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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75)화 (375/1,004)

375화 기러기 구이나 먹으러 가자

황제는 육장봉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육장봉의 그 행동은 재자(才子)들이 미인을 얻으려고 할 때보다 훨씬 유난스러웠다.

육장봉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감정을 감춘 채 냉담하게 말했다.

“그건 신이 월령안에게 빚진 것입니다. 신이 갚아야 합니다.”

“장봉아, 생각이 과하구나.”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너는 월령안에게 빚진 게 없다. 한 번도 빚진 적이 없어! 그 여인이 너를 위해 한 일들은 육씨 가문에 시집가기 위한 조건이었다. 만약 월령안에게 그런 능력이 없으면 육씨 가문에서 왜 일개 상인 집안 출신 여인을 맞아들였겠느냐?”

돈을 벌어 전선에 있는 대군을 먹여 살릴 것. 그것이 월령안이 육씨 가문에 시집가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그녀의 신분으로는 육장봉의 아내로서 시집가는 것은 고사하고 첩으로 들어갈 자격조차 안 됐다.

월령안과 육장봉의 신분 차이는 보이는 그대로였다. 삼 년 전, 전쟁 상황이 긴박한데 국고는 부유하지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은 태반이 화친을 주장하고 다시 싸우는 것은 지지하지 않았다.

반면, 황제는 북요와 전쟁을 치르는 육장봉을 고집스레 지지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시집은커녕 그와 접촉할 기회조차 없었다.

월령안과 육장봉의 혼사는 어찌 보면 일종의 거래였다.

월령안은 거액의 금전으로 전쟁의 순조로운 진행을 보장한다. 대신 육장봉에 시집가서 그에게 접근하여 그의 마음을 얻을 기회를 얻었다.

월령안은 약속을 지키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 황제와 육씨 가문도 월령안에게 기회를 주었다.

안타깝게도 월령안이 이 거래에서 밑지게 되었다. 도박에서 진 것이다.

그녀는 삼 년 사이에 육장봉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거금으로 만든 기회가 덧없이 사라졌다.

이건 황제의 잘못도, 육씨 가문의 잘못도 아니었다. 육장봉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었다.

정말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월령안이었다. 월령안 자신이 안목이 없어, 밑지는 장사를 한 것이다.

황제는 여태껏 육장봉이든 육씨 가문이든 월령안에게는 빚진 것이 없다고 여겼다. 자신이 월령안을 홀대했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장봉아, 무슨 책임이든 네가 짊어지려 하지 마라. 사람은 각자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삼 년 전의 길은 월령안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어. 짐도 강요한 적 없다.

장봉아, 절대 월령안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애처로운 척, 애틋한 척 몇 마디 했다고 자책감을 가지고 보상하려 하지 마라. 그 여인은 매우 영리해. 이익이 없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절대 이용당하지 마라.”

황제는 육장봉의 어깨를 다독이며 엄숙하고 진지하게 분부했다.

육장봉은 침묵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황제의 말처럼 자신이 월령안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헌신했든 간에 본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그는 그녀에게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월령안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그 자신만 알고 있으면 그만이다. 황제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가 입궁한 이유는 자기가 한 일에서 월령안을 깨끗이 배제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는 그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월령안에게 전가할 것이다.

육장봉은 황제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죄를 청하고서 난각에서 나왔다.

난각 밖으로 나오자, 팔짱을 끼고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가면을 쓴 조계안이 보였다.

“드디어 나왔군. 오래 기다렸어.”

조계안은 육장봉이 나오자마자 다가와 친근하게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자. 기러기 구이나 먹으러 가자.”

육장봉은 그를 흘겨보았다.

“왜 쳐다보는데?”

조계안은 눈을 살짝 휘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잖아. 좀 떨어져.”

육장봉은 손을 들어 조계안의 손을 밀쳐 냈다. 그리고 옆으로 한 걸음 옮겨 그와 거리를 두었다.

“왜? 기러기가 아까워?”

조계안은 심술궂게 웃었다.

“이를 어쩌나. 정작 받은 사람은 신경 안 쓰던데.”

“쓸데없는 걱정이다.”

육장봉은 조계안에게 눈을 부라렸다.

어차피 형식일 뿐이었다. 월령안이 받아 준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가 받은 다음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쯧쯧쯧,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 거였으면 좋겠네. 난 네가 속상해서…… 남몰래 혼자 구석에서 눈물을 쏟을까 걱정했거든.”

조계안은 육장봉의 차가운 얼굴을 외면하더니, 다시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기분 좋다는 듯 노래했다.

“일편단심이 얼마나 우스운가, 인간 세상이 가장 따분하다네(癡情多可笑, 紅塵最無聊)…….”

“그렇게 한가하면 가서 월 삼낭이나 지켜봐.”

육장봉은 성가시다는 듯 또다시 조계안을 밀쳐 냈다. 하지만 조계안은 고약처럼 착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여자는 말도 마. 너무 교활해. 진작 태후에게 신원을 확실하게 말해 둬서, 전혀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어. 지금은 온종일 태후 궁에 도사리고 있어 우리도 전혀 기회가 없어.”

월 삼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조계안의 얼굴은 순식간에 음침해졌다.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난 월 삼낭이 싫지만, 그 여인은 정말 수완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태후가 몇 년간 불면증에 시달렸지만, 어의가 줄곧 고치지 못했거든. 요 며칠 그 여인이 태후 곁에 있은 덕에, 태후는 며칠째 잠도 잘 자고 기분도 아주 좋대. 지금 태후는 하루도 그 여인이 없으면 안된다더군.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태후는 그 여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게 뻔해.”

조계안은 말하지 않은 사실도 있었다. 태후는 원체 월령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월 삼낭, 이 영리한 여인은 태후에게 한발 앞서 말했다. 자신은 월령안에게 밉보였으며, 그녀에게 핍박을 받는 바람에 변경에 있지 못하게 됐다고 말이다.

이 사연을 알고 난 태후는 월령안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그들이 월령안을 위해 월 삼낭을 잡기란 거의 불가능해졌다.

“큰 잘못이 없다면 큰 잘못을 저지르게 하면 되잖아. 황궁에 있는데, 네가 혼내 주는 건 간단하지 않나?”

육장봉은 조계안을 힐끗 흘겨보고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후궁은 황후의 영역이야. 나는 한 번도 간섭한 적 없어.”

조계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깨끗하게 떠넘겼다.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간섭하지 못하면 지켜보는 것만이라도 해라. 기회를 틈타 무슨 짓을 저지르게 두지 마.”

육장봉도 후궁에는 사람을 심어 놓지 않았다. 이 일은 확실히 까다로웠다.

“후궁의 일이라면 황후를 찾아가야지. 정 안 되면 이반반을 찾든가. 내 사람들 가지고는 후궁을 시시각각 지켜볼 방법이 없어.”

후궁에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여성 아니면 내관뿐이었다 그 사람들은 줄곧 이반반이 책임지고 있었다. 이반반은 황제의 심복이었다. 조계안도 번거로움을 초래하지 않기 위하여 그에게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것!”

육장봉은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발을 들어 조계안을 걷어찼다.

조계안은 재빠르게 훌쩍 뛰어 피했다.

“군자는 입으로 말하고, 소인은 주먹으로 말하지.”

육장봉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떠나갔다.

조계안은 쫓아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높은 소리로 외쳤다.

“기러기 구이 정말 안 먹을 거야? 열일곱 쌍이나 된단 말이야. 나 혼자서는 다 못 먹어. 네가 힘들게 잡은 건데 다 먹어 줘야지…….”

육장봉은 뒤돌아보기는커녕 걸음걸이도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히 떠나갔다.

그 자리에 있던 조계안은 육장봉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몸을 돌려 되돌아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정도밖에 없었다. 육장봉도, 월령안도 그 무슨 언약의 징표인 기러기를 신경 쓰지 않고 있음을 황제가 알 수 있게 했다.

육장봉이 황궁을 떠나자마자, 황제는 그와 조계안이 회랑에서 나눈 이야기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알게 되었다.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의 사촌 아우였으니 그도 감싸줄 수밖에 없었다.

“됐다. 장봉이가 보상하고 싶거든 보상하라고 해라. 어차피 이번 한 번뿐일 테니까. 장봉이가 영웅 노릇을 하고 싶다면 짐이 만족시켜 줘야겠지.”

* * *

육장봉은 황궁을 떠나 장군부로 돌아와 황제의 훈계를 담은 성지를 받았다. 그리고 황제의 요구에 따라 집에 틀어박혀 잘못을 반성했다.

이와 동시에 그가 입궁해 황제에게 죄를 청했다는 소식도 밖에 전해졌다.

장 부승상 등은 이 소식을 듣자,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육장봉에게는 정말 총애를 베풀었다. 육장봉이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데도 그저 엄포만 놓고 말았다.

더는 금군을 통솔하지 않고, 사흘간 잘못을 반성하며, 반년 동안 감봉 처분을 한다.

이 정도가 무슨 벌이란 말인가.

금군 통령에게 사고가 생기자, 육장봉은 임시로 명령을 받아 잠시 금군을 관장했다. 그리고 황제를 도와 금군 내부를 척결했다.

이제는 금군 내부 척결이 끝났다. 원래대로라면 육장봉은 어차피 이 직무를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황제는 직무의 회수를 벌로 주었다.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황제가 아주 무거운 벌을 내린 줄 알 것이다.

정작 금군을 더는 통솔하지 않더라도, 육장봉에게는 아무 손해가 없었다. 반성과 감봉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건 처벌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제는 육장봉더러 사흘간 반성하라고 했다.

고작 사흘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음 조회에도 출석할 수 있었다.

황제는 벌을 이렇게 가볍게 준 것으로도 모자라, 누군가 육장봉을 탄핵할까 걱정했다. 당장 사람을 시켜 육장봉이 먼저 입궁해서 죄를 청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속으로 시샘했는지 모른다.

“명문가 출신에,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젊고 유능하며, 황제의 마음마저 얻었으니 부러울 뿐이구나.”

조정의 대신들은 부러워하고 시샘할 뿐이었다. 그러나 소 승상과 그 문인들은 이 소식을 접하자 사색이 되었다.

소 승상의 문인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망설이며 주저하던 끝에 세 사람을 대표로 삼았다.

그들은 그날 밤, 소씨 저택으로 찾아가 소 승상의 결정을 바랐다.

“승상, 폐하께서 성지를 내려 육 장군을 질책한 일을 아십니까? 폐하께서는 대놓고 육 장군을 편들고 계십니다. 육 장군은 저희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고 공개적으로 월령안을 감싸고 돕니다. 저희……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승상, 육 장군이 이렇게 끼어든 이상 저희가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월씨가 설치도록 가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남들도 저희를 나약하고 만만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저희를 짓밟으려 할 겁니다. 앞으로 조정에서의 입지가 없어질 겁니다.”

“승상, 이 일은…… 그래도 승상께서 결정해 주셔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월령안에게 손을 쓸 수도, 쓰지 않을 수도 없어 정말 골치가 아팠다.

대표로 온 소씨 일파 관리 세 명은 소 승상을 간절히 바라보며 그의 결단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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