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월령안을 걱정시키고 싶나?
연이은 전란에 주나라의 국력이 감소했다. 부황은 서둘러 황위를 계승했고, 그가 받은 것은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는 주나라였다.
외환(外患)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문제는 북요 뿐만이 아니었다. 금나라와 서하(西夏)도 주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주나라가 쇠약한 시기를 틈타, 큰 이득을 삼키려 했다.
내우(內憂)로 말할 것 같으면, 연이은 전쟁으로 백성들은 살 곳을 찾아 떠돌아다녔다. 사방에 황무지가 가득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하늘도 무심하여 재해가 잇달았다. 식량이 부족하여 주나라 백성들은 먹지도 못하는데, 북요에는 막대한 식량을 배상해야 했다.
그 무렵의 주나라는 어둡고 빛을 볼 수 없는 회색 세상이었다.
선황이 재위했던 그 몇 년은 정말 어려웠다. 주나라의 정세는 늘 요동쳤으며, 종묘사직도 불안정했다. 그의 부황이 심혈을 기울여서야 겨우 주나라의 국토와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부황의 노고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단지 부황이 해마다 대량의 재물을 북요에 바치는 것만 보았다.
돈을 내서 평화를 사는 것을 보고, 나약하고 무능하며 어리석은 군주라고 욕했다. 또 북요에 꼬리를 흔들어 동정을 구걸하는 모습이, 한 나라의 군주로서의 기품이 전혀 없다며 욕했다.
그래서 기세등등한 북요 앞에서는 자꾸 뒷걸음질 치게 된 것이다. 이건 물론 기개도 없는 나약한 태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기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싸운다면, 심지어 온 나라를 이끌고 싸운다면, 그게 더 아둔한 짓이었다.
그의 부황이 쓴 인내라는 수법은 많은 사람 눈에는 기개가 없는 행위로 보였다. 그러나 주나라에는 안정과 재정비할 기회를 주었다. 주나라의 백성들이 다시 살아나게 했다.
그 시기의 주나라에 부족한 것은 기개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주나라는 전란과 자연재해를 겪고, 백성들은 모진 고초를 당했다. 장수들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할 기개가 있다 하더라도, 나라가 더는 버티지 못했다.
설령 버틸 수 있다 해도, 질 게 분명한 전쟁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십수년의 시간 동안 몰래 힘을 키우는 게 더욱 나았다.
그리고 이 십수 년 동안 이룩한 발전이 있었기에 지금의 주나라가, 오늘의 승리가 있었다.
다만 습관적인 양보와 지금의 안일한 생활은 그 노장들의 기개를 앗아가 버렸다. 심지어 황제인 그조차도 어떤 면에서는 자신감이 부족해졌다.
황제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지금의 주나라는 그의 부황이 재위할 무렵의 주나라가 아니었다. 주나라는 그때보다 훨씬 강대해졌다. 이제는 그도 적응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북요인들도 적응하게 해야 했다.
생각과 관념이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 법이다.
주나라의 강대함은 입으로만 말해서는 소용이 없었다.
주나라는 강대하다고, 반드시 북요를 이긴다고, 이제 더는 북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로만 천 마디, 만 마디 떠들어 봐도 소용없었다. 전장에서 실력으로 말하고 비무에서 승리를 한 번 거두는 게 훨씬 나았다.
조야의 생각을 바꾸려면, 신념을 굳건히 다지게 하려면 주나라가 비무에서 압도적인 우세로 이겨야 한다.
육장봉은 황제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황제의 승낙을 받자, 작별을 고하고 황궁을 나서려 했다.
바로 그때, 이반반이 다급히 걸어 들어왔다.
“폐하, 소 승상께서 황궁 밖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계십니다.”
“소 승상이? 상처가 아직 낫지도 않았을 텐데? 왜 왔다더냐?”
황제는 그가 무슨 죄를 사죄하러 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소함연의 일 말고는, 소 승상이 황궁 밖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할 만한 일도 없었다.
“하인에게 실려 왔습니다.”
이반반은 슬그머니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황제가 귀찮아하면서도 화를 내지는 않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소씨 가문의 대공자 소여방이 어젯밤 역참(驛站)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답니다.”
소여방은 혼인한 이튿날에 소 승상의 말대로 처자식을 데리고 귀향했다. 그런데 어젯밤, 역참에 머무르다가 한밤중에 죽었다.
지금 소 승상이 황궁 밖에서 사죄하는 걸 보면, 그도 아마 소식을 받았으리라.
“소여방이 죽었다고? 사고냐, 아니면 자결이냐?”
황제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실족하여 넘어지다가 문턱에 머리를 찧었답니다.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단, 이 사고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황제가 소여방더러 죽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 소여방은 죽을 수 없었다. 정말 죽고 싶다면, 자살해서도 안 되었다. 사고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한테 살해되었을 가능성은?’
황제와 이반반 모두 이 경우는 고려하지 않았다.
소여방은 이미 폐인이 되었다. 미래도, 전망도 없을 게 뻔했다. 죽는 것보다 더욱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데, 누가 힘들여 굳이 죽였을까?
설령 그의 원수라 할지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소여방이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걸 지켜보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황제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짐도 죽은 자와는 따질 필요가 없겠지. 소 승상도 조정에서 오랫동안 고생했는데, 늘그막에 자식을 먼저 떠나보냈구나. 짐도 오랜 신하를 냉대할 수는 없다. 소 승상더러 들라 해라.”
“네, 전하.”
이반반은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마음속으로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
‘소여방이 죽었으니, 그 여동생과 소씨 가문도 궁지에서 벗어나게 되었구나. 소씨 집안도 명이 참 길어.’
“폐하. 신은 수횡천을 데리고 천궁각의 사람을 만나러 그만 가 보겠습니다.”
육장봉은 시선을 내리깔아 눈에 담긴 생각을 숨겼다. 그리고 침착하고 덤덤하게 말했다.
육장봉의 말을 듣자, 황제는 문득 마음에 걸리는 일이 떠올랐다. 약간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장봉아, 소 낭자와 네 사촌 아우의 혼사는…….”
“신의 사촌 아우는 이미 분가했습니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요.”
만약 예전이었다면 육장봉이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 해도, 육씨 가문 사람들과 아무리 소원한 관계라고 해도, 육비우를 위해 이번 혼사를 거절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육비우가 죽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하라. 짐이 나중에 사람을 시켜 육비우에게 물어보도록 하겠다.”
육장봉의 사촌 아우라서, 황제도 육비우의 체면을 어느 정도 봐주는 셈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황제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본래 황제가 내린 혼사는 아무리 감당할 수 없어도, 당사자가 아무리 불만이라도 치러야만 했다.
“신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육장봉은 혼사에 대해 아무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황궁 밖을 나서자, 내관이 멘 가마에 앉아 들어오는 소 승상을 스쳐 지나갔다.
가마에 앉은 소 승상에게서는 침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얼굴은 거무스름하고, 백발이 성성했다. 그 모습을 본 육장봉은 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소 승상은 역시 황제를 잘 알았다. 지금 죽을 날이 머지않은 그의 모습을 보면, 황제는 마음이 약해질 게 뻔했다. 하물며 소 승상은 아들까지 먼저 보낸 뒤였다.
월령안과 소 승상의 이번 겨룸은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판가름하기 힘들었다.
월령안은 월씨 저택을 불태움으로써 소 승상에게 한 방 먹였다. 또 소 승상은 아들의 죽음으로 소씨 가문이 되살아날 기회를 얻었다.
육장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 승상의 일을 잠시 내려 두었다.
* * *
육장봉은 비밀 감옥에 갇혀 있던 수횡천을 데리러 직접 형부로 갔다.
수횡천은 보름 넘게 갇혀 있었다. 밤낮으로 허공에 매달려 있다 보니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는 쇠사슬에서 풀려나는 순간, 진흙처럼 바닥에 푹 퍼졌다. 도저히 걸을 수조차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수횡천은 육장봉을 바라보며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령안이가 당신의 무슨 요구를 수락했지?”
“그건 나와 월령안의 일이지. 수 맹주와는 상관없네.”
보름 넘게 갇혀 있느라, 수횡천은 수염이 까슬하게 올라와 있었다. 몸에서는 피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여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길거리의 거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육장봉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수횡천을 꺼리는 기색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수횡천은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욕을 했다.
“령안을 괴롭히지 마시오. 무슨 일이 있다면 당신과 나, 둘이서 해결하지.”
육장봉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간수를 불렀다. 그리고 수횡천을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라고 하는 한편, 특별히 당부했다.
“수 맹주에게 제대로 된 옷을 줘라. 멀쩡해 보이게 해.”
그는 월령안이 수횡천 때문에 마음 아파 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난 싫…….”
수횡천은 거절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육장봉의 말이 들렸다.
“월령안을 걱정시키고 싶나?”
수횡천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쇠사슬에 조이는 바람에 보랏빛으로 부어오른 손목을 보더니 침묵했다.
월령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도 육장봉과 마찬가지였다.
육장봉은 사람을 시켜 수횡천을 목욕 시키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뿐만 아니라 어의까지 불러 수횡천의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수횡천이 월령안 앞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녀의 동정심을 살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이유였다.
수횡천은 무림맹주의 자리에 앉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본인의 실력도 비범했다. 일반인이라면 진작에 버티지 못했을 테지만, 그는 보름 넘게 시달리면서도 버텨냈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만 쉬었는데도 금세 기운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심지어 혼자 걷기까지 했다.
육장봉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수횡천이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겉모습으로는 알아볼 수 없자, 그제야 그를 데리고 성 밖을 나갔다.
환자인 수횡천을 배려하기 위해, 정확히는 수횡천의 번듯한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육장봉은 말 대신 마차를 탔다.
서로 꼴 보기 싫은 사이인 만큼 가는 내내 불만이 생기지 않도록, 육장봉은 육이에게 마차를 두 대 준비하라고 했다. 둘은 앞뒤로 떠났다.
수횡천은 육장봉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도저히 물을 기회를 찾을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 저 인간은 악랄하기 그지없어. 무엇을 물어본다 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야.’
마차는 길을 서둘러 재촉했다. 그들은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명월산장에 도착했다.
* * *
한편, 술에 취한 월령안은 그제야 겨우 깨어났다.
잠에서 깬 월령안은 이불을 안고 침상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햇빛을 본 순간 멍해졌다.
정신이 들자 간밤의 일을 떠올랐다. 그녀는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바로 얼굴을 이불 안으로 파묻었다.
‘너무 창피해! 내가 어쩌다 술에 취했지? 내가 어쩌다 하필이면 육장봉 앞에서 술에 취했지? 취한 건 그렇다 쳐도, 내가 육장봉 앞에서 술주정을 부리다니! 내 주량이 언제부터 이렇게 약해졌지? 혹시 육장봉의 속임수에 걸려든 거 아냐?’
지금 월령안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육장봉이었다. 그런데 하인은 육장봉이 왔다고 보고했다.
월령안이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전이었다. 하인은 육장봉이 수 맹주를 데려왔다고 덧붙였다.
“수 오라버니를?”
월령안은 너무 기뻐서 침상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하인의 확답을 들은 월령안은 창피함도 신경 쓰지 않았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세수와 단장을 마치고 서둘러 화청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