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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92)화 (392/1,004)

392화 정서 장군의 원수

황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혼자 말이 많고, 너 혼자 똑똑하구나.”

“저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사실도 말할 수 없나요.”

조계안은 생떼를 쓰며 손을 들어 육장봉을 가리켰다.

“황형, 나무라려거든 저놈을 나무라셔야죠? 지금 온 변경의 백성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육 대장군이 전처와 재결합하고 싶어 한다고요.”

조계안은 말을 마치고 육장봉의 앞에 다가가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못생긴 놈이 꿈도 야무지네.”

육장봉은 손을 들어 조계안의 가면을 후려치고 사람을 밀어냈다. 그리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황제에게 말했다.

“최일이 제게 신세 진 게 있습니다.”

“최일? 설씨 가문 일 때문에?”

모든 사람이 황제는 강남 설씨 가문의 일을 모르는 줄 알았다. 사실 황제는 누구보다도 더 훤히 알고 있었다. 단지 아랫사람들이 그가 알기를 원치 않기에 잠시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좌우간 지금은 일을 통제할 수 있기에 모르는 척할 뿐이다. 일을 통제할 수 없을 때가 되면 그때는 알아야만 했다.

“네.”

육장봉은 말 한마디도 없이 그저 한마디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황제가 나서서 대신 보충해 주었다.

“그래서 월령안을 찾은 것이냐?”

“네.”

육장봉은 여전히 한마디로만 대답할 뿐이었다.

황제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알겠다. 또 짐이 너를 오해한 거로구나.”

그러나 황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는 너무 일렀다. 갑자기 육장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뭐라고?”

황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오해하신 게 아닙니다. 월령안은 정말 훌륭합니다.”

육장봉은 정말 월령안을 좋아했고, 이제는 그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 듯 했다.

“장봉아!”

황제의 표정이 확 변했다.

“월령안은 짐이 큰일에 쓰려는 사람이다.”

육장봉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 분수를 지킬 것입니다. 폐하의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겁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짐도 마음이 놓이는구나.”

황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바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조계안은 당장 불쾌해했다.

“황형, 그 정도로 저 자식을 또 믿으세요?”

“장봉이는 네가 아니다. 장봉이는 경중을 알거든.”

육장봉이 분수를 지킬 거라고 했다. 황제는 그 말을 믿었다.

“뭐야, 재미없게. 하지만 뭐 상관없어. 소씨, 월씨 가문 사건이 끝나자마자 월령안은 청주로 떠날 거야. 육장봉, 네가 분수를 지키고 싶지 않아도 지킬 수밖에 없을걸.”

조계안은 득의양양해서 육장봉을 흘겨보았다. 육장봉은 조계안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마음속에 약간 남았던 걱정마저도 내려놓았다.

월령안은 이제 곧 청주로 가서 범씨 가문 자제들과 십 년 동안의 가주 쟁탈전을 벌여야 한다.

그 동안 월령안은 혼인할 수 없다.

십 년 뒤면 월령안도 스물여덟이 된다. 설령 육장봉이 지금 일시적으로 월령안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해도, 십 년이면 모든 감정을 희석할 수 있는 시간이다. 게다가 육장봉과 월령안 사이에는 가슴에 깊이 새길 감정도 없지 않은가.

황제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육장봉이 안타까워졌다.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장봉아, 짐이 앞으로 다시는 너의 혼사에 간섭하지 않겠다. 언젠가 혼인하고 싶은 여인을 만나면 말만 해라. 짐이 혼사를 내려 주마.”

“폐하, 감사드립니다.”

육장봉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조계안은 육장봉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만 보아서는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황제를 바라보았다.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스스로 자상하다고 여기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황형이 또 함정에 빠졌군. 하필 내가 장봉을 도와 함정을 파다니. 난 형제로서 정말 육장봉에게 할 만큼 했어!’

* * *

황궁 안에 있던 황제는 조계안의 귀띔으로, 증거는 없더라도 그 사사들이 누구의 사람인지를 충분히 짐작하고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장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궁 밖에 있던 소 승상은 흑의인의 보고를 듣자, 본래 어둡던 얼굴이 한층 더 음침해졌다.

“황금당! 황금당이라, 대단하군! 월령안, 네 이년! 내가 너를 너무 얕보았구나.”

그의 사사들이 이렇게 헛되이 희생되었다.

수많은 돈을 써서 겨우 얻은 사사였다. 그런데 별것도 아니었던 첫 번째 임무에서 태반을 잃게 되니 정말 아까웠다.

“주인님, 제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흑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소 승상 앞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이마는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내가 가진 돈이 남보다 적어서 진 거다. 이 일은 네 탓이 아니다.”

소 승상은 목구멍으로 비릿하고 들척지근한 것이 치미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처럼 억지로 삼키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쿨럭!

소 승상은 입을 벌려 피를 울컥 토했다. 머리가 옆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그는 바로 기절해서 쓰러졌다.

소 승상이 기절하자 소씨 저택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주인이고 하인이고 모두 기둥을 잃은 듯이 갈팡질팡했다.

다행히 소 승상은 의지가 강했다. 의원이 침 두 대를 놓자 곧 깨어났다.

그는 깨어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하인들을 지휘해 예정대로 소여방의 혼례식을 치를 수 있도록 저택을 꾸미게 했다.

소여방은 하인에게 들려왔다. 그는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리고, 얼굴이 바싹 여위어 눈도 푹 꺼지고 눈망울도 혼탁해진 소 승상을 보았다.

소여방은 소 승상 앞에서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몸조심하시라는 당부만 몇 마디 했다. 그러나 방 밖을 나가자마자 목이 메게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씨 가문이 왜 이 지경이 되었지? 당당한 승상의 아들인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 * *

월령안은 성 밖에 있었지만, 성안에서 벌어진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부하가 재주가 좋아 제일 빨리 성안 소식을 전해 준 건 아니었다. 황금당의 사람이 그녀에게 정보를 전해 주었다.

그녀가 그렇게 많은 돈을 썼으니, 황금당 사람들도 덤으로 소식 하나를 전하는 것쯤은 손해가 아니었다.

“소 승상이 결국 안달 난 모양이군. 하지만 그 사사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네.”

월령안은 모든 것이 계획에 따라 진행된 걸 알자,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녀와 소씨 가문은 원한을 너무 오래 끌었다.

칠 년, 장장 칠 년이라는 세월을 견뎠다.

이제 곧 끝을 보게 되리라.

월령안은 일어서서 힘껏 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변경의 저택이 불에 타기는 했지만, 매우 기뻤다.

기쁜 일이 있으니, 당연히 노인과 공유하고 이 기쁨을 나눠야 했다.

월령안은 유쾌한 기분으로 노인의 처소로 걸어갔다.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걸으며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아가씨, 밖에 한 노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아가씨를 꼭 만나겠다고 합니다.”

산장의 집사가 찾아와서 공손하게 고했다.

“누구라고 하더냐?”

월령안은 기분 좋게 물었다.

“자기 말로는 정서 장군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집사도 노부인 하나가 월령안을 찾아왔다고 해서, 당장 달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서 장군의 원수라고?”

정서는 바로 육장봉이 돌아왔던 그날, 뇌물을 받고 그녀가 지나가게 길을 터준 호성(護城) 장군이었다.

소씨 가문에서 그녀가 조정 관리에게 뇌물을 먹였다고 고발한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이었다. 지금 정서는 그녀의 뇌물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그녀가 조정 관리에게 뇌물을 준 죄를 증언하려 했다.

사실 월령안은 정서가 그녀의 뇌물을 받고 편의를 봐주었을 때부터 그에 대한 인상이 좋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이 정서의 원수라는 말을 듣자, 월령안은 한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화청으로 모시게. 금방 가지.”

월령안은 지금 옷차림이 손님에게 실례가 되지 않음을 확인하고서야 화청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화청에 이르렀을 때 그 노부인은 이미 자리에 있었다.

노부인은 품에 작은 보자기를 안고 있었다. 손가락이 보자기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주위를 경계하는 표정에는 불안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월령안은 화청에 들어서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부인.”

월령안이 입을 열자마자, 그 노부인은 털썩 소리가 나게 무릎을 꿇었다.

“월 낭자, 살려 주십시오!”

“부인, 어서 일어나세요.”

월령안은 상대방의 내력을 모르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뒤에 있는 하인에게 노부인을 부축하라고 눈짓했다.

타지에서 장사할 적, 가난으로 찌든 얼굴을 한 노부인이 고통스럽게 땅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노부인은 다른 사람이 도와주던 순간, 바로 표정을 바꾸고 공갈했다.

또한 천진난만해 보이는 어린이가 상대방이 전혀 방어하지 않는 틈을 타, 단칼에 가슴을 찌르는 모습도 봤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낯선 사람을 믿지 않았고, 쉽사리 가까이하지도 않았다. 인두겁 아래에 숨겨진 게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노부인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월 낭자, 저는 김(金)씨입니다. 제 주인님은 정서, 그 개망나니의 정실 부인이십니다. 제 주인님……, 주인님께서 이것을 월 낭자에게 맡기라고 했습니다. 오직 월 낭자만이 저희를 대신하여 복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노부인은 몸을 덜덜 떨며 일어나더니, 품에 안고 있던 보따리를 월령안의 앞에 내놓았다.

‘정서의 정실이라고? 호칭이 좀 이상한데’

월령안은 더 묻지는 않았다. 대신 노부인이 건넨 보따리를 받아서 열어 보았다.

안에 든 장부 여러 권을 보자 처음에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장부를 펼쳐 보자, 의아함이 놀람으로 변했다.

“이게 정말인가요?”

“네, 정말입니다! 저희 마님께서 조금씩 베껴 쓰신 것입니다. 원본 장부는 아니지만, 원본과 내용은 똑같습니다. 원본 장부는 정서 그 개자식이 한 권을 다 적을 때마다 태워 버렸습니다. 지금 찾을 수 있는 건 올해 장부밖에 없습니다.”

김씨 노부인은 보자기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장부를 제게 주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나요?”

월령안은 보자기에 담긴 수십 부의 장부를 보았다. 어마어마한 정보에 저도 모르게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이 장부는 병부, 공부, 호부의 사람들이 결탁해서 횡령한 이익을 나눈 것을 기록한 장부였다.

거기에는 치수(治水) 사업과 도로 보수 공사에서 가로챈 돈, 군대의 급료와 군량을 착복한 돈, 병기를 폐기한다고 신고한 뒤 그 병기를 밀매한 돈, 심지어 은자를 주조하는 과정에서 빼돌린 은까지도 있었다.

이 사람들은 간이 보통 큰 게 아니었다. 세금으로 받은 은에도 손을 뻗쳤다. 은을 녹일 때 납, 철, 구리를 섞어 넣고, 남은 은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 장부들을 조사하여 확인하면, 조정의 판세가 바뀔 것이다.

김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

“정서, 그 개자식은 구족을 모두 멸해도 싸니까요.”

월령안은 손에 든 장부를 덮었다. 더는 감히 훑어볼 수 없었다.

“이 일은…… 제게도 화가 미칠 수 있겠네요.”

장부 하나하나에 사람 목숨이 달려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녀도 화를 당할 수 있었다.

김 노부인은 하얗게 질려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절망한 얼굴로 말했다.

“월 낭자, 나, 낭자도 어찌할 방법이 없나요? 그럼 우리 아씨의 원한은 풀 방법이 없단 말인가요? 하늘이 왜 이리도 무심한가요?”

“부인, 진정하세요. 저는 못 한다고 한 게 아니에요. 다만 장부의 내력을 확실히 하고 싶어요. 혹시 당신네 마님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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