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순천부윤은 사람이 할 짓이 아냐
순천부윤 유칙은 황궁에서 한 시진 남짓 기다려서야 겨우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신이 폐하를 뵙습니다.”
유칙은 난각에 들어서자, 읍을 하며 예를 올렸다.
“유 경(卿), 예를 거두라. 이 시간에 만나자고 하는 걸 보니,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가?”
사흘 뒤면 북요의 사절단이 변경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북요 사절이 갑작스럽게 제의했다. 북요 공주가 변경의 귀족 여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황제가 성사시켜 주기를 바란다며 전해왔다.
예부에서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받자,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방안을 상의한 다음 황제에게 결정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황제는 오후 내내 예부 사람들과 북요의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의논해야만 했다. 겨우 한숨을 돌리려는데 궁인이 와서 순천부윤이 알현을 청한다고 전했다.
솔직히 황제는 오늘 순천부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간 유칙의 행동을 미루어 보아, 그가 찾아왔다는 것은 스스로 처리할 수 없으니 황제에게 나서 달라는 뜻이었다
황제는 가끔 이 황제라는 자리도 참 갑갑하다고 생각했다.
신하들은 자기가 처리하지 못하는 일을 모조리 그에게 떠맡겼다. 하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떠밀지 못했다. 처리하지 못할 일도 억지로 떠맡아야 했다. 그러다가 잘못 처리하면, 혼자서 온갖 비난을 뒤집어써야 했다.
“폐하, 월씨 가문의 집사가 소 승상과 소 낭자가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배신했다며 고발했습니다.”
유칙은 황제를 슬그머니 살펴보았다. 황제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여 보이자, 군소리를 늘어놓을 엄두도 못 냈다. 바로 월씨 가문에서 보내온 고발장과 증거를 바쳤다.
물론, 소 낭자의 속옷은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 물건은 가지고 다니기는커녕, 보기만 해도 불길했다.
“소 낭자의 일이 사실이냐?”
황제는 고발장과 증거를 탁자 위에 홱 내던졌다.
소 승상의 밀수 건에 관해서는 화가 나지 않았다. 이 일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 언젠가 손을 써서 소씨 가문의 장사를 중단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손을 쓰기도 전에 소씨 가문의 상단에 일이 생겨, 수고를 덜었다.
하지만 소함연의 일은 정말로 화가 났다. 소함연은 그가 육비우에게 맺어준 아내였다.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황제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
‘소씨 가문이 너무 가증스럽구나. 감히 군주를 기만하다니!’
유칙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소인은 모릅니다.”
십중팔구는 사실이었다. 북요의 그 귀족이 사흘 뒤면 변경에 도착한다. 그 상대방이 직접 증언하겠다고 한 걸 보면, 확신이 있는 거였다.
다만, 월씨 가문에서 무슨 힘이 있어 그 북요의 귀족이 나서서 증언하게 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 사건은 결코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남에게 알려지면 소씨 가문 낭자에게도 좋을 게 없지만, 그 북요의 귀족에게도 전혀 득이 될 게 없었다.
‘월령안이 북요의 귀족이 나서서 증언하게 할 수 있다니. 월 가주의 능력이 내 상상보다 훨씬 대단하구나!’
유칙은 잠깐 생각하고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폐하, 월씨 가문에서 소 승상과 소 낭자가 적과 내통했다고 고발했는데, 이건 아주 큰일입니다. 소 승상은 공로가 있으니 감옥에 가두지 않아도 된다지만, 소 낭자는 가둬야만 합니까?”
황제는 안색이 확 변했다. 앞서 내관에게 전하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유칙을 냉랭하게 힐끗 바라보았다.
“법에 따라 처리해라! 이런 것까지 짐이 가르쳐야 하느냐?”
‘조정 대신 중 누구 하나 짐의 걱정을 덜어주는 사람이 없구나.’
황제가 불만을 겉으로 확 드러내자, 유칙은 속으로 재수가 없다고 중얼거렸다.
유칙도 황제가 노여워할 줄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역정을 내실 줄은 몰랐다.
유칙은 간이 콩알만 해져서 황궁에서 나갔다. 그는 고개를 들어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순천부윤은 참 어려운 자리야.”
월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싸움에 휘말린 일은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격이었다.
유칙은 피곤한 얼굴로 황궁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황제의 분노를 마주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관아에 돌아오자, 더욱 어려운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방이 꽉 찼다고? 소 낭자를 가둘 곳이 없다니?”
유칙은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세 번이나 확인해서야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없는 일을 만드는 사람이 너무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최씨 가문, 장군왕부, 정씨 가문 그리고 육씨 가문의 둘째, 셋째 집안까지. 다들 뭘 하려는 건가?”
유칙은 머리가 아파 이마를 짚고 말았다. 자신이 곧장 돌아왔던 것을 후회했다.
‘나는 왜 이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 걸까? 황궁에서 나와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으면 얼마나 좋아? 집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데. 내 막내아들이 얼마나 귀여운데 내가 여길 왜 왔을까! 너무 힘들구나!’
순천부 관아의 책상에 한가득 쌓인 사건 서류와 감방을 가득 채운 여자 죄인들을 보자, 당장 벼슬을 그만두고 싶었다.
‘이 순천부윤은 사람이 할 짓이 아냐. 나는 그만하련다. 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그 사람이 하라고 해!’
* * *
황궁. 유칙이 떠나고 잠시 후, 황제는 순천부 관아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되었다.
조계안은 이 사건을 황제에게 알려 주느라 일부러 입궁했다. 한바탕 늘어놓더니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황형, 보셨죠? 월령안에게 일이 생기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서서 보호하려고 하나요? 월령안을 싫어하는 건 황형이 안목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황제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조계안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장봉이도 월령안을 좋아해서 그런 것이냐?”
육장봉이 월령안을 좋아해야만, 최근 그의 비정상적인 행동이 설명되었다.
황제는 예전에는 줄곧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믿어야만 했다.
“장봉이가 월령안을 좋아한들 어쩌겠습니까? 그놈더러 월령안을 맞아들이라고 할 건가요?”
조계안이 심술궂게 물었다.
청주의 일이 끝나지 않으면, 황형은 월령안의 혼사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육장봉은 지금 헛수고를 하는 셈이었다.
“안 돼!”
황제는 단박에 대답했다.
“그럼 제가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도 안 된다는 거죠?”
조계안이 떠보듯이 물었다.
“그래!”
황제는 조계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짐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 안 된다!”
“월령안이 월씨 가문 사람이라서요?”
조계안은 황형이 월령안을 싫어하고, 그녀에게 편견이 있음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월씨 가문이 옛날 황실을 배신한 일 때문에 황형이 월령안을 싫어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월 삼낭이 나타난 다음에야 황형이 싫어하는 것은 월령안뿐이고, 그녀에 대해서만 편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월령안은 선량한 사람이 아니다. 너희는 모두 그 여인에게 속고 있는 거다.”
황제의 표정은 음침했다. 눈에는 혐오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순간 조계안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도대체 알 수가 없네요. 왜 월령안을 싫어하는 겁니까? 월령안이 황형에게 뭘 잘못했나요?”
황제는 조계안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빛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조계안은 어딘가 이상하다고 직감했다.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눈썹을 찌푸린 채 물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황제는 늘 관대했다. 누군가를 딱히 적대적으로 대하는 법이 없었는데, 유독 월령안만은 미워했다.
조계안은 생각할수록 이상하게 여겨져 다급히 캐물었다.
“황형, 월령안이 정말 황형에게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황제는 외면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침울했다.
“황형?”
조계안은 더는 짜증을 내지 못하고 고분고분 바로 앉았다. 황제를 간절하게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황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월령안 때문에 계안, 장봉과의 사이도 멀어진 것을 생각하자, 속으로 탄식했다. 그는 한참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기억나느냐? 짐이 혼인 전에 실종된 적이 있었지. 그때 너와 장봉이 짐을 어디에서 찾았었느냐?”
조계안은 슬그머니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의 안색이 침울하기는 해도 고통스러운 기색은 없자,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남풍관(南風館)입니다.”
“그럼 짐이 어쩌다 남풍관에 갔는지는 아느냐?”
황제가 냉소를 지었다.
“팔려 간 겁니까?”
조계안이 추측했다.
칠 년 전, 황제는 혼사를 치르기 전날 밤 시위를 데리고 몰래 황궁을 빠져나갔다. 혼인 전 미리 태자비를 보기 위해서였다. 뜻밖에도 측근에게 배신당해, 하마터면 황궁 밖에서 죽을 뻔했다.
그와 육장봉은 온 변경을 수없이 뒤진 끝에 남풍관에서 황제를 찾아냈다. 찾았을 때 황제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와 육장봉은 황형에게 밖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물었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사건에 관한 말을 꺼내기만 해도 펄쩍 뛰었다.
그와 육장봉은 깜짝 놀라 다시는 그 일을 거론하지 못했다.
황제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남풍관에 판 사람이 바로 월령안이다.”
“뭐라고요?”
조계안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월령안이?”
“월령안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
황제는 가슴속 깊이 숨겨둔 일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러나 월령안에 대한 혐오감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심지어 그 이야기를 꺼내자, 월령안이 더욱 싫어졌다. 죽일 가치가 없다고 여기지만 않았어도, 진작 사람을 보내 월령안을 죽였을 것이다.
황제는 못 믿겠다는 표정의 조계안을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그해 월령안은 겨우 열한 살이었다. 열한 살밖에 안 된 어린 여자애가 감히 인신매매를 하고, 또 사람을 그런 곳에 팔다니. 계안아, 넌 아직도…… 그 여인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요? 월령안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조계안은 월령안을 위해 변명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 일이 황형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일이 사실이라면, 황형이 왜 매번 월령안에게만 엄격하고, 항상 눈에 거슬려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그였더라도 쉽게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해?”
황제가 차갑게 비웃었다.
“그럼 짐의 눈이 잘못되었단 말이냐? 아니면 네가 월령안을 찾아가서 대질해 보겠느냐? 월령안의 손에 짐이 남풍관에 팔려갔다고 알릴 셈이냐?”
“죄송합니다, 황형.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월령안을 찾아 대질할 수 있겠어.’
이 일은 그냥 못 들은 거로 해야 했다. 심지어 조사하지도 말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소문이 나돌게 되면, 월령안은 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했다.
조계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형, 월령안이 나중에 황형을 알아보지 못하던가요?”
월령안이 알아보았다면, 그녀는 자신이 왜 황형에게 밉보였는지 분명히 알 것이다.
“월령안은 그때 짐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월령안을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됐어요. 다행입니다.”
조계안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월령안이 모른다니. 죽지 않아도 되겠구나.’
황제는 조계안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지금도 월령안을 위해 사정할 셈이냐?”
조계안은 모처럼 누그러져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형, 황형은 하나밖에 없는 제 가족입니다. 제 마음속에서 그 누구도 황형의 무게와 위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짐은 네 말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