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가족이 있는 곳이 집
“알겠소. 내가 영영에게 전하리다. 시간이 늦었으니 당신이 가는 길을 더는 잡지 않겠소.”
유경장은 한숨을 지으며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자기가 그 기녀들을 감싸는 게 옳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영의 수심에 잠긴 모습을 떠올리면 또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월령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유경장이 또 서둘러 한마디 했다.
“참, 당제와 초성이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고 했소. 그들은 어제 가족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갔소. 그들에게는 당신에게 일이 생겼다는 말은 하지 않았소.”
월령안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도 요 며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녀의 소식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너무 제한적이었다.
그는 너무 힘이 없었다. 월령안에게 일이 생기면 도와주기는커녕 소식조차 제대로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월령안은 잠깐 생각하다가 결국 한마디 건넸다.
“이 시간이면 당신도 성에 들어가기는 늦었죠. 강가에 작은 장원이 하나 있으니 거기서 하룻밤 쉬고 가세요.”
“좋소.”
유경장은 눈을 내리깔아 눈 속의 실망을 숨겼다.
월령안은 그를 명월산장에 초대하지 않았다.
‘결국 령안을 실망하게 했구나.’
월령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마차로 걸어갔다.
유경장은 버려진 커다란 개처럼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는 자신의 말 옆으로 묵묵히 걸어가서 고삐를 잡더니, 월령안이 마차에 오르고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로 그때, 월령안이 마차 창밖으로 몸을 내밀며 유경장에게 손을 흔들었다.
“과거가 당장이에요. 준비 잘하세요. 당신이 말을 타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 날을 기다릴게요.”
주나라에서는 과거 합격자 중 일등에서 삼등까지는 말을 타고 거리를 돌아다닐 자격이 있었다. 유경장에 대한 그녀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유경장의 눈이 삽시간에 광채를 뿜었다. 그는 기뻐서 껑충 뛰었다.
“알겠소. 지금 당장 가서 공부하겠소!”
월령안은 웃으며 마차에 도로 앉았다.
정 부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도 참. 마음이 그렇게 약하면서도 입만 살아서는 인정하지 않는구나.”
“마음이 약한 게 아니에요.”
잠깐 사이에 월령안은 얼굴의 미소를 거두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약하지 않다고?”
‘마음이 약하지 않긴. 상대방이 의기소침해진 것을 보고 자신의 기분도 별로 좋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해 격려했잖아?’
“저 사람은 유씨예요.”
월령안의 얼굴에는 엷은 웃음기가 떠올랐다.
“응?”
정 부인은 월령안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제 어머니도 유씨거든요.”
월령안은 창에 기대어 낮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예전에 친척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대요. 능력이 닿으면 당연히 친척들에게 보답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저는 어머니 딸이니까요. 어머니께서 못 하신 일을 제가 대신하는 거예요.”
“얘도 참…….”
정 부인은 눈시울이 붉어져 아무 말도 못 했다.
‘애가 참 딱하기도 하지.’
월령안은 웃어 보이고,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부는 가는 내내 채찍질을 했다. 그러나 가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일행이 명월산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하늘이 어두워져 식사 시간이 지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명월산장에서는 아무도 젓가락을 들지 않고 월령안과 정 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가 멈추었다. 정 부인은 월령안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손을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정 부인은 의아하기만 했다. 마차에서 내려 화청에 들어가자, 월령안은 노인의 옆에 앉아서 환한 표정을 짓고 재잘거리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제야 정 부인은 월령안이 마차에서 왜 그랬는지 알게 되었다.
순간 정 부인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 월령안을 보니 너무 딱하기만 했다.
태어날 때부터 상냥하고 철이 든 사람은 없다. 특히 젊은 사람은 더했다. 자기를 귀여워해 주고, 아껴 주는 사람이 없는 아이만이 일찍 상냥해지고, 철이 든다. 그리고 늘 상대방을 위하려 한다.
‘만약 령안의 부모님께서 아직 살아 계셔서, 귀하게 자란 딸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
“부인, 울지 마시오……. 울지 말라니까…….”
정 장군은 어느새 정 부인 곁으로 다가와 어쩔 줄을 몰라서 하며 위로했다.
그의 목소리는 워낙 굵고 컸다. 그가 입을 열자마자 바로 이목이 쏠렸다.
정 부인은 화도 나고 짜증도 났다. 분위기를 띄우려는 월령안의 의도를 망칠까 두려워, 정 장군의 발을 사정없이 밟고 귀를 꼬집으며 욕했다.
“울기는 누가 울어요. 그냥 기뻐서 그래요. 기쁘다고요. 당신은 그것도 몰라요? 당신 그 눈썰미하고는. 나중에 당신 눈이나 치료하게 손 신의더러 약이나 좀 지어 달라 해야겠네요.”
“아이고, 아이고…….”
정 장군은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정 부인이 귀를 꼬집기 편하도록 고분고분 무릎을 굽혔다.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걸 잊지 않았다.
“부인, 좀 그만, 좀 살살 하시오. 그렇게 꼬집다가 손이 아프면 어쩌려고 그러오.”
월령안은 정 장군 부부가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보았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노인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영감님, 있잖아요……. 저도 나중에 제가 귀를 꼬집어도, 꼬집는 제 손이 아플까 걱정해 주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노인은 월령안을 흘겨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마 못 찾을 거야. 왜냐하면 넌 키가 너무 작거든. 그 사람 귀를 꼬집기 어려울 거야.”
“영감님……. 그러고도 제 사부가 맞나요!”
월령안이 뾰로통해서 말했다.
노인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네 사부가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말이냐? 봐라, 네 키가 작지 않으냐?”
“전 정 부인과 키가 엇비슷하거든요. 정말이에요!”
월령안은 일어나서 살금살금 발돋움하더니 손으로 키를 재어 보였다.
노인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꼬마 령안이 키가 컸구나. 며칠 전보다 많이 컸어.”
“제가 작지 않다고 말했잖아요.”
월령안은 폴짝폴짝 뛰어 노인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퀴 의자를 밀더니 식탁으로 갔다.
“자자, 식사하러 가요. 배가 고프다고요. 정 장군과 정 부인은 사랑이 있으니까 물만 마시고도 배부르시겠지만, 저는 안 되거든요.”
“서둘러라! 너희를 한참 동안 기다렸더니 나도 배고파.”
손 신의도 한쪽에서 소리쳤다.
정 부인은 몰래 훑어보았다. 자기 눈물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고, 모두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야 정 장군을 놓아주었다.
식탁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떠들썩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난 뒤, 정 장군과 정 부인은 눈치 빠르게 정 낭자와 함께 있겠다며 처소로 돌아갔다. 손 신의도 정 낭자를 진찰한다는 이유로 물러가며, 노인과 월령안만 있게 해주었다.
“가자, 나를 데려다 다오.”
노인은 월령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
월령안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노인의 바퀴 의자를 느긋하게 밀며 노인의 처소로 갔다.
처소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왔다. 월령안은 바퀴 의자의 손잡이를 하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서둘러 떠나지 않고, 노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영감님, 아무것도 안 물어보세요?”
노인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을 내밀어 월령안의 머리를 다독였다.
“어린 매가 자랐으니 스스로 나는 것을 배워야지. 두려워하지 마라. 밑에 무엇이 있든 늙은 매가 받아 줄 테니까.”
그가 키운 아이는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이 아이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었다.
“영감님, 감사해요.”
월령안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노인의 무릎에 기댔다.
“영감님이 있어 너무 좋아요.”
노인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안의 월씨 저택 방향을 바라보았다.
가족이 있는 곳이야말로 집이다.
성안의 월씨 저택은 그저 집 한 채일 뿐이었다.
* * *
쾅!
큰불이 하늘 높이 솟구치며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췄다.
“불이야! 불이야!”
누군가 고함을 지르자, 송취 골목 전체가 순간 들썩였다.
여러 집에서 등불을 켰다. 하나하나 밝혀진 불빛이 선으로 이어지자, 은하수의 별처럼 밤의 어둠을 걷어냈다.
기척을 들은 집에서는 너도나도 등롱을 들고 밖에 나가 무슨 일이 생겼는지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집을 나서기도 전에 하늘 높이 치솟는 불길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손에 든 등롱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다가, 정신을 차리고 덩달아 소리쳤다.
“월씨 저택이다. 저 방향은 월씨 저택이야! 월씨 저택에 불이 났어! 다들 빨리 도망쳐!”
“정말 어마어마한 불이군……. 빨리, 돈 되는 거 챙기고 도망쳐.”
당황스러움은 전염된다. 첫 집이 부랴부랴 달려 나간 다음 나머지 집에서도 뒤따라 밖으로 달아났다. 큰불이 자기 집에 옮겨붙을지, 안 붙을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불 꺼! 어서 불을 좀 끄자고!”
모두가 달아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달려가 물을 길어 월씨 저택에 퍼부었다. 하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서 물 한 통, 한 통은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마찬가지였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불꽃을 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불이 참 이상한데. 봐봐, 위로만 타잖아. 옆으로는 안 번져. 이상하지 않아?”
어떤 용감한 사람은 골목을 뛰쳐나오던 중 뒤돌아보았다. 순간 이상하게 여겨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가 소리치자, 필사적으로 밖으로 달려나가던 많은 사람이 뒤따라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정말이네. 저 불은 위로만 타는군. 이렇게 큰불이 났는데, 왜 이웃집은 멀쩡하지?”
“이상하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먼.”
목숨을 건지려고 달아나던 사람들이 불길이 자기네 집까지 미치지 않고 점차 잡히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골목에서 또 돼지 멱따는 듯한 고함이 들려왔다.
“내 돈! 이런 망할 놈,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도둑이 들었어!”
“도둑이야! 도둑이 들었다! 여봐라, 도둑을 잡아라!”
송취 골목에는 부자나 귀족들의 집이 늘어서 있었다. 이 골목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마차로 드나들고 집에도 하인을 두었다. 송취 골목에서 불이 나자, 누군가 어수선한 틈을 타 도둑질하려고 잠입했다.
혼란한 가운데 여러 집이 도둑을 맞았다. 또한 직접 물건을 빼앗은 사람도 있었다. 골목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월씨 저택의 불길이 이상한지 어떤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군이 병사를 이끌고 왔을 때, 월씨 저택의 큰불은 아직도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은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세졌다.
그러나 골목 주변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불길이 자기 집에는 미치지 않자, 밖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도둑이 이 틈을 타서 쳐들어올까 두려워 하인을 보내 대문을 지켰다.
금군은 날라 온 모래흙을 최대한 빨리 월씨 저택 앞에 쏟아 놓고 불길을 막았다.
금군을 지휘하던 대장은 손이 가는 대로 구경꾼 한 사람을 잡아 물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가? 이렇게 큰불인데 왜 불을 끄는 사람이 없는가?”
“그게…… 아무도 없습니다! 월씨 가문 사람들은 누군가 와서 모두 데려갔습니다. 집에 사람이 없으니까 이 불이 난 겁니다. 나리, 이 불은 안쪽에서 번진 거라, 저희와는 상관없습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속으로 재수가 없다고 탄식했다.
‘금군에게 붙잡히다니, 재수가 없군. 왜 하필 나한테 난리람?’
“아무도 없는데 집 안에서 불이 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