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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09)화 (409/1,004)

409화 지금 나를 배려한 건가?

월령안은 화청에 들어서자, 오른쪽에 앉아 있는 수횡천을 보았다. 기운차 보이는 그의 모습에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비로소 놓였다.

그녀는 수횡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금은 지난 일을 이야기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육장봉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그에게 예를 올렸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몇 배는 달콤했다.

“대장군을 오래 기다리시게 했네요.”

월령안은 수횡천을 힐끗 보고는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고작 삼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육장봉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을 지었다.

만약 육장봉이 월령안을 계속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월령안이 나타난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그녀는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부랴부랴 나타났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는 오직 수횡천 뿐이었다.

육장봉은 이 광경을 보자,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월령안이 그에게 무시당했을 때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조금 쓰라리고, 조금 아팠다. 그보다도 무력감과 실망감이 더욱 컸다.

이런 기분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설령 그의 마음이 늘 굳세다고 하더라도,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하여 월령안이 거리를 두며 예를 올리는 것을 보자, 더욱 언짢아졌다. 월령안은 그를 완전한 타인으로 대했다.

‘이 양심도 없는 아가씨 같으니라고. 어젯밤 술에 취했을 때, 누가 밤새 함께 있어 줬는데? 순식간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다니.’

육장봉은 속으로 더없이 서글퍼졌다. 하지만 월령안에게 뭐라고 하려니 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수횡천을 힐끗 보았다. 그러더니 싫은 기색을 슬그머니 거둔 다음, 오만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할 만한 곳이 있소? 제삼자는 없었으면 좋겠군.”

수횡천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싫은 기색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잖아.’

월령안은 수횡천에 앞서 입을 열었다.

“수 오라버니, 금방 돌아오셨으니 많이 힘드실 거예요. 먼저 가셔서 좀 쉬고 계실래요? 전 대장군과 할 이야기가 좀 있어요.”

수횡천은 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령안이가 이렇게 말하는데 내가 할 말이 뭐가 있겠어?’

“그러지.”

수횡천은 육장봉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 역시 육장봉을 싫어하는 기색을 전혀 숨기지 않고, 오만하게 얼굴을 돌렸다.

‘육장봉은 나랑 말하기 싫은 모양인데, 나라고 뭐 자기랑 말 섞고 싶은 줄 아나? 령안이만 없었다면 나도 가만히 안 있었어.’

월령안은 하인을 불러 수횡천이 데려가 쉴 수 있게 했다. 그다음 고개를 돌려 육장봉에게 매우 예의 바른 미소를 보여주었다.

“대장군, 장소를 바꿀까요?”

“배나무 숲으로 가지.”

월령안은 배나무 숲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하지만 육장봉은 거절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벌떡 일어서서 긴 다리로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곁을 지날 때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나는 지금 바로 가고 싶은데, 안 갈 거요?”

“갈 거예요. 가요.”

월령안은 속으로는 욕을 했지만, 겉으로는 애써 담담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육장봉이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확신했다. 특히 ‘지금 바로 가고 싶은데’라는 이 말은, 분명 어제 그녀가 취했을 때 했던 ‘지금 바로 가고 싶단 말이에요’를 고스란히 옮긴 말이었다.

‘옹졸한 남자 같으니라고.’

월령안은 육장봉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육장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에게 일그러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었을 뿐, 늘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정중하고 예의 바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육장봉은 감각이 대단히 예리했다. 이러다 그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너무 창피할 것 같았다.

둘은 나란히 걸어 배나무 숲에 도착했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육장봉은 월령안이 다가오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배꽃을 갖고 싶소? 어느 것을 갖고 싶소? 오늘은 꼭 제대로 따 주겠소.”

“전…….”

월령안은 말을 뱉으려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못 알아듣겠는데요.”

“다 알아들은 거 알고 있소.”

월령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그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육장봉의 말을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침착하게 물었다.

“대장군께서 수 오라버니를 데리고 온 거를 보니, 수 오라버니가 이젠 무사하다는 뜻인가요?”

“수횡천이 무사할지 어떨지는 당신에게 달렸소.”

월령안이 두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보자, 육장봉의 눈에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

월령안이 보여 준 일련의 행동에는 허술한 데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줄곧 그녀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미세한 몸짓이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그를 속일 수는 없었다.

“대장군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나요?”

월령안은 아주 침착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원하는 게 있으면 먼저 베풀 줄 알아야 한다고 배웠다. 베푸는 것과 얻는 것이 꼭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단 베풀어야만 보답을 받는 법이다.

육장봉도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이틀 안에 천궁각에 칠연발 쇠뇌보다 더 뛰어난 병기를 만들라고 하시오. 이게 폐하께서 수횡천을 풀어 주는 조건이오.”

월령안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두 가지 이유로 거절하고 싶군요. 천궁각은 병기를 취급하지 않아요. 이게 첫 번째 이유예요. 두 번째는, 폐하께서 수 오라버니를 얼마나 더 가두어 둘 수 있을까요? 동산파의 사람들이 왔어요. 다른 사람들도 곧 오겠죠. 그랬다가는 양국 비무 기간에 사달이 날지도 모르는데요?”

황제가 지금 시기에 수횡천을 풀어 주었다. 그녀에게는 실로 기쁜 일이었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월씨 저택에 불을 질러 강호인들이 나타난 흔적을 만들었다. 이런 시기에 강호인들이 소란을 피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황제에게 알리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데. 우리 집에 불이 났는데, 왜 하루가 지나도록 관아에서 찾아오지 않았지? 이걸 내가 따져 묻기도 그렇고.’

월씨 가문의 하인들은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녀도 성 밖에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화재 소식을 몰라야 했다.

혹시 성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육장봉이 입을 열었다.

“북요와의 비무에 관련된 일이오. 북요인이 칠연발 쇠뇌를 만들어 냈소. 이보다 더 좋은 무기가 없다면 우리는 비무에서 지게 될 거요.”

육장봉은 월령안이 얼마나 북요인을 증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월령안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천궁각의 죄를 물으실 건가요? 또 제가 이 일에 참여하면, 절 놔주실 건가요?”

“천궁각은 잠한성을 구하는 작전에 참여했소. 그런데도 그자들이 무사히 몸을 뺄 수 있을 거라고 여겼소? 하지만 천궁각이 이번에 공을 세운다면, 나도 그들의 공로를 인정해 달라고 간청하겠소.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그들은 조정과 강호 양쪽에 발을 걸치게 되겠지. 조정에서는 그들과 공부가 협력하기를 원하오. 만약 그들이 싫다고 하면, 난 양국 비무가 끝나는 대로 병사를 거느리고 천궁각을 평정할 거요.”

육장봉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 모습만 봐서는 전혀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월령안은 그의 말에서 음산한 살기를 느꼈다. 속으로 한숨을 쉬고 말했다.

“천궁각의 일은 제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무 선생과 이야기해 볼게요.”

“시간은 이틀뿐이오. 내일 날이 저물기 전에 완성품을 보아야겠소.”

육장봉은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말했다. 그래도 월령안이 걱정할까 봐,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은 걱정할 게 없소. 내가 당신의 공로를 수횡천에게 돌렸으니까.”

그러니 수횡천은 월령안에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 것이다.

월령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장봉의 뜻을 알아챘다. 마음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육장봉이 지금 나를 배려한 건가?’

월령안은 그가 자신을 배려해 벌인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열자,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물어봐서 뭐 하겠어? 나는 육장봉에게서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지?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아.’

월령안은 마음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담담하게 육장봉에게 읍했다. 그러나 감사의 인사를 꺼내기도 전에, 육장봉의 말이 들렸다.

“소여방이 죽었소.”

“뭐라고요?”

월령안은 읍을 하다 말고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소여방이 죽었다고요?”

“어젯밤 역참에서 죽었소.”

월령안이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자, 육장봉은 뒷짐을 쥐고 꼭 쥐었던 손을 슬그머니 풀었다. 마음에도 없는 감사 인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죽다니. 아주 곱게 죽었네.”

월령안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눈에는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렇게 소여방이 밉소? 당신이 소씨 가문과 원수를 진 것은 그자 때문이었나?”

육장봉은 직감했다. 월령안이 소여방에게 맺힌 원한은 소씨 가문에 맺힌 원한보다 훨씬 깊었다.

“네.”

월령안은 과감하게 인정했다. 그녀의 눈에 서린 한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소여방이 무슨 짓을 했소?”

육장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람이 죽었으니 빚도 사라졌네요.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죠.”

월령안은 입꼬리를 올려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그녀는 육장봉에게 다시 한번 읍했다. 그 예의 바른 자세에서는 소원함이 느껴졌다.

“대장군께서 다른 용건이 있으신지요?”

용건이 없으면 가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지금 육장봉과 이야기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원수가 이렇게 죽어 버렸는데, 왜 내 기분은 좋아지지 않는 거지?’

그러나 육장봉은 그리 쉽게 내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월령안을 압박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직접 알아봐야겠소?”

안타깝게도 월령안은 육장봉의 협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웃으며 비꼬았다.

“대장군의 부하가 제 인생의 하루하루를 거의 샅샅이 뒤지다시피 했어요. 그거로도 아직 부족하세요?”

월령안은 육장봉이 조사하는 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때 그 사건은 커다란 추문이었다. 소씨 가문과 연관된 사람들은 진작 그 일을 깨끗하게 지워 버렸다. 그와 관련된 사람 중 죽어야 할 사람은 모두 죽었다. 이젠 당사자들만 알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포함한 당사자 중 그 누구도 그 일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는 건가?”

그동안 월령안과 여러 번 만나며, 육장봉은 자신이 그녀를 잘 아는 편이라고 자부했다.

월령안이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는 걸 보면, 믿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요. 전 대장군께서 조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대장군께서 알아내시기를 더욱 바라고요.”

육장봉이 그럴 능력이 있다면, 정말 그때의 일을 파헤칠 것이다. 하지만 그가 파헤친들 아무 소용없었다.

그녀의 복수는 전부 끝났다. 육장봉이 그때의 일을 다시 파헤친다고 하더라도, 이미 딱지가 앉은 그녀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꼴일 뿐, 전혀 소용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깊이 숨기는 일이라니 더욱 궁금해지는군.”

육장봉은 강렬한 눈빛으로 월령안을 직시했다.

“그대에 관한 건 그 무엇도 놓치지 않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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