 되세요? 조정에 천궁각의 재주를 드러내는 거예요. 나중에 천궁각에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어쩌죠?”

공숙무는 환하게 웃으면서 선뜻 말했다.

“나라가 없는데 어떻게 집이 있겠습니까? 북요라는 공공의 적 앞에서는 천궁각도 없고, 강호와 조정도 없습니다. 단지 주나라 사람만 있을 뿐이죠. 목숨을 건다고 해도, 천궁각 전체를 희생한다 해도, 저는 각주와 소각주께서 제 뜻을 응원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월령안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웃음을 짓고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공숙무에게 큰절을 올렸다.

“제가 편협했네요. 선생께서는 큰 인물이세요.”

공숙무와 비교하자, 그녀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월령안이 손불사와 공숙무를 설득하고 있을 때, 육장봉도 몇몇 관졸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육장봉 쪽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한 서생이 공원(貢院) 입구에 머리를 박고 자결했던 것이다.

육장봉이 관졸을 데리고 왔을 때는 그 서생의 시체를 금방 내간 뒤였다. 땅의 핏자국도 채 지우지 못했다.

사람이 죽자, 항의하던 서생들은 더욱 흥분했다. 하나같이 눈이 벌게져서 목청을 돋웠다.

악덕 상인은 목숨을 내놓으라는 둥, 조정 관리가 직무를 내버려 둔다는 둥, 부유한 상인과 관리가 결탁했다는 둥, 관리들은 상인에게 돈을 받고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겨도 눈감아 주고 함께 나쁜 짓을 한다는 둥 소리를 질렀다.

공원 입구에서 항의하는 서생은 무려 백 명이나 되었다. 흔히 서생들은 우유부단해서 십 년이 걸려도 반란을 일으킬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날카로웠고, 한마음 한뜻으로 백성을 위해 외치는 자세를 보였다.

그들의 말은 사람의 심금을 크게 울렸다.

그들은 조정의 잘못을 몇 마디 나열했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하나 사실은 허무맹랑한 도리 몇 마디를 읊었다. 거기에 나라와 백성을, 천하의 대의를 위한다는 말을 몇 마디 더하자, 그들이 옳은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백성과 공감대를 형성했다.

대리시 시경 안과(顔果), 순천부윤 유칙, 국자감(國子監 – 옛날 최고의 교육 기관)의 좨주(祭酒 – 국자감의 관리)들은 이성을 잃은 서생들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격분한 서생들은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크게 욕을 했다.

“당신들도 그 월씨와 한통속이오. 끼리끼리라고.”

“먼젓번에 누가 월씨가 조정 관리에게 뇌물을 먹여 매수했다고 고발하지 않았소? 관리 중에는 뇌물 수수를 인정한 사람도 있다고 했소. 그런데도 월씨는 죄가 없고, 당신들은 결백하다고 할 수 있겠소? 어엿한 조정 관리가 어찌 일개 상인의 하인 노릇을 한단 말이오. 조정이 이토록 부패했는데, 우리 주나라에 구원의 여지가 있겠소?”

“유 대인은 공평무사하다고 소문나지 않았소? 내가 보기에는 그 공평무사함도 사람을 가리는 것 같소이다. 월씨가 잘못을 몇 번이나 저질렀는데도, 대인께서는 매번 풀어주셨소. 유 대인의 아들이 얼마 전에 수백 냥을 들여 목각 공예품을 잔뜩 샀다고 들었소. 그런데 유 대인의 한 달 녹봉이 얼마나 되는 거요? 유 대인의 아드님이 과연 어디에서 돈이 나서 물 쓰듯 쓰는 거요?”

“오늘 월씨를 처형하는 걸 보지 않고는, 절대 떠나지 않겠다!”

“바른길은 사람 마음에 달린 것.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오.”

“관리가 상인에게 매수되고, 조정은 부패하여 백성을 위하지 않는구나. 우리 선비들은 목숨으로 만민을 위해 간청하오.”

“천지간에는 바른 기운이 있어야 하는 법. 우리 선비들은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천하 만민을 위해 공부하는 거요. 한데 월씨가 어렵고 가난한 백성에게서 싼값으로 물건을 사다가 또 비싼 값으로 어려운 백성들에게 되팔고 있소. 그 여인이 모은 돈은 전부 백성의 손에서 갈취한 것이오. 이 화근을 없애지 않고, 그 재산을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눠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어도 떠나지 않을 것이오.”

“그래! 떠나지 않겠다!”

“맞는 말이오!”

“조정이 나서지 않고, 관리가 앞잡이 노릇을 하니, 우리 백성들만 힘들지.”

“그 월씨는 돈을 흩뿌리면서 놀고 있지 않소. 그 돈이 어디에서 났겠소? 모두 우리가 피땀 흘려 번 돈이 아닌가? 그 여인이 우리의 재산을 갈취했어. 조정은 그 재산을 우리에게 나눠 줘야 해.”

모여든 백성들은 서생들이 처음에 도리만 이야기했을 때는 그들의 말이 맞다고만 느꼈다. 그런데 재산을 나눠 줘야 한다는 말 한마디가 나오자, 떡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망상하며 좋다고 갈채를 보냈다.

백성들이 갈채를 보내자, 안 그래도 흥분했던 서생들은 더욱 흥분했다. 그들은 서둘러 일어나 너 한마디, 나 한마디 하면서 바른 기운을 내뿜고, 격양되어 천하의 일을 근심했다.

유칙은 이 서생들이 지나치게 흥분해서 일을 크게 만들까 봐 걱정되었다. 그가 이들을 저지하고자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헛바람이 들어 주제 파악을 못 하는 서생들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너 유칙은 소인배다! 군주의 녹봉을 먹으면서도 군주의 근심을 나누지 않았다. 또한 기꺼이 상인의 앞잡이가 되었으니, 우리 선비들과는 한데 어울릴 수 없다.”

말을 마친 그는 유 대인에게 침을 뱉었다. 그가 침을 뱉자, 구경하던 백성들도 유 대인에게 분분히 침을 뱉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유칙을 욕하기 시작했다.

유칙은 일개 선비였다. 그가 언제 이런 수모를 당해 보았겠는가. 그는 항상 공정하게 일했다. 위로는 군주에게 떳떳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부끄러운 것이 없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다스림을 받던 백성들이 욕을 퍼붓고 침을 뱉었다. 유칙은 너무 화가 나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유칙이 쓰러지자, 서생들이 더욱 험하게 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칙이 켕기는 게 있으니 쓰러진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소인배로, 벼슬을 할 자격이 없다며 욕했다.

유칙의 훌륭한 명성이 이들에게 완전히 짓밟혔다. 이 광경을 본 국자감의 좨주들은 한순간 앞으로 감히 나서지 못했다. 이들에게 욕을 먹어 자기 명성까지 더럽혀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육장봉은 여기 도착한 뒤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기 신분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옆에 서서 차가운 눈으로 이들을 바라보며, 가장 사납게 난리를 치는 몇몇 사람을 주목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김새를 묵묵히 기억해 두었다.

유칙이 쓰러지자, 대리시 시경 안과가 나섰다. 그는 소란을 피우는 서생들에게 읍했다. 그리고 저자세로 반드시 월령안을 잡아들이고 엄벌하겠다고 다짐했다.

육장봉은 그제야 사람들 사이에서 앞으로 나왔다.

“대리시가 언제부터 말 한마디로 사람의 생사를 정하는 염왕궁(閻王宮)이 되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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