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저 애를 속량해 주실 겁니까?
육장봉이 궁문 입구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표정이 약간 차가웠을 뿐, 평소와 다름없었다.
궁문을 지키던 금군은 그에게 예를 올릴 용기가 있었다.
“대장군!”
줄곧 입구를 지키던 육이는 육장봉이 걸어 나오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와 세 걸음 떨어진 곳까지 갔을 때, 흠칫 떨고는 멈춰 섰다.
“보고해라!”
육장봉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육이를 기다려 주지도 않고 스쳐 지나갔다.
육이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쫓아갔다.
“대장군, 야율융진이 황궁을 나가서는 사람을 데리고 행화루에 갔습니다. 그곳의 기녀들에게 자기와 함께 성을 나가자 했다고 합니다.”
“행화루?”
육장봉은 잠시 멈추고 육이를 바라보았다.
육이는 즉시 등을 곧게 펴고 말했다.
“맞습니다. 월 낭자가 간 적 있는 그 행화루입니다.”
야율융진이 행화루를 선택한 걸 보니 작정한 게 분명했다.
육장봉은 계속 걸으며 말했다.
“행화루로 가자.”
“장군님, 말을 데려왔습니다.”
육삼은 영리하게도 미리 육장봉의 말을 끌고 왔다.
육장봉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고삐를 건네받아 말 등으로 뛰어오르더니 재빨리 떠나갔다.
육삼은 자기의 말도 끌고 왔다. 육장봉이 말에 오르자마자 자기도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육장봉과 말 한 마리 거리를 두고 바싹 뒤따라 나섰다.
오직 육이만 궁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멀어져 가는 육장봉과 육삼을 바라보며 속을 끙끙 앓았다.
‘내 이럴 줄 알고 있었지! 육삼 저 자식, 속셈이 따로 있잖아! 저 녀석, 줄곧 대장군 옆의 일인자 자리를 탐내고 있었다고.’
전에 그는 육삼에게 물어보았었다. 그때 육삼은 생각도 없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 건가?’
“육이 장군, 장군의 말입니다!”
시위는 말을 끌고 왔다가, 이를 갈고 있는 험상궂은 육이의 모습에 깜짝 놀라 흠칫 떨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고맙다.”
다른 사람 앞에서 육이는 재빨리 평소의 고고한 모습을 되찾았다. 허리춤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 시위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 육삼에 대한 분노를 누르고 재빨리 말을 타고 쫓아갔다.
‘나 육이야말로 대장군 곁의 일인자야. 육삼, 이 엉큼한 자식이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라고 해.’
육이는 미친 듯이 달렸지만, 그래도 육장봉과 육삼보다 한발 늦게 행화루에 도착했다. 육장봉과 육삼은 이미 들어간 뒤였다.
행화루 안은 야단법석이었다. 기루의 기녀들은 훌쩍거리고 있었고, 유경장은 영영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야율융진과 그가 데리고 온 앞잡이는 한쪽에 서서 살벌한 눈빛을 보내고 있지만, 감히 움직이지는 못했다. 대신 화가 잔뜩 나서 육장봉을 노려보고 있었다.
육 대장군은 육삼을 거느리고 마치 제삼자처럼 대청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러나 전체 행화루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였다.
기녀 몇은 자기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애달프게 눈물을 흘리며 육 대장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는 모습은 마치 육 대장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듯했다.
‘이 얼빠진 기녀들이 설마 대장군이 자기들을 위해 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육이는 비웃으며 차가운 얼굴로 행화루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청에서 의자 하나를 가져다 육장봉의 뒤에 놓아두며 말했다.
“대장군.”
“음.”
육장봉은 대답하고 옷자락을 젖히더니 자리에 앉았다.
육이의 무표정한 얼굴에 이상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육삼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묵묵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장군 곁의 일인자답군. 역시 비교가 안 돼. 아직 멀었어.’
육장봉이 자리에 앉자, 야율융진은 왠지 기가 죽어 보였다. 다행히도 그의 부하가 눈치 빠르게 의자를 가져다가 그의 체면을 조금 세워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율융진은 여전히 불쾌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육장봉, 무슨 뜻이냐? 내가 기루에 다니는 것도 상관할 셈인가?”
“내 눈앞에서 강매는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육장봉은 의자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 눈은 고요하여 아무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강매는 무슨! 저 여인들은 본래 몸을 팔러 나온 게 아니었나? 내가 돈을 안 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야율융진은 표정에 광기를 띠고 차갑게 비웃었다. 흉악한 두 눈이 행화루의 기녀들을 훑어보았다. 기녀들은 놀라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개중에 속셈이 따로 있는 사람도 있었다. 기회를 엿보아, 육장봉에게 연약하면서도 꿋꿋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오. 아닙니다, 대장군. 저희 행화루 기녀는 기예만 팔고 몸은 팔지 않습니다. 저는 몸을 판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이 깨끗한 몸을 세상의 대영웅에게 바치려 할 뿐입니다. 절대 저 북요의 도적놈에게 제 몸을 맡기지 않을 겁니다.”
“은타(銀朶), 입 닥쳐!”
그 기녀가 입을 열자, 영영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를 챘다. 같은 불여우끼리 무슨 수작인지 못 알아볼 리가 있겠는가. 순간 화도 나고, 짜증도 났다. 당장 앞으로 나가 사람을 끌어오고 싶었다.
영영이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였다.
“영영, 괜찮다.”
유경장이 영영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은타, 쟤가…….”
영영은 화가 나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녀가 관리하는 기녀가 많은 사람 앞에서 주인 아가씨의 남자를 유혹하다니. 도저히 주인 아가씨를 볼 낯이 없었다.
유경장은 그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저분은 육 대장군이야.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 순간, 육장봉이 갑자기 은타를 바라보았다.
“은타라고 했나?”
영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역시 남자잖아.’
남자라면 유혹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육장봉처럼 의지가 굳은 대영웅들은 미색에 넘어가지 않을 수는 있지만, 여인의 연약함 때문에 보호 본능이 발동할 수도 있었다.
기루 여인에게 기루에서 나가 평범하게 살라고, 난봉꾼에게 바른길로 돌아오라고 권하는 건 대영웅들이 가장 즐겨 하는 일이 아닌가.
‘유경장, 이 사람은 기루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있으면서……, 설마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육 대장군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은타는 짜릿함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기쁨에 겨워 사뿐사뿐 앞으로 다가서더니 수줍은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은타가 대장군을 뵙습니다.”
은타는 매우 아름다웠다. 호리호리하고 가냘픈 데다가, 호수처럼 맑은 눈은 사람을 볼 때면 다가올 듯 말 듯 유혹하는 듯했다. 이런 추파는 양갓집 여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행화루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녀였다. 영영도 그녀에게는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야율융진도 들어서자마자 은타가 눈에 들어왔다. 강제로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녀의 팔에는 벌건 자국이 남았다.
뽀얀 피부에 붉은 자국이 더해졌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손상되지 않았다. 오히려 학대당한 뒤의 연약함과 무기력함이 더해져, 그녀를 아껴 주려는 마음이 절로 일게 했다.
육장봉도 그녀를 예상대로였다. 은타가 은근하게 추파를 던지자, 그가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여인의 기적(妓籍) 문서는 누구에게 있느냐?”
“대장군, 설마…… 저 애를 속량(贖良)해 주실 겁니까?”
영영은 실망을 느끼는 한편 ‘역시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 대장군도 결국 남자일 뿐이었다. 영영은 이렇게 오랫동안 기루에 있으면서 이런 상황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영영이 미처 분노하기도 전에 은타는 애달프게 울며 하소연했다.
“대장군, 저는 신분이 비천하여 속량하는 데도 큰돈이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행화루의 배후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세력이 아주 강합니다. 저는 돈이 있어도 감히 저 스스로 속량하지 못했습니다. 보복당할까 두려웠습니다. 대장군께서 저를 가엾이 여기셔서 이 불구덩이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면, 은타는 대장군의 은덕에 반드시 보답할 것입니다.”
은타는 말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만일 육이가 제때 앞으로 나가 막지 않았다면, 그녀는 많은 사람 앞에서 육 대장군의 다리에 달려들어 그의 배 아래에 얼굴을 파묻었을 것이다.
“은타, 넌 얼마나 염치가 없니!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하는데!”
영영이 더는 참지 못하고 유경장을 밀쳐 냈다.
“우리 행화루에서 네가 스스로 속량하겠다는 걸 언제 막은 적이 있어? 아가씨는 늘 너희에게 갈 곳만 있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잖아! 얼마 되지도 않는 너희 몸값은 신경 쓰지도 않으셨어. 너희가 잘 지내기만 하면 된다고 했었어.
그런데 네가 지금 육 대장군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아가씨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불구덩이에서 너를 구해 준 아가씨께 미안하지도 않냐고!”
영영은 말을 하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멀쩡하던 애가 어쩌다 이렇게 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영영이 울자 은타도 울었다.
영영은 슬픈 나머지 대성통곡하다 보니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반면, 은타는 슬퍼하며 낮게 훌쩍였다. 큰 억울함을 당했지만, 묵묵히 참아내며 고통을 토로하지 못하는 듯했다.
둘 다 울고 있었지만, 무릇 남자라면 저도 모르게 은타 쪽을 딱하고 안타깝게 여길 것이다.
야율융진마저 영영을 비난하는 눈길로 쏘아보았다.
기루의 다른 기녀 중에는 은타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분노하는 사람이 더욱 많았다. 그중 용감한 사람이 나서서 말을 하려 하자, 유경장이 막아 나섰다.
남자는 남자가 더 잘 알았다. 유경장은 육 대장군이 시종일관 은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감정 기복조차 없었음을 알아차렸다.
지금 은타의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육 대장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여인의 기적 문서를 가져오너라.”
육장봉은 확실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은타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고, 육이에게 사람을 내다 던지라고 하지 않은 것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일은 행화루의 기녀 몇 명이 소 승상의 사람에게 매수당해 월령안을 모함하려 한다고 보고했었다.
월령안은 성 밖에 있었고, 행화루도 표면적으로는 그녀의 재산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풍파가 한창이니, 월령안은 이 배신자들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할 수 있었다.
육장봉은 말을 끝내고 한마디 덧붙였다.
“이 여인과 가까이 지내는 다른 사람들의 기적 문서도 함께 가져와라.”
“대장군, 제가 반드시 대장군을 잘 모셔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은타의 얼굴은 희열로 들떴다. 더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다리를 꼬집어서야 마음속의 희열을 억누르고, 기쁜 나머지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겨우 삼킬 수 있었다.
은타가 잘된 것을 보자, 속셈이 많은 기녀들도 더는 두려운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은타에게 다가가 알랑거렸다.
“은타 언니, 저랑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저는 여기 있기 싫어요. 흑흑흑……. 행화루는 생지옥이에요. 너무 무서워요. 저도 갈래요.”
과거에 합격이나 할 수 있을지, 진심으로 그녀들을 맞아들일지도 모르는 서생들보다 육 대장군이 훨씬 믿음직했다. 설령 육 대장군의 눈에 들지는 못하더라도, 육 대장군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더라도 괜찮았다.
딴마음을 품은 기녀들은 하늘에 대고 맹세를 했던 서생들을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깨끗하게 지워 버렸다. 당장 은타 앞에 모여들어 그녀에게 아부했다.
“은타 언니, 저도요……. 우린 가장 친한 자매잖아요. 언니가 불구덩이에서 벗어나면서 우리를 버리면 안 되죠.”
“은타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