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393)화 (393/1,004)

393화 명월산장에서 살면 어때요?

월령안은 정서의 부인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부인은 젊고 아름다우며, 정서와도 사이가 아주 좋았다. 정서와 피맺힌 원한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 노부인은 자기 주인이 정서의 정실이라고 했다. 월령안이 만난 정서의 부인과는 동일 인물이 아닌 게 분명했다.

김씨 노부인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에, 곧 얼굴의 눈물을 훔치고 땅에서 일어났다.

“월 낭자, 저희 아씨는 정서 그 개자식이 출세하기 전에 맞아들인 부인입니다. 아씨 집안은 그 지역의 유명한 천석꾼이었지요. 정서 그 개자식은 산속에 사는 가난한 사냥꾼에 불과했고요.

그때 저희 나리께서 산에 올라가셨다가 발을 헛디뎌 함정에 빠졌는데, 정서 그 개자식이 구해 주었습니다. 나리께서는 그 개자식을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믿었지요. 따님을 시집보내고 혼수도 많이 장만해 주셨습니다.

그 개자식이 제법 재간이 있어서, 아씨의 혼수에 기대 출세했던 겁니다. 그놈이 무과에 응시해 합격했고, 군대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씨도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아씨 덕에, 그놈은 일개 병사에서 오품 영원(寧遠) 장군까지 천천히 승진했습니다. 아가씨 팔자도 점점 필 줄 알았는데 그 개자식이 출세하면서 사람이 달라지더군요. 아씨 출신이 평범하다고 업신여기기 시작하더니, 전선에 주둔할 때…… 현지 태수(太守) 첩실의 딸을 첩으로 맞아들이고는 그 첩을 정실로 대접했습니다.

뭐 그런 것까지도 괜찮았습니다. 만약 그 개자식이 멀쩡한 아내를 두고 새장가를 갔다 하더라도, 아씨께서는 그놈을 죽도록 미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놈은, 그놈은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짓이었어요…….”

여기까지 말했을 때, 김 노부인의 슬픔으로 뒤덮인 얼굴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녀는 입을 벌렸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도무지 말을 잇지 못했다.

월령안도 재촉하지 않았다. 묵묵히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넸다.

김 노부인은 월령안의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했다.

“배꽃! 우리 아가씨도 역시 배꽃을 좋아했습니다. 손수건에 배꽃을 수놓는 걸 아주 좋아했죠. 그런데! 그 개자식과 천박한 년의 아들이 북요의 귀족에게 밉보이게 되었습니다. 사죄는 해야 하는데 자기 아들을 보내기 아깝고, 돈으로 해결하기도 아까워서 어린 우리 아가씨와 두 도련님을 대신 보내 벌을 받게 했습니다. 우리 아가씨와 작은 도련님 두 분은 정말 비참하게 돌아가셨어요!”

김 노부인은 목 놓아 우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월 낭자는 모르실 겁니다……. 우리 아가씨는 겨우 열두 살이었습니다. 돌아가신 후 몸은 성한 데가 한 곳도 없었고, 땅속에 묻힐 때까지 눈도 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두 도련님은 산 채로 삶아져서 북요인들에게 먹혔어요. 모두 정서 그, 그 개자식 때문입니다…….”

김 노부인은 손수건을 꽉 틀어쥐었다. 틀어쥔 힘이 얼마나 강한지, 손에 파란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원통하구나! 억장이 무너진다!’

슬픈 옛일을 떠올리고 김 노부인은 울수록 상심이 커졌는지, 결국 울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인에게 김 노부인을 부축하여 객방으로 모셔가게 했다. 또 산장의 의원을 불러 그녀를 살피도록 했다.

얼핏 보아도 그 노부인은 많은 고통을 겪은 듯했다. 그런 비통한 일을 겪었으니 몸이 얼마나 버텨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월령안은 한참 궁리하다가 하인에게 분부했다.

“잘 보살펴 드려라.”

어쨌든 한 번 만난 이상, 냉정하게 방관하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노부인을 잘 돌보게 한 뒤, 월령안은 탁자 위에 보따리를 들고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결국 보따리를 품에 안고 노인의 처소로 갔다.

이 일은 너무 심각했다. 자칫하면 죽음을 자초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노인과 의논할 필요가 있었다.

노인은 월령안이 급하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리자, 눈꺼풀을 들었다.

“왔구나.”

“제가 온 줄 어떻게 알았어요?”

월령안은 무덤덤한 노인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마음이 든든해졌다. 아무리 큰일이라도 노인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노인만 있으면 그녀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예전에 어쩌다 보니 정서가 출세한 사연을 보았지. 정서의 원수가 너를 찾아왔다는 걸 보니, 대강 추측이 가는구나.”

그런 사람은 청렴할 수가 없었다. 작정하고 조사하기만 하면 반드시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쩌면 더욱 큰 문제가 딸려 나올 수도 있었다.

월령안은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어쩌다 보니 정서가 출세하는 과정도 볼 수 있었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영감님, 도대체 예전에 무슨 일을 하셨나요? 정보 매매를 했었나요, 아니면 살수 노릇을 했었나요? 그것도 아니면, 황실의 비밀 무기였나요?”

“다 했었다. 됐냐?”

노인은 예전처럼 입을 꾹 다물어 버리지 않고, 농담처럼 한마디 대답해 주었다.

월령안은 노인에게 다가가 웅크리고 앉았다.

“그건 아니죠? 영감님, 정말 황실의…….”

“이야기책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노인은 월령안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그리고 그녀가 머리를 감싼 틈을 타서 보따리를 가져갔다.

월령안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는 노인의 힘을 느끼고는 그만 보따리에서 손을 놓았다.

그녀는 땅바닥의 먼지도 개의치 않고, 치맛자락도 걷지 않았다.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노인의 다리에 기대서 길게 탄식했다.

“영감님, 제가 또 사고 친 것 같아요.”

노인은 장부 두어 장을 펼쳐 보더니 담담하게 덮었다.

“네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이 걱정하길래, 난 또 무슨 큰일인 줄 알았구나.”

“이게 큰일이 아니라고요? 이 장부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만 하면 조정의 판세가 다 뒤집힐 거예요.”

‘영감님이 지금 농담하는 건가? 이게 얼마나 큰일인데! 수십, 수백 개에 달하는 가문이 몰락할 거라고. 그런데 이것도 큰일이라고 하지 않다니. 영감님의 눈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큰일일까?’

“이게 무슨 큰일이냐. 앞으로 많이 보다 보면 덤덤해질 거다.”

노인은 장부를 다시 보따리에 던져 넣고 챙겼다.

“됐다. 이건 내게 맡겨라. 내가 처리할 테니 넌 못 본 거로 해.”

“안 돼요. 영감님. 이 물건 때문에 영감님이 나서서는 안 돼요. 제가 할게요.”

월령안은 손을 뻗어 빼앗으려 했지만, 노인이 피하는 바람에 헛손질만 했다.

노인은 보따리를 들어 월령안의 머리를 툭 치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네가 어떻게 할 건데? 육장봉을 찾을 거냐, 조계안을 찾을 거냐? 너도 알잖느냐. 이런 일에는 절대 개입하지 말아야 하고, 나서지도 말아야 한다. 네가 이것을 누구에게 넘겨주든 흔적이 남을 거고, 모두 너를 찾아낼 수 있어.

이놈들은 흉악범들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야. 나중에 넌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을 거다. 게다가 그놈들이 전부 죽는다고 하더라도, 분명 살아남은 친척이나 후손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뼈에 생긴 악성 종기처럼 들러붙어, 네가 하루도 편할 날이 없게 하겠지.”

노인은 말을 마치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령안아, 나라를 위해 해악을 제거하는 것은 네 책임이 아니다. 그깟 빈대들 때문에 네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영웅 노릇이란 게 원래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영웅이 되어 나라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키운 아이는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러기엔 그가 이 아이를 너무 아꼈다.

“제 책임이 아니면, 영감님 책임이에요?”

월령안은 뾰로통해서 투덜거렸다.

노인은 웃었다. 흐트러졌던 눈빛이 순식간에 굳건하게 변했다.

“그래.”

월령안은 당황해서 눈을 감아 눈물을 감췄다. 그녀는 노인 옆에 기대며 조용히 물었다.

“영감님도 저를 버리고 절 혼자 두려는 건 아니죠?”

“물론 아니지.”

‘난 죽을 때까지 너와 함께할 거란다.’

“위험하지 않겠죠? 그렇죠?”

월령안은 나무 바퀴 의자에 기대에 눈물을 글썽였다. 후회됐다. 노인을 끌어들일 줄 알았으면, 이 장부들을 못 본 척했을 것이다.

정서를 처리하려면 다른 방법도 있었다. 굳이 그녀 자신까지 위험해지는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네가 나더러 황실의 비밀 병기라고 했잖느냐? 걱정 같은 건 하지 마라.”

노인은 월령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웃었다.

‘꼬마 령안이가 거금을 들여 나를 일 년 더 살게 하려는데, 내 어찌 쉽게 목숨을 버리겠느냐.’

“그럼 영감님을 신이라고 말하고 백 세까지 장수하고 줄곧 저와 함께해 달라고 말할게요. 왜 그런 말에는 걱정하지 말란 얘기를 해 주지 않나요?”

월령안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번만큼은 노인도 말없이 웃기만 했다. 이 약속은 할 수가 없었다.

월령안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노인에게 기대고 앉아서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치도록, 햇살이 얼굴에 내려앉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조용히 노인과 함께, 모처럼 찾아온 평온함을 누렸다.

한참 후 월령안이 입을 열었다.

“영감님, 변경 집에 불이 났어요. 알고 계시죠?”

“다 태웠느냐? 육장봉이 네게 보낸 예물까지도?”

노인이 웃으면서 놀렸다.

월령안은 멈칫하다가 뿌루퉁해서 말했다.

“분명 다 탔을 거예요.”

“아깝지 않아?”

노인이 가볍게 웃었다.

“뭐가 아까워요? 사람도 버렸는데 물건쯤이야 못 태우겠어요?”

사실 그녀는 정말 아까워서 태우지 못했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런 거로 하자.”

노인은 더욱 크게 웃었다.

월령안은 속마음을 들키자,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도 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영감님, 중요한 일을 이야기하는데 좀 진지하게 하시면 안 돼요? 육장봉 얘기는 안 꺼내면 안 돼요?”

“그래, 그래. 꺼내지 않으마. 그놈 이야긴 하지 말자. 진지한 이야기나 좀 해 봐라.”

노인은 입으로는 웃지 않겠다고 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월령안은 못 본 척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영감님, 변경의 저택이 불탔어요. 제가 다시 짓긴 하겠지만, 그곳은 지켜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명월산장보다 안전하지 못해요. 명월산장은 황실 별장이라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할 거예요. 앞으로 명월산장에서 살면 어때요?”

월령안은 노인이 탐탁해 하지 않을까 두려워 덧붙였다.

“명월산장은 환경이 아주 좋잖아요. 몇몇 곳은 영감님의 취향에도 완벽하게 들어맞고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또 공숙무를 데려와서 명월산장에 방어 장치를 몇 겹으로 설치할게요. 틀림없이 변경의 저택보다 살기 편할 거예요. 저, 저는…… 아무튼 모두 영감님의 취향에 따르겠어요.”

월령안은 본래 명월산장으로 노인을 자주 보러 오겠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이 곧 청주에 가야 한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 말은 결국 하지 않았다.

그녀와 노인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아니다. 지금도 아주 좋아. 마음에 들어.”

바퀴 의자에 기대앉은 노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운명이란 게 때로는 정말 재미있구나.’

명월산장은 원래 그가 자기 노후를 위해 준비한 곳이었다. 자연히 모든 게 다 그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었다.

과거, 이곳을 떠날 적에는 더는 그와 상관없는 곳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결국은 명월산장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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