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410)화 (410/1,004)

410화 내가 남이라고?

월령안은 피하지 않았다.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깊이 숨긴 적 없어요. 단지 제 사적인 일이라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남이라고?”

육장봉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그게 아니면요?”

‘자기가 남이 아니면 뭐야? 육장봉은 정말 자기가 나랑 무슨 사이라도 되는 줄 아나?’

“내가 남이면, 남이 아닌 사람은 누구란 말이오?”

‘수횡천인가?’

월령안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수횡천을 잠한성 곁으로 보내 버릴 것이다. 수횡천이 평생 태양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주리라.

“대장군, 남의 반대말은 가족이에요. 제 가족은 지금 영감님밖에 없어요. 나중에는 제 미래의 남편도 포함될지 모르지만요.”

월령안의 눈은 명랑했다. 소여방의 일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육장봉은 월령안을 잘 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정말 개의치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야 자신이 월령안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적어도 월령안이 그에 대해 아는 것만큼은 못했다.

십 년과 몇 달의 차이는 역시 컸다.

육장봉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말투도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

“당신과 소씨 가문의 원한은 당신 말고, 그 어르신만 아시는 거요? 그분에겐 알려 드렸소?”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님은 아세요. 하지만 제가 말한 건 아니에요.”

그때 그녀를 구해 준 사람이 바로 노인이었다.

노인이 없었더라면 죽지는 않더라도, 어느 더러운 곳에 가게 됐을지 알 수 없었다. 오늘 같은 나날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노인은 그녀에게 새 삶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노인의 신원이 불분명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의 신분이 아주 번거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왜냐하면 노인은 그녀의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가족에게는 모든 것을 꼬치꼬치 따질 필요가 없었다. 가끔은 두루뭉술해도 괜찮았다.

“곧 나도 알게 될 거요.”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는 아무 답도 얻지 못할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또 소씨 가문을 조심하라고 일깨우지도 않았다.

소여방이 죽었다. 황제의 성격으로는 소씨 가문을 너그럽게 대할 것이 뻔했다. 이건 그가 말할 필요도 없이, 월령안도 잘 알고 있었다.

육장봉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화제를 돌려 월령안을 찾아온 다른 용건을 말했다.

“북요는 이번 비무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대결 중에 칠연발 쇠뇌를 사용할 거요. 그것 말고도 비약으로 북요 용사들을 단련해, 단시간 동안은 칼도 꿰뚫지 못하는 몸으로 만든다고 하오. 손 신의에게 이와 비슷한 약이 있소?”

“전 몰라요. 이 일은 장군께서 직접 상의해 보셔야겠네요.”

월령안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손불사는 그렇게 쉽게 거래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양국 비무에서 북요가 패하도록 힘을 보탤 수도 있었다. 단, 자기 능력을 벗어난 일을 할 수는 없었다.

“황궁에 소장된 의학 고서의 수사본(手抄本 – 손으로 베껴 쓴 책)이 있소.”

손불사는 조정 사람에게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육장봉에게도 솔직하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양국 비무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손불사와 실랑이할 시간이 없었다. 월령안을 통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쨌든 그 의서의 수사본은 월령안에게 줄 생각이었다.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인다면 황제의 입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손불사에게 주는 거잖아요. 그럼 저는요?”

‘육장봉도 거래를 너무 잘하는데. 나 같은 상인보다 더 교활해.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 아무 이득도 주지 않으려 하다니. 어딜 날로 먹으려고?’

“뭘 원하오?”

육장봉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역시 시시콜콜 빈틈이 없이 따지며, 조금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래야 그가 아는 월령안다웠다.

“생각 좀 해 보고요…….”

월령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월 삼낭은 지금 폐하의 손에 있지요. 제가 월 삼낭의 목숨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대장군이 처리하기는 힘들 거예요. 이렇게 하죠. 저희 집에 불이 났잖아요? 대장군께서 순천부윤에 압력 좀 넣어 주세요. 하루빨리 방화범을 찾아내게요.

저희 집이 겉보기에는 평범해도, 자재나 장식품은 아주 좋은 것들로만 썼어요. 특히 대장군께서 보내 주신 팔십여 상자가 넘는 예물은 가치가 만만치 않죠. 순천부윤이 범인을 잡아 주셔야 저도 배상을 받죠.”

소여방이 죽었다. 이제 소씨 가문에도 숨을 돌릴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월령안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소 승상은 예전에 월씨 가문의 돈을 삼킨 만큼, 지금 곱절로 토해내야 할 것이다. 월씨 가문이 준 사업을 잃은 소씨 가문에서 무슨 돈으로 배상할지 두고 볼 셈이었다.

월령안은 이득을 얻자 자랑스러워하며 새침하게 굴었다. 육장봉은 그 모습을 보자, 올라간 입꼬리를 겨우 억누르며 엄숙하게 물었다.

“정말 누군가가 월씨 저택에 불을 지른 게 맞소? 유 대인은 그렇게 쉽게 속일 수는 없을 거요.”

만약 그가 유칙에게 압력을 넣었는데 순천부에서 알아낸 범인이 월령안이라고 한다면, 일이 참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그럼요. 만약 순천부윤이 방화범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주나라 관아의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죠.”

‘육장봉은 무슨 소리야? 설마 내가 일부러 불이라도 질렀다고 생각하나?’

물론, 그녀도 불을 지르려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모든 일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자기가 귀찮아지는 일을 하겠는가. 그녀는 기껏해야 불을 지르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 주어, 그가 움직이기 편하게 해 주었을 뿐이었다.

“알겠소. 내가 순천부에 압력을 넣지. 보름 안에 그들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면 내가 직접 조사하겠소.”

월령안은 때도 참 잘 골라서 사고를 쳤다. 양국 비무가 당장이었다. 지금 다른 일을 신경 쓸 정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름이라…….”

월령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청주로 떠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끝낼 수 있겠네요. 보름으로 하죠.”

월령안은 무심결에 한 말이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 말에서 다른 뜻을 예민하게 알아챘다.

그의 온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싸늘해지더니 순식간에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는 범인을 심문하는 자세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조계안이 얼마 전에 중요한 단서를 얻었는데, 당신과 관련이 있는 거였소.”

육장봉은 확인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무슨 중요한 단서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무슨 중요한 단서인데요?”

월령안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맑고 또렷한 눈에는 의아함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긴장할 때면 두 손을 꽉 움켜쥐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반응해서 팔뚝을 움직인 순간이 너무 빨랐다. 손가락의 관절도 살짝만 구부러졌다.

그 동작은 아주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월령안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챌 수 없었다.

월령안의 작은 몸짓을 보고, 육장봉은 그만 웃고 말았다.

“잘했소. 누가 물어보거든 명심하시오. 무조건 그렇게 대답하시오. 표정과 행동이 좀 더 자연스러우면 더 좋겠소.”

“대장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린애한테 나쁜 짓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월령안은 뾰로통해서 언짢은 티를 냈다. 겉으로는 당당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당황했다.

육장봉, 이 나쁜 남자는 너무 똑똑하고 날카로웠다. 순간적으로 말실수를 했을 뿐인데, 그는 바로 허점을 잡고 그녀가 몰래 한 일을 알아챘다.

이 남자가 그녀의 철천지원수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어린애?”

육장봉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위아래로 월령안을 훑어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뭘 그렇게 웃는 거예요?”

월령안은 경계하듯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당신이 저보다 일곱 살 많잖아요. 당신이 열다섯, 혼인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저는 여덟 살이었어요. 제가 어린애가 아니면 뭔데요?”

“그렇지, 맞소. 당신은 아직 어린 여자애지.”

육장봉은 가볍게 쥔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낮은 소리로 웃었다.

“이…… 심술쟁이 같으니라고!”

월령안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독이 바짝 올라 육장봉에게 눈을 부릅떠 보였다. 씩씩거리며 등을 곧게 펴더니, 바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장군께서는 아직도 용건이 남았는지요? 없으시다면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육장봉은 다시 손으로 입을 막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웃음을 눌렀다. 그리고 농담하듯 말했다.

“손님을 배웅하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요. 어린애니까 몰라도 괜찮소. 내가 어른이니까 내가 가르쳐 주지.”

월령안이 냉정하게 굴며 그를 멀리하는 것보다, 지금처럼 생기발랄하게 그에게 심술도 부리고, 화도 내는 것이 훨씬 좋았다.

“그럼 정말 대장군께 감사를 드려야겠네요. 대장군, 배웅해 드릴까요?”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눈을 부라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육장봉의 수작은 너무 교묘하잖아. 여기서 더 엮여 봤자 내가 손해 볼 게 뻔해. 그냥 밖으로 배웅하는 것뿐이야. 까짓거, 배웅해 주면 될 거 아냐. 내가 졌다고 인정하면 되잖아.’

“그만 가지.”

육장봉은 더 머무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틀 뒤면 바로 비무가 열린다. 서둘러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도저히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대장군, 가시지요.”

월령안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손을 들어 육장봉에게 먼저 가라는 의사를 나타냈다.

육장봉이 두어 걸음 가자, 그제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의 뒤를 따르며 손님을 배웅하는 자세를 보였다.

육장봉이 억눌렀던 웃음기가 다시 눈가로 떠올렸다. 차가워 보이던 이목구비가 부드러워졌다.

두 사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준수하고 훤칠했다. 무심결에 옆의 여인을 바라보는 눈매에는 총애와 부드러움이 가득했다.

여자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생기 있는 눈은 맑았다. 가끔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볼 때면, 오밀조밀한 얼굴에 새침한 표정이 드러났다.

두 사람의 몸에 햇빛이 내리쬐었다. 황금빛이 그들의 주변을 에워쌌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한 쌍의 선남선녀가 숲에서 노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는 쪽에서도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감히 방해할 수도 없는 광경이었다.

명월산장의 집사가 다급히 걸어오다가 육장봉과 함께 걷는 월령안을 보았다.

그는 월령안에게 보고할 일이 있었지만, 감히 앞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살며시 발걸음을 옮겨 자기 모습을 묵묵히 감추었다.

자신이 이 아름다운 광경을 깨뜨린다면, 죄인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쉽게도 이 길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육장봉과 월령안은 곧 집사 앞까지 다가왔다. 집사는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왔다.

“대장군, 아가씨.”

집사는 억지로 나가 육장봉과 월령안에게 예를 올렸다.

그는 모습을 드러낸 순간,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감히 고개를 들 수도, 확인할 수도 없었다.

“중요한 손님이 계시는 게 안 보이는가? 무슨 일이 있거든 나중에 말하게.”

월령안은 육장봉이 언짢아하는 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래서 손을 들어 올려 집사에게 물러가라는 뜻을 보였다.

집사는 속으로 뉘우치면서 물러나려고 했다. 그때, 육장봉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게 들렸다.

“나는 남이 아니니,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 보아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