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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87)화 (387/1,004)

387화 만에 하나가 무서워요

“이렇게까지 말하고, 게다가 승상께서 말씀하시는데, 내가 안 된다고 할 수나 있겠느냐?”

유칙은 화가 잔뜩 났다. 연신 손사래를 치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보내. 내보내 줘! 나중에 월씨 가문 쪽에서도 누가 찾아오면 같이 풀어줘라.”

“대인, 월씨 가문은 안 오겠죠?”

부승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안 와?”

유 대인은 냉소했다.

“정서 저택의 문까지 가로막았다며? 그런데 안 오겠어? 두고 보게. 소씨 가문 아가씨가 나가는 순간, 바로 누군가 와서 월령안을 데려갈 테니까.”

“월령안은 혈혈단신 아닙니까. 최 대인이나 다른 분들이 돕고 싶다고 해도 이유가 없잖습니까.”

부승은 그래도 믿지 않았다. 유칙은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두고 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 질 무렵 정 부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우리 집 딸애가 요 며칠 너무 야위었어요. 하루종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네요. 얘가 월 언니를 꼭 만나고 싶어 하니 대인께서 편의를 좀 봐주셨으면 합니다. 월 낭자가 우리 딸을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 낭자의 보증인이 되겠습니다. 만약 월 낭자가 도망치거든 저를 잡아가세요. 각서까지 다 써서 가지고 왔어요. 보세요, 이러면 되겠지요?”

정 부인이 나서서 월령안을 보석하러 간 것은 최일과 장군왕이 의논한 결과였다.

두 사람은 소씨 가문에서 소여방의 혼사를 이유로 소함연을 빼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즉시 정씨 가문에 사람을 보내 자신들의 생각을 정 대공자와 이공자에게 들려주었다.

정씨 가문 두 도련님은 예전에는 확실히 월령안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월령안이 신의에게 부탁해 정 낭자의 병뿐만 아니라 정 장군의 고질병까지 고쳐 주자, 이제는 월령안을 누이동생, 아니, 누님으로 여겼다.

그들은 이젠 월령안을 친누이처럼 여겼다. 그들 가문에서 월령안을 보증하는 것은 물론, 그들더러 월령안을 위해 목숨을 걸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정 부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월령안은 이미 자신의 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월령안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성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체면도 돌보지 않고, 정서 저택의 문밖을 막아서서 정서를 만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부인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순천부로 달려와 월령안을 보석하려 했다.

부승은 잠자코 있었다.

이젠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여하튼 유 대인의 분부가 있었으니 그에 따르면 그만이었다.

부승은 정 부인을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즉시 사람을 시켜 월령안을 데려오라고 했다.

‘우리 순천부 감옥이 월 낭자에게는 객잔이랑 똑같구먼. 하룻밤 신기한 경험을 해 봤으면 충분하지.’

관졸이 곧 월령안을 데리고 나왔다. 정 부인은 월령안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그녀의 손을 붙들더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령안아, 놀라 죽는 줄 알았다. 괜찮니?”

“부인께 폐를 끼쳤습니다. 전 괜찮아요.”

그녀는 정말로 괜찮았다. 최씨 가문 하인이 그녀를 잘 보살펴 주었다. 게다가 공당에서 손해를 보지도 않았다.

단지 열한 살 때의 일이 떠올라 좀 불쾌할 뿐이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감옥에 갇혔는데 뭐가 괜찮겠어. 얘가, 남 생각만 할 줄 아는구나.”

정 부인은 눈시울을 붉혔다.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어느 집 딸이 귀하지 않아서 이런 고생을 한다더냐. 우리 령안이가 이번에 정말 욕봤어.”

정 부인은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후드득 흘러내렸다.

“부인, 울지 마세요. 전 정말 괜찮아요. 보세요. 멀쩡하잖아요.”

미인의 눈물 흘리는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워 아무리 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그 눈물이 자기 때문에 흘리는 것은 아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슴이 아파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정 부인이 슬프게 울자, 월령안은 연신 정 부인을 위로했다.

“대공자와 이공자가 보내주신 여병들이 일을 정말 잘했어요. 감옥을 어찌나 깔끔하게 정리했는지, 제가 장사하면서 다니던 객잔보다도 더 편했다니까요. 부인, 우리 같은 미인은 눈물을 두 방울만 흘리면 돼요. 계속 눈물을 흘리다가는 눈이 빨갛게 되고, 그러면 덜 예쁠 거예요.”

“예쁜 게 무슨 대수라고. 얘가 사람을 어르는구나.”

정 부인은 월령안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결국 눈물도 그쳤다.

정 부인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부승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실례했네요.”

“부인,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승은 정 부인이 월령안과 모녀처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감탄했다.

‘월 낭자는 능력이 대단하군. 정 부인이 손아랫사람처럼 생각해서 돌봐 주려고 하잖아.’

이건 정씨 가문에 의원을 소개해 준 것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월령안이 손 신의를 설득해 정 낭자를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이는 기껏해야 정씨 가문이 그녀에게 신세를 진 정도였다.

정 부인이 월령안을 손아랫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월령안이라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 분명했다.

정 부인은 안목이 높기로 유명했다. 어지간한 사람은 그녀의 눈에 차지 않았다.

정서 장군의 부인과 몇몇 딸은 정 부인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정말 많이 썼다. 그러나 정 부인은 미소 한 번 지어 준 적이 없었다.

‘월 낭자가 정 부인의 눈에 들다니. 확실히 뭔가 범상치 않은 데가 있는 모양이군.’

정 부인은 월령안을 보석하고, 정씨 가문 여병들을 풀어 달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일은 모두 철없는 제 아들 녀석들 때문이에요. 아들 녀석들이 집에 있는 귀중품을 제가 따로 챙겨 둔 걸 모르고 하인들이 도둑질한 줄 안 겁니다. 확인도 하지 않고 흥분해서 관아에 신고하고 잡아가라고 소란을 피웠네요.

저희 집 하인들은 물건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대인께서 편하실 때 풀어주세요.”

정 부인은 감정을 가라앉히자, 곧 모범적인 귀부인으로 거듭났다. 원만한 처사로 순천부의 체면을 제대로 살려주었다.

정씨 가문 여병이 왜 감옥에 들어왔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사건을 조사한다고 한들 별로 알아낼 것도 없었다.

그래도 순천부의 체면을 살려주느라, 정 부인은 당장 사람을 풀어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부승도 실랑이하기 싫어서, 절차를 밟으면 사람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대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세요.”

정 부인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일을 다 처리하고 나서 월령안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네 저택은 지금 봉쇄되어서 그곳에서는 지내지 못할 거야.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귀염둥이의 처소에서 지내려무나. 누가 감히 우리 집에 쳐들어와서 너를 데리고 가는지 두고 보겠어.”

“부인, 연극을 하려면 끝까지 하셔야죠. 마침 저도 영감님을 뵙고 싶어요. 우리 그냥 명월산장에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월령안은 정 부인의 호의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정 부인은 실망했지만, 월령안을 이해했다. 그래도 얼굴에는 여전히 약간의 언짢음이 서려 있었다.

‘내가 령안이를 도와주려고 해도 할 게 없네. 령안이 재주가 너무 뛰어나. 그렇게 많은 사람이 령안이를 보증하겠다고 나섰는데도 꺼내질 못했지. 그런데 령안이가 공당에 한 번 나가더니 소씨 가문이 움직이게 하고, 자기도 감옥에서 나오게 됐잖아. 령안이가 너무 뛰어나니까 우리가 너무 쓸모없어 보이네.’

정 부인은 몹시 낙심했다. 마차에 타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이 모습을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부인,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정 부인은 곧 정신을 번쩍 차렸다.

“무슨 일이야. 령안아, 어서 말해! 나한테 맡겨라.”

“부인께 폐를 끼쳐야겠네요. 저희 집 하인들을 모두 데리고 나와 주세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이 일이 번거롭기는 하지만, 어렵지도 않았다. 월씨 저택의 하인들은 그녀에게 연루되었다. 하지만 감옥에 갇히지는 않아서 지금은 모두 자유의 몸이었다.

“그야 쉬운 일이지. 내가 지금 사람을 불러…….”

정 부인은 생각하지도 않고 반쯤 말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잠깐, 순천부에서는 너희 집 하인들을 가두지 않았잖아. 주인인 네가 무사하니 그들도 무사할 거야. 그런데 서둘러 다른 데로 보내려 하다니,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월령안은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공당에서 소 승상과 우리 어머니의 절연장을 갖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가 갑자기 관아에 끌려오는 바람에 절연장은 지금 제 손에 없잖아요. 만약 누군가 그 절연장을 없애려면, 반드시 저희 집에 손을 쓸 거예요.”

“그럼 설마…….”

정 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여, 여긴 천자께서 계신 수도인데, 그자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이냐?”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일개 상인일 뿐인걸요. 게다가 처음도 아니에요.”

“그래도 그건 아니지.”

예전도 월씨 저택이 두 차례 습격을 받았지만, 그때는 모두 특수한 상황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죽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수도에서 그런 일을 저지르겠는가.

“궁지에 빠지면 쥐도 고양이를 문답니다. 부인, 똑같아요.”

월령안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불분명한 목소리가 마치 무엇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 말을 듣자, 정 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잘한 것 같구나. 만에 하나란 게 있으니 말이다.”

“맞아요. 만에 하나가 무서워요.”

월령안은 조용히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아 눈 속의 차가운 빛을 가렸다.

이 일이 바로 그 ‘만에 하나’였다.

소 승상이 행동을 개시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소 승상이 ‘손을 쓰게’ 만들 것이다. 어차피 월씨 저택이 습격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황제는 누가 손을 썼는지는 조사해 내지는 못하더라도, 그녀를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자기만 알면 된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알 필요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두 사람이 아는 일은 비밀이라고 할 수 없었다.

가는 길 내내 월령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차에 기대어 잠깐 휴식을 취했다.

정 부인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피곤함을 보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를 낮추어 마부에게 마차를 천천히 몰라고 분부했다.

* * *

월령안이 감옥에서 나오자, 소식을 받아야 할 사람, 받지 말아야 할 사람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뜻밖으로 여기지 않았다.

소 승상이 딸을 데려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강수를 둔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한발 물러선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순천부윤도 월령안을 더는 가둘 수 없게 되었다.

육장봉은 장군부로 서둘러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듣고 잠시 침묵했지만, 곧 입을 열어 분부했다.

“월령안의 자백을 필사하여 내 서재로 보내라.”

“네, 장군.”

육이는 육장봉이 돌아오자 한시름을 놓았다. 즉시 그가 분부한 일을 처리하러 갔다.

이각 뒤, 육장봉은 목욕을 마치고 나와 책상 위에 놓인 자백서를 보았다.

재빨리 훑어보던 도중, ‘열한 살’이라는 글자에 눈길이 머물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고 싶지 않다…….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 건가,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괴로운 일들을 떠올리기 싫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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