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누구 덕분인지 잊었나요?
육장봉은 월령안의 자백을 몇 번이나 다시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월령안의 자백에는 많은 정보가 들어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열한 살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의 자백을 통해 보면, 그녀와 소씨 가문과의 관계는 열한 살 되던 해 완전히 틀어진 듯 했다.
“대체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황제도 칠 년 전에 황궁 밖에서 변을 당했다. 황제와 같은 일을 당한 사람 중에는 몇몇 문신의 아들도 있었다.
‘일이 너무 공교롭군. 모두 칠 년 전인데?’
“육일!”
육장봉은 월령안이 열한 살 되던 그해, 분명 중요한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반드시 확실하게 조사해야 했다.
“장군.”
육일은 문을 열고 들어와, 육장봉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서 칠 년 전에 월령안과 소씨 가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해라.”
육장봉은 손에 든 자백서를 육일 앞에 던져주었다.
“네, 장군.”
육일은 자백서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막 한 걸음 떼었을 때, 육장봉이 다시 불러 세웠다.
“잠깐, 자백서를 가져와라.”
그는 방금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간과한 듯했다.
“네, 장군.”
육일은 자백서를 육장봉에게 올리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육장봉은 자백서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절연장! 이제 알겠군. 당신은 소 승상에게 손을 쓰라고 암시한 거였어. 참 여우 같다니까. 소 승상이 손을 쓰는 순간, 당신 저택에 숨겨 둔 병기에 대한 증거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겠지. 월령안, 정말 영리해.”
육장봉은 월령안이 공당에서 한 말을 한마디, 한마디를 다시 한번 보았다. 그의 웃음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머리가 참 빨리 돌아가는 여인이야. 이번에는 소 승상도 된통 당하게 생겼군.”
월령안이 많은 말을 했지만, 사실 모든 중점은 절연장에 있었다. 그녀의 죄를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도 절연장이었다.
만약 그녀에게 절연장이 없다면, 이번 사건을 뒤집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소 승상은 어떻게 나올까?
설령 소 승상이 손을 쓰지 않아도, 월령안은 소 승상이 ‘손을 쓰게’ 할 것이다.
육장봉은 그 광경을 떠올리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가올 내일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 * *
월령안과 정 부인은 성문이 닫히기 전에 성문 입구에 이르렀다. 일행은 검사를 마치고 재빨리 성을 빠져나갔다.
성을 나가자마자 마부는 날이 어둡기 전에 명월산장에 도착하려고 속도를 올렸다.
말이 빨리 달리자 마차는 심하게 흔들렸다. 월령안은 잠을 잘 수가 없어 마차 안의 손잡이를 잡고 몸을 가누었다.
다행히 마부는 노련했다. 마차가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안정적이었다. 월령안은 곧 적응해서 멀미하는 정 부인을 돌봐 줄 수도 있었다.
차바퀴는 석양을 밟고 날 듯이 달렸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드문드문 외침이 들려왔다.
“마차를 세우시오! 마차를 세우시오!”
외침과 함께 다급하게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도 들렸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부르는 소리도 분명해졌다.
“정 장군 댁의 마차입니까? 세워 주시오……. 잠시만요.”
월령안과 정 부인은 마차 안에 있어서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 부르는 소리만 어렴풋이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마부는 소리를 조금 더 분명히 들었다. 힐끔 뒤돌아보고 위험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속도를 늦추고 큰 소리로 말했다.
“부인, 월 낭자, 뒤에서 누가 부릅니다. 소인이 보기에는 젊은 서생 같아 보입니다.”
마차가 속도를 늦추자, 뒤에서 사람이 쫓아왔다.
“멈춰 주시오! 제발 잠깐 멈춰 주시오. 저는, 저는…… 유…… 유경장입니다.”
“어, 유 공자시랍니다.”
유경장의 명성은 온 변경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마부는 듣자마자 바로 마차를 세웠다.
“너를 찾으러 왔구나.”
정 부인은 학자 가문 출신이었다. 유경장을 알고 있음은 물론, 그의 사를 읽어본 적도 있었다.
정 부인은 유경장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았다. 유경장이라는 말을 듣고, 월령안에게 눈을 깜빡여 보였다.
월령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유경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그건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얼마 전, 춘일연에서 유경장은 많은 사람 앞에서 그녀에게 청혼했었다. 자기가 유경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들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부인,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깐 만나고 올게요.”
월령안은 선뜻 말하고는 바로 마차에서 내렸다.
“령안, 드, 드디어 따라잡았군.”
유경장이 황급히 말에서 내렸다.
너무 서둘러 쫓아와서인지, 아니면 몸이 너무 약해서인지, 그는 땅에 발을 딛자마자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때 유경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월령안이었다. 그녀는 생각하지도 않고 달려가 유경장을 부축했다.
“조심하세요.”
유경장은 휘청거리더니 월령안의 품으로 넘어졌다. 순간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령안, 미안하오. 난…….”
오히려 월령안은 유경장을 선뜻 받쳐 주며, 제대로 서게 부축했다.
“괜찮아요. 똑바로 서세요.”
마차 안에 있던 정 부인도 그 광경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생은 이래서 안 되겠군. 몸이 저렇게 허약해서 어째. 위험에 닥치면 령안이가 되려 보호해야 할 판이네. 령안이가 유 공자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망정이야. 아니었으면 고생깨나 했겠어.”
마차 밖, 숨을 고르고 몸을 추스른 유경장은 원래의 품위를 회복했다. 다만 안색이 좀 어두워졌을 뿐이었다.
그는 월령안과 인사말을 나눌 새도 없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령안, 영영이 당신에게 전해달라고 했소. 행화루의 기녀 몇 명이 매수당했다 하오. 그들이 나서서 당신이 양갓집 여인을 핍박해 기녀로 만들고, 양민을 매매했음을 증언할 거라고 하오. 영영이 설득할 방법은 생각해 봤지만, 모두가 말을 들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하오. 몇몇은 욕심이 커져서 영영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오.”
“요즘 행화루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월령안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기루의 기녀들을 박대한 적도, 그녀들에게 돈을 벌라고 핍박한 적도 없었다고 자신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떻게 배신할 수가 있지?’
“얼마 전 행화루에 글재주가 뛰어난 서생 몇 명이 왔었소. 그들은 갖은 방법을 다해 기녀들을 구슬려 마음을 얻었다오. 게다가 유명세가 꽤 있는 몇몇 사람이 기녀들에게 과거에 급제하면 정실로 맞아들이겠다고 약속까지 했다고 하오.”
유경장의 어두운 얼굴에 우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고 씁쓸하게 말했다.
“령안, 당신도 알 거요. 기루의 기녀들은 다들 팔자가 기구하오. 꿈에서라도 정실로 당당하게 시집가고 싶어 하오. 그런데 앞길이 창창한 서생이 정실로 맞아들이겠다고 하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지.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오. 이런 상황에서 그 서생이 그들에게 나서서 당신을 지목하라고 하잖소. 아마 영영이도 막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그 서생 중 둘은 내가 데리고 갔는데, 그들이……. 령안, 정말 미안하오.”
유경장은 고개를 숙이고 감히 월령안을 쳐다보지 못했다.
‘령안에게 일이 생겼는데 도와주지 못하고 도리어 번거롭게 만들다니. 령안을 볼 면목이 없구나.’
“당신과는 상관없어요.”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눈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일단 알겠어요. 영영에게 전해 주세요. 제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도, 화를 내지도 말라고요.
저를 배신하고, 저를 지목하려고 나서는 기녀들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고 하세요. 걔들도 이제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영영이가 걔들까지 한평생 돌봐 줄 수는 없는 거예요.”
‘재자(才子)와 가인(佳人)의 운명적인 사랑? 이 세상에 무슨 재자와 가인의 미담이 그렇게 많겠어.’
그 기녀들은 많은 고생을 겪었다. 그 잘난 서생들에게 마음도, 재물도 다 빼앗긴 자매들도 많이 보아 왔다.
월령안은 그 기녀들이 서생들의 속내를 모른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그녀를 팔아먹어 그들의 정실 자리를 얻으려 한다.
정말 값싼 사랑이었다. 은혜에 고마워하는 마음도 저렴하기 그지없었다.
“령안…….”
월령안의 말에서 살기가 느껴지자, 유경장이 불안하게 불렀다. 그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월령안의 안색이 굳어졌다.
“왜요? 걔들을 감싸 주려고요?”
“아니오…….”
유경장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여전히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그들도 불쌍한 사람들이오. 그저 떳떳하게 살고 싶어 할 뿐이오. 당신이…….”
“그들이 불쌍한 게 저 때문인가요? 그들이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는 게 제 탓인가요? 전 그 애들에게 보통사람처럼 살 기회를 주었어요. 돈을 가지고 나가서 평범하게 살라고 했다고요. 그게 싫으니까 자발적으로 행화루에 남은 거예요.”
월령안은 유경장의 말을 가로채고 냉랭하게 말했다.
“유경장, 그들이 행화루에서 마음대로 손님을 고를 수 있고, 몸을 팔지 않아도 되는 게 누구 덕분인지, 혹시 잊었나요? 바로 저예요. 제가 엄청난 돈을 들여 행화루의 운영을 뒤에서 받쳐 주었고, 제가 그 애들을 여태껏 보호했다고요.
행화루는 몇 해 동안 계속 손해를 보다가 최근에야 겨우 수입이 생겼어요. 그런데 제가 언제 그 애들을 박대했단 말인가요? 줄곧 먹여 살려 주지 않았나요? 이 몇 년 동안, 행화루의 기녀들을 부러워하는 변경 기루의 기녀가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월령안은 여기까지 말하자, 저도 모르게 자조하고 말았다.
“작은 도움은 은혜로 여기지만, 큰 도움은 원한으로 여긴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요. 딱하게 여겨 돈을 써가며 먹여 살렸더니, 공공연히 배은망덕한 것들을 키워냈군요.”
“령안, 나는 그들의 편을 들려는 게 아니오. 다만 그들에게 살길을 남겨 주시오. 팔지만 말았으면 하오. 영영이도 옛 자매가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거요.”
유경장도 오기 전에 받은 영영의 부탁을 떠올리자 난감했다.
월령안은 화가 나서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은 저한테 그 애들에게 살길을 남겨 주라고 하네요. 그런데 그 애들은 저한테 살길을 남겨 주었나요? 기껏 구해 주었더니 남자 때문에, 고작 정실로 들이겠다는 그 약속 때문에 나를 배신하고 뒤에서 칼을 꽂겠다잖아요. 참 우습지 않아요?”
그녀는 원수의 예리한 검을 증오한 적은 없었다. 그보다는 같은 편이 등 뒤에서 꽂는 칼을 증오했다.
원수가 찌른 칼이라면 아무리 깊이 베이더라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편이 찌른 거라면, 아무리 가벼운 상처라도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유경장의 난감함을 외면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차갑고 오만한 자세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죄송해요. 저는 당신네처럼 그렇게 위대하지 않네요. 남에게 배신당하고서도 용서해 줄 수는 없어요. 영영에게 말해 주세요. 난처하거든 이 일에는 상관하지 말라고요.”
원수도, 자기를 배신한 사람도 놓아줄 수 없었다.
그녀를 배신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 모두에게 반드시 보여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