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391)화 (391/1,004)

391화 월령안의 집에 누가 불을 질렀지?

철컥!

검이 세차게 검집에 꽂혔다. 강철이 마찰하는 소리가 귀를 찌르고 머리카락을 쭈뼛이 서게 했다.

“조정에서 병사를 보내 너희를 소탕할까 두렵지 않으냐?”

흑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자기 부하가 모두 죽은 광경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자신이 황금당의 적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조정은 우리 무림맹주를 가두었다. 우리가 무림맹주를 뵈러 변경에 온 김에, 정의로운 대협으로서 조정을 도와 악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도 하지 말라고는 안 하겠지?”

이 말을 마친 황금당 사람은 허리춤에서 영패 하나를 끌러 번쩍 드는가 싶더니 허공에서 손을 놓았다.

콰직!

나무 영패는 높은 곳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져 두 동강이 났다. 두 동강이 난 나무토막 위에는 복잡한 도안이 있었다. 그 두 토막을 합치면 멋들어진 ‘영(令)’ 자가 되었다.

예상대로라면 영패의 뒷면에는 ‘강호’ 두 글자가 있을 것이다.

강호령(江湖令)!

강호의 문파들은 무림맹에 가입하면 모두 강호령패를 받는다.

그들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강호령을 가지고 무림맹이나 다른 문파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상대방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거절해서는 안 되었다.

무림의 존망이 걸린 큰일이 생겼을 때는 무림맹주가 맹주령(盟主令)을 가지고 강호령을 지닌 문파들을 소집할 수도 있었다.

본래 황금당은 살수 조직이기에 무림맹에 가입할 자격이 없었다. 당연히 강호령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지닌 강호령은 진짜였다.

월령안이 그들에게 준 것이었다. 그녀는 강호령을 돈으로 샀다.

황금당의 살수는 영패를 깨뜨려 충분한 단서를 남겼다. 그리고 칼집으로 흑의인에게 일격을 가해 피를 토하게 했다.

“꺼져!”

“네놈들도…… 곱게 죽지 못할 거다!”

흑의인은 공격받은 가슴을 움켜잡고 휘청거렸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더니 비틀비틀 떠나갔다.

황금당 사람은 골목길에 서서 상대방이 집 잃은 개처럼 달아나는 모습을 보고 냉소했다.

‘곱게 죽어? 이런 직업에 종사하면서 누가 감히 곱게 죽는 걸 바라겠나? 그때그때 누리다가 가는 거지.’

저벅저벅…….

군화가 포석(鋪石)을 밟는 소리가 골목 근처에서 들려왔다. 소리를 들어보면 숫자가 꽤 됐다. 근처에 있던 금군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온 것이다.

“이제 가야겠군.”

황금당의 살수는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를 남긴 채 아무 미련 없이 떠나갔다.

금군은 땅바닥에 널린 시신과 영패를 보자마자 재빨리 골목에서 빠져나와 현장을 지켰다.

“이건……, 입궁해서 보고해야 하는 문제군.”

월씨 가문 방화 사건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이젠 그들이 처리할 수가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금군은 골목에서 발견한 시신과 영패를 당장 상관에게 보고했다. 상관은 잠시 침묵하다가 황궁으로 향했다.

* * *

이 소식은 황제에게 바로 전달되었다.

월씨 저택에 불이 났는데 누군가 고의로 방화한 거로 의심된다. 방화자들은 정의감이 넘치는 무림인에게 살해당한 듯하다.

황제는 이반반에게 조계안을 불러오라고 했다.

“최근 강호인들이 수도에 들어왔느냐?”

“보아하니 황형께서도 소식을 받으셨군요.”

조계안은 간발의 차이로 황제가 부르기 전에 월씨 저택의 소식을 들었다. 이반반이 그를 찾았을 때, 그도 마침 난각으로 오는 길이었다.

“강호인들이 한 일이 맞느냐?”

황제가 다시 물었다.

조계안은 황제의 맞은편에 앉아 데면데면하게 말했다.

“황형께서는 누가 월령안의 집에 불을 질렀을지에 더욱 관심을 가질 줄 알았는데요. 누가 불을 질렀을까요?”

“월령안의 집에 누가 불을 질렀지?”

황제는 조계안을 말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라 되물었다.

“저는 월령안이 스스로 불을 지른 것 같습니다.”

조계안은 실눈을 뜨고 있었다. 길고 좁은 눈매는 사악한 기운이 떠올라 있었다.

“월령안이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 혹시 어디 아픈 게 아니냐?”

황제도 금군의 보고를 처음 들었을 때는 같은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조계안이 이렇게 말하자, 되려 믿을 수가 없었다.

조계안은 황제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자기 말만 계속했다.

“너무 딱 맞아떨어지잖아요. 저택의 하인을 다른 곳으로 옮긴 다음 곧바로 불이 났어요. 이게 너무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글쎄 말이다. 또 반면 누군가 월령안이 저택의 하인들을 모두 데리고 간 것을 보고, 월씨 저택에 불이 나도 불을 끌 사람이 없음을 알고 오늘 밤에 손을 썼다고도 할 수도 있잖느냐.”

그 ‘누군가’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 황제는 짐작 가는 바가 있으나 말하려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저는 월령안이 불을 질렀다고 확신합니다.”

조계안은 손가락 하나를 들더니 황제 앞에서 흔들거렸다.

“황형, 기억하시죠. 소씨 가문에서 월령안이 사적으로 병기를 소장하고 있다고 고발했었잖아요? 지금 월씨 저택이 저 모양으로 타 버렸는데 그 죄가 성립되겠습니까?”

“과연 상인답게 간사하구나.”

황제는 표정을 굳히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이건 결단성이 있고 영리하다고 해야 합니다.”

조계안은 손가락을 거두며 더는 그 화제를 이어 가지 않았다.

“그 검은 옷을 입은 사사들이 의심스럽습니다. 황형…….”

“폐하, 대장군이 밖에 왔습니다.”

그때, 이반반이 갑자기 들어와 조계안의 말을 중단했다. 그러자 조계안이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사흘 동안 집에서 반성하는 게 아니었나? 오늘이 사흘째인데, 육장봉은 뭐 하러 왔다더냐?”

“됐다. 장봉이가 아침 일찍 입궁한 걸 보니 중요한 일일 것이다.”

황제는 말을 아끼라는 뜻에서 조계안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조계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중요한 일이요? 월령안에게 중요한 일이겠죠.”

황제의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반반에게 어서 육장봉을 들이라고 했다.

“신, 폐하를 뵙습니다.”

육장봉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황제는 손을 흔들어 육장봉에게 예의를 차리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자리를 권한 다음 물었다.

“장봉아, 무슨 일이냐?”

“송취 골목에서 죽은 그 사사들은 잠한성이 훈련한 사사입니다. 현장에 떨어진 그 강호령은 수횡천의 말에 따르면 동산파(峒山派)의 것입니다. 동산파의 장문인(長門人)와 수횡천은 제법 교분이 있는데, 그자는 수횡천이 잡힌 걸 알고 어젯밤에 변경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육장봉은 조계안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는 계속 자신을 쏘아보는 조계안의 눈초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황제는 비웃었다.

“그래서 그들이 월씨 저택 주변에 나타난 게 우연이란 말이냐?”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육장봉은 모호하게 한마디로 대답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싶었다.

조계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육장봉이 언제부터 이렇게 영리해졌을까. 책임을 떠넘길 줄도 알고.”

“증거가 없습니다.”

육장봉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조계안은 능글맞게 말했다.

“내 기억으로 황형께서 너더러 사흘 동안 집에서 반성하라고 했던 거 같은데? 오늘이 사흘째 되는 날이야.”

“일에는 경중과 완급이 있습니다.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육장봉은 황제에게 포권했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공무가 중요하지.”

황제는 경고하듯 조계안을 다시 한번 노려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육장봉을 바라보더니 마치 조계안처럼 능글맞게 웃었다.

“나중에 배로 벌충하거라.”

육장봉은 변명하지 않고 대답했다.

조계안은 곧 신나서 손을 들고 말했다.

“황형, 고발합니다. 육장봉은 어제 온종일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의 고발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황제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장봉이는 짐을 대신해 일을 처리하러 갔었다.”

“일 처리요? 무슨 일을 처리했는데요? 둘 사이에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조계안은 황제와 육장봉을 번갈아 보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사전에 삼황자 야율헌일과 접촉하라고 했다.”

황제도 조계안을 속이지 않고 바로 알려 주었다.

“이번 북요 사절단의 총책임자는 대황자 야율융진입니다. 야율융진은 배후 세력뿐만 아니라 개인의 능력도 강해서, 야율헌일에게는 승산이 거의 없습니다.”

조계안이 일깨워 주었다.

“그게 짐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짐은 양국 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원칙에 따라 삼황자를 조금 도와주려는 것뿐이다. 그자가 이겨도 짐에게는 이익이 없고, 져도 짐은 잃을 게 없다.”

황제는 내란으로 휘청거리는 북요를 원할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누가 황위에 오르든, 주나라에게는 똑같았다.

비록 삼황자 야율헌일이 반은 주나라 혈통이라고 해도, 북요의 황위에 오르면 주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맞설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황제는 개인 한 사람만이 아닌, 그 뒤에 있는 나라와 귀족의 이익도 대표하기 때문이다.

야율헌일이 정말로 황제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 자리를 공고히 하고 싶다면, 그 역시 북요의 역대 황제들과 똑같이 굴 것이다.

조계안은 황제의 말에 눈을 부라렸다.

“됐습니다. 군신 둘이서 큰 판을 짰으면 둘이 알아서 하시지요. 저를 끌어들이지만 않으면 됩니다. 우리는 월씨 저택 방화 사건과 그 흑의(黑衣) 사사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죠.”

조계안은 팔걸이를 두드렸다. 둘 다 자신의 말을 경청하라는 신호였다.

황제는 반대하지 않았다. 육장봉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계안만 바라보았다.

조계안이 물었다.

“육장봉, 아까 골목에서 죽은 사사가 잠한성이 키워 낸 사람이라고 했지?”

“맞아.”

육장봉은 조계안을 힐끗 훑어보았다. 마음속으로 조계안이 무엇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협조하기로 했다.

“황형, 누가 이 사람들을 움직였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조계안이 어두운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대답하기 전에 조계안은 또 말을 이었다.

“청희 장공주는 황궁에 있습니다. 얼굴 때문에 죽네 사네 하는 판이라 그럴 정신도 없고, 황궁 밖으로 소식을 보내 사사에게 명령을 내릴 재간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청희 장공주에게는 동기가 없다는 게 중요합니다. 만약 사사를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그냥 월령안을 죽이라고 했을 겁니다.

그리고 잠한성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곳에는 육장봉을 제외하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영녕후는 아직도 형부에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청희 장공주와의 관계로 보건대, 영녕후가 만약 사사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명령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청희 장공주와 마찬가지로 동기도 없고요.

수횡천은 사사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 역시 감옥에 갇혀 있으므로 그들에게 연락할 수 없습니다. 수횡천이 그들과 연락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자의 의협심으로는 그들더러 자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할 리가 없습니다. 청희 장공주가 부탁하지 않고서야, 월령안에게 손을 쓰라고 명령할 리는 더더욱 없겠지요.”

조계안은 말을 마치더니 비웃듯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형, 청희 장공주와 관계가 있는 남자는 한둘이 아닙니다. 잠한성이 청희 장공주를 위해 훈련한 사사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또 누가 있겠습니까?”

“……네 뜻은 알겠다.”

‘웬일로 계안이가 갑자기 월령안에게 불리한 소리를 하나 했더니, 결국 이걸 노린 거였군.’

황제가 조계안을 노려보았다.

“혹시 월령안일 수도 있잖느냐? 수횡천이 월령안에게 그 사사들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잖느냐?”

“황형,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마세요. 잘 알잖아요. 수횡천이 보호하려는 건 주인을 인지한 사사가 아니라, 아직 주인을 인지하지 못한 채 훈련 중인 사사입니다.”

한 번 주인을 인지한 사사는 죽지 않는 한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을 누가 감히 살려 둘 수 있겠는가.

수횡천이 정을 중요하게 여기긴 해도, 그렇게까지 어리석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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