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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03)화 (403/1,004)

403화 내가 보수를 받으러 왔소

“대원수, 저기…….”

야율융진의 시위는 못마땅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자마자, 신호는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거역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모든 일은 비무가 끝나고 다시 이야기한다. 알겠느냐?”

“네, 대원수!”

야율융진의 시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신호 앞에서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육장봉은 말을 탄 채 멀리서 신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호는 십 년 전보다 확연히 늙었지만, 여전히 건장했다.

고삐를 움켜쥔 손등에서 핏줄이 불거졌다. 손에 움켜쥔 고삐가 점차 짙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저 사람만 보면 살심(殺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신호도 무언가 느낀 듯했다. 육장봉이 그를 보는 동시, 그도 육장봉이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육장봉의 앞쪽에는 잡초가 가림막이 되어 주고 있었다. 신호는 육장봉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육장봉이 있는 방향을 보며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육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신호도 육장봉의 존재를 알아차린 게 틀림없었다.

신호의 행위는 육장봉의 화를 돋우지 못했다. 육장봉은 고삐를 움켜쥔 손을 천천히 풀고 신호가 있는 방향을 평온하게 바라보았다.

날이 어두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그제야 말을 채찍질해 떠나갔다.

육장봉이 떠나가자, 신호는 바로 알아챘다.

육장봉은 기척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감은 매우 미약했다. 그러나 신호는 살기에 대해 대단히 민감했다. 하물며 육장봉은 그를 너무나 죽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육장봉이 나타나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육장봉이 떠나자, 신호도 긴장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육장봉이 있는 방향으로 침을 뱉었다.

“늑대 새끼 같으니라고.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이 감히 호랑이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고 하는구나. 이번에도 너를 위해 몸을 팔려는 공주가 나타나서 너를 구해 줄지 한 번 두고 봐야겠다.”

* * *

육장봉은 말머리를 돌려 미친 듯이 채찍질했다. 정해진 방향은 없었다. 말은 날 듯한 속도로 앞만 바라보며 뛰어갔다.

매서운 바람이 칼날처럼 얼굴을 스쳤다. 그러나 육장봉은 감각을 잃은 듯,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온종일 미친 듯이 달렸다. 한밤, 자시(子時 – 오후 11시~오전 1시)가 되고 말이 지쳐서야 멈췄다.

육장봉은 말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에 그의 목적지는 아주 명확했다.

반 시진 뒤, 그는 명월산장에 도착했다.

육장봉은 누구도 놀라게 하지 않았다. 소리 없이 높은 담장을 넘더니 배나무 숲에 도착했다. 그리고 가장 높은 나무를 골라, 그 밑에 파묻힌 이화백 두 동이를 꺼냈다.

명월산장의 배나무 숲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배나무 밑에 전부 이화백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 술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육장봉과 조계안이 묻은 것이었다.

그때는 어린 나이라 머릿속은 늘 기상천외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배나무 아래에 이화백을 묻는 것은 조계안의 발상이었다.

그때, 육장봉은 그저 유치하다고만 느꼈다. 하지만 조계안은 흥미진진하게 여겼다. 그는 조계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조계안과 함께 보름이 넘도록 몰래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황궁에서 훔쳐 온 이화백을 전부 배나무 밑에 묻어 두었더랬다.

이 사건 때문에 선황은 지금의 황제에게 매를 들기도 했었다. 당시 조계안이 황제의 명의를 빌어 황궁에서 술을 빼내 왔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이 술은 육장봉의 몫이 되었다.

육장봉은 술 두 동이를 들고 익숙한 길을 걸어 월령안이 묵는 처소로 갔다.

그는 월령안의 방문을 두드렸다.

“월령안, 보수를 받으러 왔소.”

육장봉은 말을 마치자,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돌아서서 월령안에게 일어나서 옷을 입을 시간을 주었다.

“육…… 대장군?”

월령안은 단잠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들려온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미처 사람을 부르기도 전에 육장봉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소. 나오시오.”

육장봉은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월령안은 들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깨우지는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월령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 안에서는 부스럭거리며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방 안의 불이 켜졌다. 단정한 옷차림의 월령안이 문을 열었다.

“대장군께서 이 야심한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육장봉이 돌아섰다.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에 서 있는 어여쁜 소녀를 보고 있으려니, 그의 온몸을 감돌던 우울한 기운이 조금 옅어졌다. 그는 손에 든 술동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일어나시오. 나와 술 한잔합시다.”

월령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본능적으로 거절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육장봉이 먼저 말했다.

“월령안, 당신은 거절할 수 없소. 이건 내가 원하는 보수니, 반드시 치러야 하오.”

“무슨 보수요?”

월령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행화루의 일을 해결했소. 오늘 밤 나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 이게 내가 원하는 보수요.”

육장봉의 목소리는 약간 의기소침하게 들렸다. 예전의 기운 넘치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육장봉을 바라보는 월령안의 시선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오늘따라 육장봉이 아주 이상했다.

육장봉은 늘 감정을 꼭꼭 숨기고 있어 희비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 그녀는 육장봉에게서 슬픔을 읽었다.

‘얼마나 큰일이 있었길래, 심지가 굳건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사람이 마음속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걸까?’

월령안은 깊이 알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육장봉의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 그와 함께하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가 여인의 아름다움, 연약함, 가련함에 마음이 약해지듯, 여자도 늘 강하던 남자가 가끔 드러내는 나약함에 마음이 약해진다.

그녀가 육장봉의 마음속에 감춰진 나약함을 보고 나면, 육장봉이 과연 그녀를 가만히 놔둘까?

그러나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월령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할 방법을 생각하는 사이, 육장봉은 술동이를 그녀의 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월령안을 안고 지붕 꼭대기로 훌쩍 뛰어올랐다.

“육장봉!”

월령안이 아무리 담대하더라도 이런 행동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육장봉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무서워하지 마시오. 내가 있는 한, 당신은 떨어지지 않을 거요.”

육장봉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평소의 엄숙함이나 진지함은 전혀 없었다. 높고 낮은 기복이 드러나는 어조에는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섞여 있었다.

그 목소리는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는 깃털 같았다. 월령안은 가슴이 떨려 하마터면 손에 든 술동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육장봉이 제때 잡아 주었다.

월령안은 깜짝 놀랐다. 육장봉은 가볍게 웃으며 월령안을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말하지 않았소? 내가 있는 한, 괜찮을 거라고.”

그는 지금 충분히 강해졌다. 자기가 보호하고 싶은 여인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십 년 전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월령안은 지붕 위에 앉아 다리를 살짝 구부리고 있었다. 그녀는 육장봉이 밀어 넣은 술동이를 품에 꼭 안고만 있을 뿐, 뜯지는 않았다.

육장봉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또 그와 마음속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고요한 밤은 언제나 사람을 쉽게 취하게 한다. 여기에 슬픈 과거사와 술까지 더해지면, 더욱 흐트러질지도 몰랐다.

육장봉은 이미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태였다. 그녀라도 반드시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했다. 그에게 휩쓸려 함께 허튼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육장봉에게는 제멋대로 굴어도 될 만한 밑천이 있을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이 세상은 남자에게와는 달리, 여자에게는 전혀 관대하지 않았다. 최악의 결과를 감당할 준비를 마치기 전까지는, 이성을 잃고 한순간의 격정에 빠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당신도 짐작했을 거요. 내 어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소. 내 어머니는 이십육 년 전에 북요와 화친한 현음 공주요. 십 년 전, 나는 어머니의 존재를 알고, 충동적으로 북요로 가서 어머니를 만나려고 했소. 하지만 그 바람에 도리어 어머니를 해치고 말았소…….”

육장봉은 혼자 술 반 동이를 비우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내뱉는 말마다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생모가 누구인지 일찌감치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육장봉의 입으로 직접 인정하는 말을 듣게 되자, 또다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마터면 손에 든 술동이를 놓칠 뻔했다.

육장봉이 바로 손을 내밀어 월령안의 품에 있던 항아리를 받쳤다. 그의 갈라진 목소리가 약간 메어 있었다.

“두려워하지 마오. 다 지나간 일이오.”

월령안은 묵묵히 육장봉을 힐끗 바라보았다. 육장봉이 정말 취한 것 같았다.

그녀가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깟 술 한 동이쯤이야 깨트리면 그만이다.

‘내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다고? 정말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육장봉 자신이겠지?’

월령안은 무언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몰래 한숨을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아픔을 나누지 못하고, 스스로 천천히 보듬을 수밖에 없는 상처도 있다.

육장봉도 더는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한마디만 한 채, 침묵을 지켰다.

그는 월령안의 옆에 앉아 오른쪽 다리를 곧게 뻗고, 왼쪽 다리는 세우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술동이를 붙들고 무릎으로 받치고 있는 모습에는, 소탈함과 자유로움이 드러났다.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달빛을 빌려 육장봉의 안색을 어렴풋이 살필 수 있었다. 아까만큼 우울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젠 내려놓기로 했나 봐.’

월령안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육장봉은 아주 강한 사람이라, 쉽게 무너지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육장봉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월령안, 오늘 월 삼낭이 폐하께 종자 하나를 바쳤소. 해외에서 온 거라고 하는데 묘당 천 근 이상 수확할 수 있다더군. 폐하께서는 아주 눈여겨 보시긴 하셨으나, 월 삼낭을 믿지는 않으셨소. 그래서 월 삼낭을 가두고 심문하라고 하셨지.

월 삼낭은 폐하의 신임을 얻느라 해외에 월씨 가문의 금광이 있다고 말했소. 게다가 월씨 가문이 금괴 일부를 숨겨 두고 보고하지 않은 일들도 밝혔소. 또 당신이 살수를 고용할 때 쓴 황금이 바로 월씨 가문이 해외에서 가져온 금괴라고까지 이야기했소. 당신은 주나라에게 황금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오?”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그녀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별로 대수롭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월령안은 그를 힐끗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나라에는 금이 부족하죠.”

황제는 철광산 하나조차 연연해 끝까지 캐물었다. 증거가 없는데도 그녀를 감시하는 걸 포기하지 않고, 철광산을 내놓으라며 몇 번이고 핍박했다.

그런 상황에 월씨 가문이 금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황제는 그녀를 더더욱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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