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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82)화 (382/1,004)

382화 감방을 바꾸어 주세요

편지를 쥔 소영화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마음속의 불안감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말했다.

“각하, 이 일을 제가 인정하더라도 제게는 아무 이익도 없습니다.”

“내게 이익을 요구해?”

육장봉이 비웃었다.

“말해 봐라. 무엇을 원하느냐?”

소영화는 눈앞의 사람을 잘못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성급하게 요구하는 대신 하소연부터 했다.

“각하도 알고 계실 겁니다. 우리 북요는 지금 주나라와 담판을 하려 합니다. 만약 제가 주나라의 귀족 여인을 꼬드겨 군사 정보를 얻어냈다면, 주나라에 약점이 잡혀 담판에서 아주 불리해질 겁니다.”

“담판에 불리하다고?”

육장봉이 비아냥거렸다.

“전장에서 얻지 못한 걸, 담판에서 얻을 수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적어도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만약 그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 북요는 주나라에 끌려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저 때문에 북요가 담판에서 실패하면, 저는 북요로 돌아가서 폐하께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찾아온 이상 거절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더 큰 대가를 요구할 수는 있었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많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소 황후가 있는데 뭘 걱정하나?”

육장봉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무심코 한 말 같았다. 그러나 눈빛에는 예리한 한기가 스며 있었다.

소영화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시원스레 웃었다.

“제 성이 소씨지만, 소 황후와는 동본(同本)이 아닙니다. 소 황후가 어찌 저처럼 하찮은 인물을 위해 말을 하겠습니까.”

“과연 그럴까?”

육장봉은 비웃듯이 말했다.

소영화의 웃는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무슨 뜻입니까?”

“상장군의 싸우는 재주가 여인을 달래는 재간의 절반만 따라갔으면, 내가 신경을 써서 널 그 자리에 올려놓은 보람이 있었겠지.”

육장봉은 고개를 저으며 매우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소영화의 온몸이 굳어졌다. 준수한 얼굴에는 순간 살의가 비꼈다. 그는 뚫어지게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는 지금 손을 썼을 때의 승산을 몰래 가늠해 보았다.

그가 가늠을 끝내기도 전에 육장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딴 생각은 그만둬라. 역참의 호위를 전부를 합해도 내 적수가 못 되니까. 상장군,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다. 그냥 그대로 할 것인지만 말해라.”

육장봉은 묻기는 했지만, 소영화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나는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폐하께 해명할 수 없습니다.”

소영화는 소심하게 저항했다.

“그건 그쪽이 생각할 일이지.”

육장봉은 마치 개미를 보듯, 냉담하고도 오만하게 소영화를 보았다.

그는 소영화의 생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소영화가 알더라도 상관없었다.

소영화는 속이 갑갑했지만, 눈앞의 이 사람에게 약점을 잡혔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사람의 실력이었다. 아무리 불만이 많더라도 억지로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이 사람은 천만 대군 속에서 그의 큰형의 수급을 취한 사람이었다. 그로서는 이 사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소영화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까?”

“그렇다.”

육장봉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치 소영화가 그가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 끌어올린 북요의 상장군이 아니라, 길가의 거지와 다름없다는 태도였다.

소영화는 한순간 자기가 모욕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앞으로 더는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에 든 편지를 펼쳐 자세히 읽어 보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제가 꼭 잘 처리하겠습니다. 대신 그쪽도 약속을 지켜 앞으로는 저를 모른 척했으면 합니다.”

“좋다.”

육장봉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면서도 소영화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소영화의 눈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도 일어서며 말했다.

“각하,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으니 그쪽은 저에 대해 훤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각하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 이후로 서로 거래가 없겠지만, 성함은 알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당장 이 사람을 어찌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도 그러라는 법은 없지.’

이름만 알면, 언제든지 사람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좋다!”

육장봉은 비웃더니 걸음을 멈췄다. 소영화를 돌아보면서 우아하고 여유롭게 말했다.

“나는…… 남상권이다.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

말이 떨어지자, 육장봉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쿵!

그가 사라지자 북요 상장군 소영화는 자기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 * *

순천부 유칙은 황제의 심복이었다. 황제의 뜻을 짐작하는 데는 익숙했다.

그러나 소함연의 사건만큼은 황제의 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진상 파악을 원하시는 건지, 아니면 ‘조사를 통해’ 소함연의 결백을 증명해 황제의 현명함을 증명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황제는 소함연에게 혼사까지 내려 주었다. 만약 소함연이 정말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황제가 사람을 잘못 본 셈이 아닌가.

황제의 명성을 위해서라면, 소함연이 북요의 귀족과 왕래가 있었던 건 물론이고 설령 수많은 사람을 거친 기녀라 해도, 그녀를 정절을 지킨 열녀로 만들어 주어야 했다.

하지만 조금 전 황제가 확실하게 조사하라고 한 말은 진심인 듯했다.

게다가 황제와 육 대장군의 관계로 미루어 보아, 만약 소함연이 북요의 귀족과 남몰래 정을 통했다면 황제는 소함연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어쩌라는 걸까?’

유칙은 반나절이나 생각했지만, 도대체 황제의 뜻이 어떤 건지 알아낼 수 없었다.

황제의 뜻을 짐작할 수도 없는 와중에 감방은 사람으로 꽉 찼다. 유칙은 당장 소함연을 어디에 가둬야 할지도 좋을지 몰랐다.

유칙은 부승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소함연에게 특혜를 주지 않고, 월령안과 같은 감방에 가두는 데 동의했다.

소함연과 월령안을 같은 감방에 가두어 두면, 그가 누구의 편을 들었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에야말로 유칙은 변경에서 월령안의 인맥을 알게 되었다. 월령안의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더라도, 밉보이지는 말아야 했다. 그는 월령안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칙은 무턱대고 사람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대신 포졸을 보내 월령안에게 동의를 얻은 다음에야 소함연을 들여보냈다.

유 대인이 이렇게 체면을 세워주으니, 월령안도 그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포졸이 소함연을 데려왔을 때, 최씨 가문의 두 어멈을 시켜 감방의 구조를 바꾸어 사 분의 일쯤 되는 공간을 비워 두었다.

“월 낭자, 이건…….”

포졸이 소함연을 데리고 왔다. 원래 크지도 않은 감방을 억지로 두 부분으로 나눈 것이 보였다.

감방의 왼쪽에 사 분의 일 정도 되는 공간이 비어 있었다. 그곳의 환경은 바로 옆 감방과 다를 바 없이 더러웠고, 썩은 냄새가 풍겼다.

평소라면 별문제가 없었다. 감방은 원래 이런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나 바로 오른쪽, 깨끗한 융단과 운치 있는 병풍으로 꾸며진 곳과 비교하자, 그 작은 구석은 어두컴컴하고 냄새가 심해 한시도 견디기 힘든 곳으로 보였다.

“한 방을 네 사람이 써야 하니 사 분의 일의 공간을 비워 두었어요. 서로 구역이 분명하니까 불필요한 충돌과 번거로움도 덜 수 있잖아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월령안은 감방 한쪽에 앉아 있었다. 그쪽에는 꽃, 비단, 향이 놓여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해서 감옥 같지 않았다.

관졸은 감히 문제가 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돌아서서 소함연에게 말했다.

“소 낭자, 들어가시지요.”

“령안아, 너,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일부러 나에게 수모를 주려는 거지?”

관졸 뒤에 서 있던 소함연은 붉어진 눈시울에 눈물을 글썽이며 겁을 먹은 듯이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연약한 몸을 가늘게 떨자 온몸에서 가련한 분위기가 풍겼다.

하지만 그녀의 연기는 헛수고일 뿐이었다. 월령안이든 최씨 가문의 두 어멈이든 누구도 그 모습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대꾸는커녕 마치 그녀가 존재하지도 않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소함연은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더는 체면을 구기며 월령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눈살을 찌푸리며 관졸에게 말했다.

“나리, 저더러 여기에 있으라고 하는 건 제가 새로 왔다고 업신여기는 건가요?”

관졸은 월령안과 소함연을 번갈아 보다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차마 월 가주가 업신여기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는 거라고 말해 줄 수가 없었다.

“하!”

월령안은 비웃으며 옆에 놓인 꽃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등 뒤에 있는 두 어멈에게 말했다.

“어멈, 발을 내려 주고 촛불을 좀 밝게 해 주게. 책을 봐야겠어.”

“네, 아가씨.”

두 어멈은 공손하게 대답한 뒤, 유유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관졸과 소함연의 눈앞에서 미리 걸어 두었던 발을 와락 소리 나게 내려 버림으로써 소함연을 격리했다.

소함연은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질 뻔했다.

“나리, 보세요. 월령안이 나리들 앞에서도 이렇게 저를 업신여기는데, 나리들이 가고 나면 저를 죽이려고 하지 않겠어요?”

“소 낭자, 월 가주는…….”

젊은 관졸이 소함연에게 해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말문을 열자마자, 옆에 있던 나이 든 관졸이 말렸다.

나이 든 관졸은 소함연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며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소 낭자는 저희가 어떻게 해 주길 원하십니까?”

소함연은 상대방이 기가 꺾이자, 마음속으로는 하찮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까의 연약한 모습을 보이며 당연하다는 듯 요구했다.

“감방을 바꾸어 주세요. 이 감방은 싫습니다.”

소씨 가문의 적장녀가 직접 왔으니, 이만하면 순천부의 체면을 충분히 봐 준 것이었다. 순천부의 관졸들은 처신을 잘해 그녀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나이 든 관졸은 대답하지도, 거절하지도 않고 계속 물었다.

“그럼 또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따로 필요한 건 없어요. 다만…….”

소함연은 안락의자에 한가하게 앉아 있는 월령안을 발 사이로 힐끗 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똑같은 용의자들이니, 순천부에서도 똑같이 대해 주셔야죠. 그렇지 않나요?”

‘순천부 관졸은 아버지가 사직했다고, 조정에 소씨 가문 사람이 없는 줄로 아는 모양이네. 그렇다고 날 함부로 업신여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 소함연을 그리 마음대로 괴롭힐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그리 만만한 줄 알아?’

“소 낭자 말씀이 지당합니다. 이 감방에 있기 싫다고 하시니, 그럼 소인이 다른 감방으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나이 든 관졸은 소함연에게 굽신거렸다. 그리고 돌아서자마자 굳은 얼굴로 젊은 관졸에게 말했다.

“멍하니 뭐 하는 거야? 소 낭자를 데리고 옆방으로 가서 다른 범인과 방을 바꿔 드려라.”

“네?”

젊은 관졸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옆방은 열몇 명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정(丁)씨 아저씨는 진심인가?’

“멍하니 뭐 해. 어서 소 낭자를 데리고 가지 못해!”

나이 든 관졸 정씨가 젊은 관졸을 걷어차며 한마디 재촉했다. 젊은 관졸은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소함연을 바라보았다.

‘소 승상의 따님은 바보인가? 남들은 다 사람이 적은 감방에 있으려고 하잖아. 되려 사람이 많은 감방에 들어가려 하다니. 저 연약한 몸으로 저 안의 사람들과 대적할 수나 있을까? 들어가자마자 맞아 죽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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