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우리 공평해야죠?
그는 자신과 월령안의 사이가 이젠 달라졌다고, 그들의 관계가 더욱 깊어졌다고 여겼다.
‘결국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가?’
월령안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그럼 대장군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남자는 나를 함부로 대하고도 오히려 도왔다고 하네. 정말 뻔뻔해.’
“감사 외에 달리 할 말은 없소?”
육장봉은 왼손 엄지의 반지를 매만지며 갑자기 치밀어 오른 감정을 가라앉혔다.
월령안도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대장군, 사람이 너무 뻔뻔하면 안 되죠!”
‘사람이 염치가 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른단 말이야?’
“당신 지금…… 나 보고 뻔뻔스럽다고 한 거요?”
육장봉은 반지를 매만지던 동작을 멈추었다. 눈에는 위험한 빛이 번뜩였다.
월령안은 위험을 직감하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니에요.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별것 아닌데 제가 놀랐어요. 대장군은 방금 제 얼굴의 먼지를 닦아 주셨습니다. 제가 따로 보답할 만한 건 없고, 술 대신 차 한 잔을 올립니다.”
월령안은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찻주전자를 들어 차 두 잔을 따랐다. 그중 한 잔을 육장봉 앞에 건넨 뒤, 자기 앞의 잔을 재빨리 비웠다.
“아쉽군.”
육장봉은 가볍게 탄식하고는 유감스러운 듯이 말했다.
“조금 더 뻔뻔한 짓을 해서 당신의 평가에 부응하려 했는데.”
월령안은 잠자코 있었다.
그녀의 잘못이었다. 바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쩜 순진하게, 육장봉이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앞에서 약간 건방지게 굴어도 된다고 생각했지. 이 남자가 꼬리 긴 늑대란 사실을 깜빡했어. 나를 좋아하더라도 여전히 못되게 굴잖아.’
월령안은 단호하게 마차 좌석에 앉았다.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참자. 성에 돌아갈 때까지만 참자. 집에 돌아간 다음에는 정말 멀리해야지. 상대하기 어려우면 피하면 되지.’
하지만 육장봉은 월령안을 순순히 놔주지 않았다.
마차가 성안으로 들어왔다. 육장봉은 서둘러 장군부에 가서 성지를 받는 대신 마부에게 분부했다.
“송취 골목으로 가라. 월 낭자를 집까지 바래다 주어야 한다.”
“장군, 성지는…….”
육장봉의 말을 듣자, 황궁 시위는 하마터면 화를 낼 뻔했다.
여기는 성안이지 광원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대장군은 성안으로 돌아왔는데도 서둘러 성지를 받는 대신, 월령안부터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했다.
‘대장군은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상관없는 건가? 조정 대신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은 해 보신 건가?’
마차 안의 월령안도 육장봉의 말을 듣자, 역시 화를 내고 싶었다.
“장군, 저는 바쁘지 않습니다.”
“나도 바쁘지 않소.”
육장봉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담담하게 말했다.
월령안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건가요? 어떻게 하면 저를 가만두실 건가요?”
“당신은 뭐 하려는 거요? 어떻게 하면 나를 거절하지 않을 거요?”
육장봉은 얼굴의 미소를 거두고 되물었다.
월령안은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 혼사를 내려 달라고 요청해서 저를 맞아들이면 거절하지 않을게요.”
육장봉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다른 조건을 말해 보시오.”
“그러면 성안 모든 백성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제게 잘못했다고 하세요.”
월령안은 한쪽에 내려뜨린 손을 슬그머니 꽉 쥐었다.
‘나를 맞아들일 수 없다는 걸 분명 알면서도 집적거리다니. 진짜 나쁜 놈이야!’
“월령안, 농담하지 마시오.”
육장봉은 눈썹을 한층 더 찡그렸다.
“저를 맞아들이지도 못하고 저한테 사과도 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믿고 제게 받아 달라고 하세요? 당신이 저한테 잘해 주니까요? 그것이 당신이 진심이라서요?”
월령안은 비웃듯이 물었다. 육장봉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당신이 제게 잘해 주고, 당신이 진심이라고 해서 제가 왜 당신을 받아 줘야만 하나요? 제가 당신한테 잘해 주었을 때, 제가 당신에게 진심을 바쳤을 때, 당신도 저를 받아 주지 않았잖아요?”
육장봉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 반면 월령안 얼굴의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그녀는 육장봉을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살짝 벌려 말했다.
“대장군, 우리 공평해야죠?”
월령안은 붉은 입술을 가볍게 열어 말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는 연인 간에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살짝 붉어진 눈가는 마치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 찰나, 육장봉은 월령안이 자신의 심장을 꽉 움켜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지난 삼 년 동안 월령안이 그의 답장, 그의 반응을 기다리던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월령안의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보며, 육장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월령안에게 잡힌 심장이 더욱 아플 뿐이었다.
그는 몸을 기울여 월령안을 잠시 끌어안았다. 그다음 그녀에게 밀쳐 버릴 기회도 주지 않고 먼저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차 문을 열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월 낭자를 집까지 모셔다드려라.”
육장봉은 몸을 훌쩍 날려 육이의 말을 빼앗아 탔다. 분부 한마디만 남기더니 말을 몰아 떠나갔다.
말 등에서 밀려난 육이는 그 자리에 선 채 망연자실했다.
‘난 누구? 여긴 어디지? 내가 뭘 해야지?’
마차 안의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마차에 기대앉았다. 두 눈을 질끈 감자,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날 맞아들일 수 없다는 걸 분명 알면서, 맞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걸 분명 알면서 왜 나를 건드려? 난 이미 포기했다고.’
마음속의 집착과 불가능한 망상을 포기했다. 육장봉을 원망하는 것도 그만두려고 했다.
십 년 동안의 맹목적인 사랑이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에게 소박맞고, 집에서 쫓겨났다. 비통했지만 여전히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육장봉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나를 건드려?’
마차 밖에 있던 육이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말을 타고 멀어지는 육장봉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아무 기척도 없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군은 매우 즐거워했었다. 잠시 한눈판 사이에, 두 사람은 어쩌다 말다툼을 한 걸까.
육이는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부의 옆자리에 앉더니, 그의 일을 빼앗았다.
마차는 다시 송취 골목을 향했다. 가는 길은 내내 조용하기만 했다.
* * *
황궁 시위는 마차를 따라 두 거리를 더 가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난 육 대장군에게 돌아가서 성지를 받으라는 말을 전하러 온 거였잖아. 내가 왜 이 사람들을 따라가지?’
황궁 시위는 이마를 탁 치고는 말머리를 돌려 장군부로 달려갔다.
막상 장군부에 도착했더니, 육 대장군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황궁 시위는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육 대장군이 한발 먼저 출발했습니다. 육 대장군이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어디로 가셨지?”
“그건 우리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자네가 육 대장군을 찾아간 것 아니었나?”
장군부에서 성지를 내리러 온 내관, 시위는 반나절이나 육 대장군을 기다렸더니 기분이 언짢았다. 시위의 말을 들자, 다들 화를 냈다.
“대장군께서는 말을 타고 갔습니다. 돌아와서 성지를 받으려 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황궁 시위는 속이 켕겨 말했다.
“그럼 대장군께서 어딜 가셨단 말인가?”
성지를 내리려던 내관이 퉁명스레 물었다.
“대장군께서……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아닐까요?”
황궁 시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지를 내리려던 내관은 시위에게 눈총을 주었다. 그리고 계속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육 대장군께서 안 오실 리가 없어!’
* * *
육이의 말을 빼앗은 육장봉은 말을 몰아 곧장 황궁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황궁 입구에 다다르자, 돌연 고삐를 잡아당겨 멈추었다.
그는 맞은편 거리에 서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붉은 벽돌과 푸른 기와로 된 궁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점점 짙어졌다.
‘내가 입궁해서 무엇을 할 수 있지?’
만약 그가 입을 열어 월령안을 맞아들이겠다고 하면, 황제는 화가 나서 그녀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가 월령안을 한 번 보호할 수는 있겠지만, 평생을 보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황제가 그의 체면을 봐서 월령안을 놓아주더라도, 청주의 그 늙은이들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월령안을 한 번 이용했으므로 두 번, 세 번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 늙은이들도 더는 황제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월령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절대 혼사를 내려 줄 리가 없었다.
월령안은 혼자만의 힘으로 변방의 백만 대군을 삼 년 동안이나 먹여 살린 여인이었다.
황위가 너무 확고한 나머지 자극을 추구하려는 게 아닌 이상, 황제는 절대 이런 여인을 변방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장군에게 시집보내지 않을 것이다.
월령안이 말한 온 성안의 백성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일도 그랬다. 설령 그가 정말로 실행하더라도 그녀가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황제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던 그가 월령안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해 보자.
그러면 황제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또 조정의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당신도 참. 내게 난제를 두 가지나 내주었군.”
육장봉은 눈을 지그시 감아 눈 속의 깊은 생각을 감췄다.
지금의 그는 월령안이 말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심지어 황제에게 그녀에 대한 마음마저도 들켜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월령안이 위험했다.
육장봉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 유능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월령안은 너무 유능했다. 너무 유능한 나머지 황제가 실권을 쥔 어떤 남자와도 결혼시킬 수가 없을 정도였다.
권력과 금전이 합쳐진 위력은 세상 사람들의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육장봉은 마지막으로 우뚝 솟은 황궁을 한 번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앞으로 몰아 궁문 앞에 멈춰 섰다.
“폐하를 알현해야겠다.”
궁문을 지키던 시위는 감히 막지 못했다. 곧바로 몸을 비켜 육장봉이 입궁하게 했다.
난각 밖에 도착한 육장봉은 내관이 보고한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가 상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더니, 주저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 폐하께 죄를 청합니다.”
“장봉아, 이게 웬일이냐?”
황제는 본래 육장봉을 잠시 그대로 내버려 두려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육장봉이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깜짝 놀라 급히 공문서를 내려놓고 일어나 육장봉을 부축했다.
그러나 육장봉은 움직이지 않았다.
“신이 사적인 일 때문에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불경죄이니 폐하께서 벌을 내려 주십시오.”
“됐다, 사소한 일이다. 짐이 이미 네게 훈계하는 성지를 내렸느니라.”
황제는 자초지종을 알고 나자 몹시 화가 났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부러 성지를 내려 질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육장봉이 와서 무릎을 꿇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신이 제멋대로 행동해서 폐하께 폐를 끼쳐드렸습니다.”
육장봉은 그다지 오래 무릎을 꿇지 않았다. 황제가 여러 번 일으키자, 그도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도 참, 말해 보아라.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느냐? 멀쩡히 있다가 왜 월령안과 얽힌단 말이냐? 예물에, 기러기에, 생일선물까지 보냈다지. 만약 짐이 네가 여인을 싫어하고 아내를 맞이할 생각이 없는 걸 몰랐다면, 네가 월령안을 좋아해서 맞아들이려고 하는 건 아닌가 의심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