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이 편지는 제가 썼습니다
육장봉은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 바로 몸을 돌려 양국의 문관을 독촉해 삼차전 비무 명단을 바꿨다.
삼차전의 비무에서 북요에서 원래 정했던 사람은 한 노장이었다. 그 노장이 거느린 군대는 변방에서 여러 해 동안 주나라의 백성들을 괴롭혔다. 또한 주나라 군대와의 몇 차례 접전에서도 이긴 적이 더 많았다. 전성기에는 주나라의 성곽 여섯 채를 잇달아 빼앗기도 하는 등,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주나라 쪽 명단은 북요에서 보내온 명단에 근거하여 작성했다. 북요에서 노장을 파견하자, 주나라에서도 노장을 내보냈다. 게다가 한때 북요 노장을 이긴 적이 있는 노장군이었다.
다만 주나라의 그 노장군은 나이가 많아 몇 차례 훈련하고 나자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주나라 쪽에서도 이 노장군이 비무를 마치고 나면 몸이 상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 육장봉에게 도발 당한 야율융진이 주장을 바꾸자, 주나라는 물론 사양하지 않았다. 즉시 명단을 받아와 노장군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육장봉의 이름으로 고쳤다. 그리고 고친 부분에 도장을 찍어 북요 측에 다시 넘겨주었다.
주나라에서 잽싸게 사람을 바꾸자, 북요인들은 잠깐 동안 말을 잊었다.
“전하…….”
이 일을 맡은 문신들은 묵묵히 야율융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당장 정신을 차리기를 바랐다.
그들이 주나라에 제출한 비무 명단은 모두 신중한 고려 끝에 작성한 것이었다. 그들은 주나라에서는 체면을 중시하느라, 북요에서 내보내는 사람의 급에 맞추어 사람을 선발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위의 명단, 특히 삼차전 비무의 주장을 맡은 노장은 심혈을 기울여 선발했다. 수많은 첩자를 써서 주나라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그다음 그 정보를 짜 맞춰 주나라에서 내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예측한 다음 선발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차전, 이차전은 몰라도, 삼차전만큼은 북요에서 꼭 이기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대황자가 도발 당해 주장의 이름을 바꾸었다.
‘이러다 지면 폐하께는 어떻게 말씀드리지?’
“보기는 뭘 봐! 빨리 고치지 못해!”
지금 야율융진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주나라 조정의 문무 대신 앞에서 대답했다. 그리고 육장봉이 과감하게 일을 결정해 버렸다. 인제 와서 후회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도 육장봉을 한번 이겨 보고 싶었다. 이기기만 하면 북요 황제의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다소 위험 부담이 있기는 해도, 이길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설령 정말로 지더라도, 고질병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었다.
주나라가 재빨리 명단을 고쳐 놓았기에 북요의 관리들도 고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로 책임을 지기 싫어 질질 끌며 고치지 않고 있었다.
결국 야율융진이 입을 열자, 그제서야 움직였다. 그러나 북요의 관리들은 잔머리를 굴려 부장(副將)의 이름을 기존 주장이었던 노장으로 바꿔 놓았다.
주나라의 관리는 이 광경을 보았지만, 못 본 척했다.
육 대장군만 있다면 부장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주나라가 반드시 승리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육 대장군을 이토록 신뢰하고 있었다.
쌍방은 곧 새로운 명단을 교환했다. 황제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환한 얼굴로 외교적인 언사 몇 마디를 건넸다. 또한 저녁에는 황궁에서 연회를 베풀어 북요의 사신을 접대하기로 했다. 그러고는 북요 사신들에게 돌아가도 된다고 암시했다.
야율융진은 육장봉에게 망신을 당하자, 더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예법에 따라 물러갔다.
북요 사절단이 궁문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내관이 다가와 소영화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야율융진은 비웃듯이 피식 웃더니 분부했다.
“영화, 주나라의 관리에게 잘 말해 주어라. 주나라의 귀족 여인이 어떤 식으로 뻔뻔하게 자진해서 네게 안겼는지 말이다.”
야율융진은 말을 마치자, 고개를 쳐들고 거만하게 떠나갔다.
소영화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나라 사람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상권과 대황자의 말이 있으니 밉보일 수밖에 없었다.
소영화는 내관을 따라 이름 모를 어느 편전(便殿)으로 갔다.
편전 안. 종실의 종령(宗令 – 종인부의 책임자)인 제왕(齊王)이 기다린 지 한참이었다. 소영화를 본 종령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소영화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탁자 위에 펼쳐 놓은, 글이 가득 쓰인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편지의 내용에 대해 소 상장께서는 기억이 있소?”
소영화는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들어 올려 한 번 훑어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거렸다. 그 편지에 적힌 내용과 글씨는 그날 남상권이 그에게 보여준 것과 똑같았다.
이 편지는 분명히 그가 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소영화는 마음속의 답답함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는 편지를 내려놓더니 자부심이 넘치는 태도로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편지는 제가 썼습니다. 여기 적힌 내용도 사실입니다. 만일 대인께서 믿지 못하겠다면 소함연과 대질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여러 번 만났습니다. 소함연은 삼 년 동안 변방에 있으면서 제게 편지를 자주 써서 보냈습니다. 또한 주나라 대군의 배치에 대해서도 자주 누설했습니다. 하지만 육장봉이 군대 관리를 엄격하게 했기에, 아가씨 혼자서는 유용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함연이 전해 준 소식은 대부분 쓸모가 없거나 시간이 지난 것들이었습니다.”
제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화와 소함연이 왕래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않고 한담하듯이 물었다.
“내가 하나 물어도 되겠소이까? 상장군은 혹시 무슨 어려운 일에 부닥친 것은 아니오? 혹시 어려운 점이 있어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소?”
소영화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신과 소함연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이 일이 추문인 줄 알면서도 유 대인더러 신문하게 했다. 북요의 상장군 소영화가 자기의 비열하고 파렴치한 과거를 스스로 인정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점이 있냐고? 물론 있고말고! 협박을 받았지.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고!’
소영화는 성실하고 너그러운 제왕의 얼굴을 보자, 감정이 복잡해졌다.
그는 이 주나라의 제왕에게 주나라의 강호인이 얼마나 무서운지 떠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자의 오만방자함이 떠올랐다. 게다가 떠나기 전에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소영화는 곧 하소연할 의욕을 잃었다.
‘말하긴 뭘 말해. 죽고 싶어 환장했냐!’
그 사람의 이름만 생각해도 소영화는 기운이 반쯤 빠졌다. 제왕에게 훤히 보이는 거짓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왕 전하께 감사드립니다. 귀국이 환대해 주셔서 아무 번거로움도 없습니다.”
“그러신가?”
제왕은 소영화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소영화는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제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다그쳐 물었다.
“내가 또 하나 더 묻겠네. 소 상장은 왜 나서서 증언하기로 하였소? 이 일은 소 상장의 명성에 흠집을 낼 텐데. 안 그렇소?”
소영화는 여전히 입꼬리만 올려 거짓 웃음을 웃었다.
“우리 북요는 당신들과 다릅니다. 북요에서는 여인이 자신을 위해 나라를 팔았다는 것은 강자의 상징입니다. 게다가 제가 말하고 싶으면 말하는 거 아닙니까? 어째, 당신네 주나라에서는 제가 말도 못 합니까?”
“정말, 단지 그런 이유뿐인가?”
제왕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기세가 강해졌다.
제왕은 그래 봬도 황실 출신으로 수십 년 동안 종실을 관리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세 하나는 강했다.
하지만 소영화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어떻게 승진했든 간에 북요의 상장군이었다. 제왕의 위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영화의 얼굴에는 여전히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 웃음만 떠올라 있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제가 말해도 귀국이 믿지 않을 테지요. 아니면 직접 조사해 보십시오. 참, 대황자께서 가기 전에 제왕께 잘 말씀드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저와 당신네 주나라 귀족 여인의 치정사를 말입니다. 제왕, 듣고 싶으십니까? 당신네 주나라의 전 승상의 따님은 정말 열정이 넘쳤습니다. 저는 다만…….”
“됐네!”
제왕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그는 당장 엄하게 꾸짖었다. 소영화가 주나라를 능욕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제왕은 노여워하느라 본뜻을 잊어버렸다. 이 모습을 본 소영화는 다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정말 듣지 않으실 겁니까? 안타깝군요. 저는 사소한 부분까지 많이 준비했습니다. 심지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도록 공당에서 제대로 말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지 못하게 하시니 참 갑갑하군요.
이럴 게 아니라 오늘 밤 기루를 찾을 때, 당신네 주나라의 풍류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경험을 공유해야겠습니다.”
“소 상장, 세 치 혀가 화근이라고 했네. 소 상장은 우리 주나라의 육 대장군께 내던져지고 싶진 않을 테지?”
제왕은 차가운 표정으로 경고했다.
소영화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금세 얼굴의 미소를 거두고 씩씩거리며 일어서서 제왕에게 포권했다.
“양국 비무가 끝난 다음에도 당신네 주나라가 여전히 지금처럼 오만방자하기를 바랍니다.”
소영화는 말을 마치자마자 옷소매를 떨치고 떠나갔다.
제왕은 배웅하지 않았다. 사람이 간 것을 확인하고는 일어나서 병풍 뒤를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폐하.”
“황숙, 고생하셨습니다. 늦었으니 먼저 돌아가십시오.”
황제는 병풍 뒤에서 나와 제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제왕은 황제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지 못하고 몸을 굽혀 물러갔다.
황제는 그 자리에 선 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폐하.”
이반반은 한참 기다렸지만, 여전히 황제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살짝 다가가서 불렀다.
“폐하, 점심시간입니다.”
황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물었다.
“이반반, 월령안에게 과연 그런 재간이 있단 말이냐? 소영화를 매수하여 증언하게 하는 재간이 있을까?”
“폐하, 상장군은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반반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한 나라의 상장군만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위치에만 있더라도 돈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많은 돈도 소용없었다.
황제는 말을 듣더니 안색이 침울해졌다.
소영화가 증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우리 주나라에 이렇게 수완이 비상한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어째서 황제인 내가 전혀 모르지?’
황제의 눈썹이 더욱 심하게 찌푸려졌다. 그의 온몸에서는 음침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를 본 이반반이 급히 입을 열었다.
“폐하, 태후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자.”
황제는 숨을 고르고 잠시 눈을 감고 쉬었다. 표정이 조금 좋아지고 나서야, 편전에서 나와 태후의 궁궐로 걸어갔다.
태후는 벌써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도착하자마자 음식이 차려졌다.
황제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태후도 앉아 있지 않았다. 월 삼낭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서 황제에게 두어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자애로운 얼굴로 손짓했다.
“폐하께서 오셨군요. 내 기억으로 폐하께서 신기한 음식을 좋아하셨지요. 이건…… 이 아이가 요새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내가 먹어 보니 괜찮더군요. 그래서 폐하께서도 맛을 보셨으면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저를 생각하시다니요. 모후께서 저를 아끼시니 정말 좋습니다.”
황제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태후의 다른 손을 부축했다. 그리고 그 김에 월 삼낭을 힐끗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