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공주도 못 받을 대우인데
부승은 한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했다.
‘최씨 가문에서 용건이 있으면 하인을 보내 말하면 되지 않나? 순천부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갈 텐데?’
최일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의 어멈 둘이 주인의 재물을 훔쳤네. 증거가 확실하니 법에 따라 가둬야 하지 않겠나?”
“최 대인, 그까짓 일로…… 신고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집의 하인이 도둑질했으면 팔아버리면 그만이지, 최 대인께서 직접 관아에 신고할 필요가 있나? 최 대인께서 지금 나를 놀리시나?’
“왜 관아에 신고할 필요가 없단 말인가?”
최일은 얼굴빛이 확 바뀌며 당당하게 말했다.
“국법에 분명히 나와 있네. 주인집 재물을 훔친 것은 큰 죄일세. 나는 조정의 대신으로서 당연히 법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네.”
“그야 그렇지만…….”
부승은 골치가 아팠다.
“부윤께서는 지금 관아에 안 계십니다.”
“부윤이 자리에 없어도 괜찮다. 이 사건은 급하지 않으니 일단 사람부터 가두고, 부윤 대인께서 돌아오시거든 조사하게.”
최일은 사리에 참 밝았다. 남을 귀찮게 하지도 않고, 신분으로 사람을 짓누르지도 않았다.
부승은 조금 숨통이 트였다.
최 대인은 비록 ‘속셈’이 따로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규칙에 따라 일 처리를 했다. 이 정도면 부윤의 체면은 봐준 셈이었다.
하지만 최일이 데리고 온 두 어멈을 보자, 부승은 투덜댈 힘도 나지 않았다.
‘이 두 어멈은 감옥에 잡혀 온 게 아니라, 이사 온 건데?’
“최 대인, 이…… 물건을 너무 많이 가져온 거 아닙니까?”
두 어멈의 발치에는 커다란 보따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둘 다 사람 키 절반은 됨직하게 컸는데, 얼마나 많은 물건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두 어멈은 내 조모님의 사람들일세. 우리 최씨 가문은 여태껏 하인을 푸대접한 적이 없지. 이 물건은 전부 이들이 평소 외출할 때 쓰던 물건이니, 대인께서 검사해도 괜찮네. 모두 평범한 물건 뿐이고 감옥에 들이지 못할 물건은 없다네.”
최일의 얼굴에는 적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눈에는 거절할 수 없는 강한 기세를 뿜고 있었다. 그것도 부족한지 또 여유롭게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이들이 우리 가문의 하인이지만, 따로 우대할 필요는 없네. 규칙대로 처리해 주시게. 하지만 우리 가문의 두 어멈은 나이가 많으니 젊은 낭자와 같이 있도록 해 주면 가장 좋겠군. 그래야 혹시 밤에 몸이 아파도 돌봐 줄 사람이 있을 게 아닌가.”
“최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부승은 입꼬리를 살짝 실룩였다. 그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하고 관졸을 불렀다. 그리고 척 보아도 보통내기가 아닌 두 어멈을 감옥으로 보냈다.
최일 대인은 관아에 신고하러 온 게 아니었다. 감옥에 있는 월 낭자에게 의복과 하인을 넣어 주려고 온 것이다. 다만 최일 대인은 일 처리가 깔끔해 모든 사람의 체면을 다 고려했으므로,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월령안, 참 대단하군!’
그녀가 갇히자마자 육 대장군이 호위병을 파견해 따져 묻질 않나, 젊은 최 대인은 아예 직접 찾아왔다.
‘이건 공주도 못 받을 대우인데.’
부승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최일을 보내고 부승이 앉아서 숨 좀 돌리려 할 때였다. 관졸이 또 와서 보고했다.
“대인, 장군왕 세자께서 오셨습니다.”
장군왕 세자가 직접 왔다니, 부승은 지체할 엄두도 못 내고 서둘러 문밖으로 마중 나갔다.
역시 장군왕 세자도 월령안 때문에 왔다.
최일의 완곡함과 달리, 장군왕 세자는 직접 한 수레나 되는 물건을 관아 밖에 가져다 놓았다.
“월령안을 보석할 수 없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 자네를 난처하게 하지는 않겠네. 이 옷들은 내 어머니께서 직접 정리 하신 것이네. 사람을 시켜 검사해 보고 문제가 없으면 안으로 들여보내 주게.”
“세자, 이건 규칙에 어긋납니다.”
부승은 곧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월령안에게는 도대체 무슨 내력이 있는 걸까?’
월령안은 대상인으로, 변경의 많은 권력자와 왕래가 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관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일이 생기자마자 최씨 가문 대공자에, 장군왕 세자까지 직접 올 필요가 있는가.
이렇게 하나같이 직접 와서 부탁하니, 감히 거절할 수도 없고 난처하기만 했다.
부승은 혼자서 처리하려니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장군왕 세자는 막무가내로 구는 데 익숙했다. 부승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서 내가 월령안을 만나게 해 다오. 사람을 보지 못하면 나도 돌아가서 할 말이 없단 말이다.”
부승은 장군왕부에 밉보일 수 없었다. 게다가 법률에도 갇힌 용의자를 면회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었다.
부승도 더는 장군왕 세자 앞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직접 그를 데리고 감방에 가서 월령안을 만나게 했다.
그 시각, 음침하고, 꿉꿉하고, 곰팡내로 가득했던 감방은 최씨 가문에서 온 두 어멈의 손을 거쳐 확 달라졌다.
감방 안에서는 꽃향기가 은은히 풍겼다. 더러운 벽에는 벽지를 붙였고, 바닥에는 고급 융단을 깔았다. 기름기가 번질번질하던 자물쇠와 철문도 말끔하게 닦아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병풍과 망사 휘장을 이용해, 감방 일부분을 가려서 독립적이고 아늑한 작은 방까지 만들었다. 방 안에는 탁상과 의자, 왜탑, 차, 간식이 다 갖춰져 있었다. 최일은 자상하게 책 두 권도 딸려 보내, 그녀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했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들어왔던 것이다.
장군왕 세자는 얼핏 보고 자신이 잘못 왔나 싶어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잘못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걸 거듭 확인하자, 농담이 절로 나왔다.
“나는 네가 감옥에서 고생하는 줄 알고 일부러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물건을 한가득 챙기게 했는데 네가 나보다 더 잘 지내다니. 넌 감옥살이도 남다르게 하는구나.”
“세자 전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월령안도 자기가 감옥에 온 게 아니라 휴양하러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일이 세심하게 챙겨준 덕분이었다. 심지어 모든 물건이 그녀가 평소 쓰는 것보다 훨씬 정교했다.
“대장군이 보낸 거야?”
장군왕 세자가 월령안의 뒤에 서 있는 두 어멈을 가리키며 호기심이 가득해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이 두 어멈은 최씨 가문 사람이에요.”
만약 육장봉이 보낸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더럽고 냄새나는 감옥에 갇힐지언정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육장봉은 그동안 그녀를 위해 평소 그가 하지 않던 일을 너무 많이 했다. 이제는 자중하지 않으면, 황제도 더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육장봉과 황제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때가 되면 육장봉은 무사할 것이다. 반면, 그녀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장군왕 세자는 최일이 월령안에게 어멈 둘을 보낸 걸 보자, 당장 자기도 사람을 보내 월령안을 보호하려 했다.
부승은 하마터면 장군왕 세자에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
“세자, 이건 법도에 어긋납니다.”
월령안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말렸다.
“제발 소란은 그만 피우세요.”
장군왕 세자는 월령안을 외면하고, 사나운 표정으로 부승을 노려보며 말했다.
“최일은 보낼 수 있는데 왜 난 안 된단 말이냐? 왜, 관아에서는 우리 조씨 가문이 최씨 가문보다 만만한가 보구나?”
“세자, 그게 아닙니다. 최 대인 댁의 어멈들은 죄를 저질러 들어온 겁니다. 이들은 용의자입니다.”
부승은 말을 하고 나자 아차 싶었다. 심지어 감옥이 온통 범인으로 넘쳐나는 장면까지 상상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부승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군왕 세자는 바로 캐물었다. 부승은 우물쭈물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장군왕 세자의 압력에 견디다 못해 자초지종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거였나?”
장군왕 세자의 눈이 번쩍 빛났다. 당장 흥분해서 말했다.
“월령안, 기다려. 내가 하인 몇 명을 더 보내 줄게. 최일이 둘 보냈으니 나는 여덟을 보내야겠다. 머릿수로 져서는 안 되지.”
월령안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저는 여기서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세자께서 최일과 이런 걸 겨뤄서 뭐 하려고요?”
“좋기는 뭐가 좋아. 이 감옥이 사람이 있을 곳이야? 네가 여기 혼자 있으면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없어. 하인을 몇 명 더 보내서 감방을 다 채워 주마. 그래야 다른 범인이 들어올 일도 없고, 너도 안전할 거다. 됐다. 넌 상관하지 말고 내게 맡겨라.”
장군왕 세자는 월령안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에게 손을 저어 보이고는 가 버렸다.
‘최일의 이 수법은 너무 재미있는걸. 내가 몰랐으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좀 배워 둬야지.’
장군왕 세자는 흥분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월령안은 머리가 아픈 나머지 이마를 짚었다. 몇 번이나 그를 불렀지만, 도로 불러오지도 못했다.
부승은 옆에 서서 정말로 울 뻔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부윤께서 돌아오시면 나를 죽이려 하지 않을까?’
반 시진 뒤, 장군왕 세자는 십여 명의 하녀를 보내왔다. 주인집의 재물을 훔친 혐의가 있으니, 순천부에 가둔 다음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부승은 장군왕 세자에게 주인집 재물을 훔친 사건은 순천부의 소관이 아니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물론, 감히 말할 수는 없었다.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장군왕 세자의 눈빛을 받으며, 부승은 울며 겨자 먹기로 관졸에게 명령했다. 그 하녀들을 월령안이 갇힌 감방에 배치했다.
부승은 장군왕 세자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고 났으니, 오늘은 별일 없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장군왕부의 시녀를 감옥에 넣자마자, 장군부에서 또 십여 명의 여병(女兵)을 보내왔다. 이유는 역시 주인집의 재물을 훔친 혐의가 있으니, 순천부에서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부승은 더는 말하기조차 싫어졌다.
‘이 사람들이 핑계라도 좀 신경 쓰면 안 되나?’
이유조차 똑같다니. 정말 윗분에게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부승은 골머리를 앓았다. 순천부에 용의자를 가두는 감방은 몇 칸뿐이었다. 정 장군부에서 보내온 여병들까지 가두자, 감방이 꽉 차 버렸다.
하지만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늘따라 죄를 저지른 하녀들이 유별나게 많았다. 최씨 가문, 장군왕 세자, 정씨 가문 외에도 육씨 가문 둘째 집안과 셋째 집안의 집사도 각자 여병 둘을 거느리고 왔다. 이들도 죄를 저질렀으니 순천부가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육씨 가문 둘째, 셋째 집안은 주인 대신 집사가 찾아왔다.
부승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방이 꽉 차서 도저히 가둘 수가 없네. 자네들을 속이는 게 아닐세. 진짜 꽉 찼다니까.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가서 눈으로 보게.”
육씨 가문 둘째, 셋째 집안의 집사는 부승을 따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확실히 사람들로 꽉 들어찬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부승을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감방 한가운데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희 하인들은 말을 잘 듣습니다. 그냥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여기에 서 있게만 해 주십시오.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겠습니다.”
순천부의 부승은 더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시구려.”
머릿수에는 당해 내지 못하는 법. 그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사람들이 관아에 신고하면, 순천부는 접수해서 처리해야 했다. 관아로서는 그들이 사사로이 형벌을 내리게 할 수는 없었다.
월령안은 말문이 막혔다.
오후 사이에 사람으로 가득 찬 감옥을 보자, 더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그녀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이 사람들에 비하면, 그녀의 잔재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다만 황궁의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역정을 내지 않을까 걱정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