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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73)화 (373/1,004)

373화 선을 넘으셨네요

월령안은 그 짧은 시간에 육장봉이 그렇게 많은 걸 생각했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그저 입을 열어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맞장구를 쳤다.

이 꽃밭은 불타는 듯 매우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구경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월령안이 월계화 밭에 흥미를 보이지 않자, 육장봉은 살짝 실망했지만 낙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무심함을 가장해서 월 삼낭의 일을 꺼냈다.

“내 부하가 월 삼낭이 어떻게 유씨 가문과 태후에 연줄이 대었는지 조사해 냈소.”

“어떻게 한 거래요?”

역시 월령안은 관심을 가졌다.

이 일은 그녀도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유씨 가문의 신중함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유씨 가문 쪽에서 청주에 줄을 댄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월 삼낭도 운이 좋았소. 낙원을 빠져나가다가 하인에게 유괴된 유씨 가문 손자를 만났소. 월 삼낭은 상대방을 알아보고 구해 준 다음, 유씨 가문으로 돌려보냈소. 유씨 가문은 월 삼낭을 감사하게 여겨 집에 머무르게 해 주었소.”

육장봉은 월령안과 함께 월계화 밭을 걸으며 이야기를 느긋하게 이어 갔다.

“월 삼낭은 의술을 알고, 특히 여인의 몸조리에 능하다 하오. 태후께서도 연세가 많아지시니 옥체에 다소 불편함이 있는데, 어의들의 실력이 부족해 완치할 수 없었지.

유씨 가문은 월 삼낭의 재주를 알아보고, 월 삼낭을 데리고 입궁했소. 월 삼낭은 능력이 좋았는지 태후의 비위를 잘 맞춘 모양이더군. 태후께서는 월 삼낭을 마음에 들어 하시오. 만약 월 삼낭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폐하도 태후의 사람을 건드리기 쉽지 않을 거요.”

“유씨 가문에서 소동이 벌어진 틈을 탄 거였군요. 제 셋째 언니는 참 재주가 있네요. 물론 운도 좋고요.”

월령안은 조용히 한마디 비꼬았다.

유씨 가문은 경계심이 유달리 높았다. 그녀도 많은 공을 들였지만, 이제야 겨우 교제한다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셋째 언니는 정말 운도 좋았고, 수완도 좋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유씨 가문의 손자를 구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함께 입궁해 태후를 만나게 해 줄 정도로 유씨 가문 사람을 구슬릴 수가 없었다. 특히 그녀의 내력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일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아무리 운이 좋아도 다 소진될 날이 있소. 권모술수로는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오.”

월씨 가문이 무너진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월 삼낭의 운이 정말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령안과 비하면 그래도 좀 못하지.’

육장봉은 몸을 비스듬히 하며 월령안을 힐끗 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그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부드러움이 서려 있었다.

월계화 밭의 경치는 매우 아름다웠다. 육장봉은 월령안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빨리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 몇 가지를 꺼내 이야기를 이어 갔다.

하지만 수도에 계신 분은 그들이 더 오래 함께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겨우 월계화 밭의 반을 걸었을 때였다. 육이가 다급히 달려왔다.

“장군, 장군부에 성지가 내려왔습니다. 황궁 시위가 장군부에 돌아가 성지를 받으라는 말을 전해왔습니다.”

“성지?”

육장봉은 불쾌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려는 거지?’

“네, 황궁 시위가 직접 모시러 왔습니다. 어서 장군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육이는 일부러 또 한 번 강조했다.

육장봉은 냉랭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았다. 돌아가자.”

서둘러 시위를 보내 장군부로 돌아가 성지를 받으라고 할 바에는 차라리 여기로 성지를 가지고 오는 게 낫지 않은가.

‘폐하도 참 유치하시군.’

월령안은 한쪽에 서서 육장봉을 힐끗 바라보았다. 육장봉이 불쾌해할 뿐 당황해하지 않자,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육장봉은 황제의 외사촌이고, 군신으로서도 대단히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육장봉을 걱정하다니, 정말 어리석었다.

시위가 재촉했지만, 육장봉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되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월령안에게 광원사의 풍경을 소개하기도 했다.

사찰을 나서기 전에는 한마디 덧붙였다.

“광원사는 사계절의 경치가 모두 다르오. 다음에도 다시 데려오겠소.”

월령안은 웃기는 했지만, 말을 받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광원사에 오고 싶지 않았다. 특히 육장봉과 함께 오는 건 더 싫었다. 왜냐하면 올 때마다 매번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장봉도 이에 개의치 않았다. 궁중의 시위가 재촉하든 말든, 여전히 월령안과 함께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도중에 일부러 몸을 내밀어, 잠든 월령안이 깨지 않도록 속도를 늦추라고 마부에게 분부하기까지 했다.

옆에 있던 궁중의 시위는 육장봉이 황제의 뜻을 무시하고 천천히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황궁으로 돌아가서 사실대로 폐하께 보고해야 하나?’

마차 안, 월령안은 육장봉을 마주하여 할 말도 없고, 신경을 써서 잡담을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는 척하던 중에, 육장봉이 마부에게 하는 분부를 듣고 하마터면 잠에서 깰 뻔했다.

‘육장봉이 미쳤나? 황제의 시위가 옆에서 지키고 있잖아. 나 때문에 조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이젠 날 위해 황제의 성지를 무시하다니. 나에게 꼭 남자를 망친 요녀라는 누명을 씌워야겠다는 거야?’

월령안은 화가 나서 자는 척하지 못할 뻔했다. 그래도 억지로 끝까지 참았다.

‘내가 육장봉을 상관해서 뭘 어쩌라고. 잠이나 자자.’

월령안은 이를 악물고 자는 척했다. 하지만 불안을 참지 못하고 이각 뒤에 ‘깨어나고’ 말았다.

눈을 뜨자마자, 육장봉의 놀림과 웃음이 섞인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육장봉은 그녀가 자는 척하는 걸 알았던 게 분명했다.

월령안이 화가 나서 육장봉을 노려보고는 바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엎드린 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밖에 있는 시위에게 자기는 잠에서 깼으므로, 육장봉이 마부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한 건 그녀와 상관이 없음을 알렸다. 육장봉이 그녀 때문에 황제의 성지를 무시했다는 누명은 쓰고 싶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마부에게 속도를 올리라는 말도 나서서 하지 않았다.

‘당신 뜻대로는 해 주지 않을 거야!’

육장봉은 월령안의 행동에 처음에는 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앉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엎드린 지 일각이 되도록 돌아앉지 않았다.

육장봉은 하는 수 없이 먼저 말했다.

“밖에 먼지가 많소. 눈에 티끌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시오.”

“장군, 걱정하지 마세요. 이보다 더 큰 모래바람도 본 적이 있거든요.”

월령안은 여전히 돌아앉지 않고 얼굴을 창밖으로 돌린 채였다.

마차가 달리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길에는 먼지가 많이 났다. 게다가 육이 일행이 말을 타고 마차 좌우 양측을 호위하고 있었으므로, 말발굽이 흙길을 밟을 때마다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때로는 돌멩이도 사방으로 튀었다.

그 일각 동안만 해도, 육장봉은 돌멩이가 튕기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돌멩이가 튕겨 월령안의 얼굴을 스칠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그녀가 여전히 돌아앉으려 하지 않자, 별수 없다는 듯이 애틋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전속력으로 성으로 돌아가자고 명령하겠소. 그럼 되겠소?”

‘참 맹랑한 아가씨야. 내가 졌소, 됐소?’

“대장군, 농담도 참. 대장군께서 전속력으로 돌아가시는 게 저와 무슨 상관이에요?”

월령안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육장봉이 그 말을 하자마자 바로 돌아앉았다.

말을 요란하게 달리는 바람에 창밖은 온통 모래 먼지가 뿌옇게 일고 있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는 건 물론이고 얼굴에는 간혹 작은 흙덩이까지 튕겼다.

사실 더는 창가에 엎드려 있고 싶지 않았다.

“정말 조금도 지려고 하지 않는군.”

육장봉은 고개를 저었다. 곧 마부에게 전속력으로 돌아가라고 분부했다.

월령안은 눈을 들어 육장봉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지만,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러나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면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월령안은 말끔하던 얼굴에 먼지를 얇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만약 얼굴 전체가 그랬다면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눈과 턱 주위는 깨끗하여 먼지를 뒤집어쓴 부분과 전혀 다른 색깔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음식을 훔쳐먹고도 얼굴 닦는 것을 잊어버린 얼룩 고양이 같았다.

육장봉은 얼핏 보고는 참을 수가 없어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이런 월령안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왜 웃어요?”

육장봉의 웃음소리는 너무 거침없었다. 월령안은 왠지 모르게 불편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옷에서 더럽거나 흐트러진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 보았다. 얼굴에도 더러운 게 묻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이 동작에 뜻밖에도 육장봉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도대체 왜 웃는 거예요?”

화가 난 월령안은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코앞에서 숙녀를 비웃다니. 품위라고는 하나도 없잖아?’

월령안이 곧 화를 낼 것 같자, 육장봉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그쳤다.

“당신 손을 보시오.”

월령안은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에 묻은 황토가 보였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들어 육장봉을 올려다보았다.

“재미있나요?”

“아니. 아주 귀엽소.”

육장봉의 눈이 약간 휘었다. 눈에는 아직도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묻어 있어 나지막하고 나른했다.

마차 밖에 있던 육이 일행도 육장봉의 자연스러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모두 저도 모르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장군이 최근 몇 년 동안 이렇게 즐거워 했던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월 낭자는 과연 대단하군.’

“대장군을 믿은 제 잘못이죠!”

월령안은 화가 치밀어 육장봉을 다시 한번 노려보았다. 당장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육장봉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작은 탁자 위의 찻주전자를 들어 물 한 잔을 따르더니 월령안에게 건넸다.

“물을 묻히시오. 그래야 깨끗이 닦일 거요.”

월령안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스스로 찻주전자를 들어 손수건을 적시고 얼굴을 닦았다.

육장봉은 피식 웃으면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잘못했소. 사과하겠소.”

“사과요? 육 대장군은 사과할 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요?”

월령안은 육장봉을 흘겨보고는 비웃듯이 말했다.

“그건 남에게 그런 거고. 당신은…… 남이 아니잖소.”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며 엄숙하고도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마차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했다.

월령안은 얼굴을 닦던 손을 멈추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손이 육장봉에게 잡혔다.

“여기 아직 남았군. 아직 닦아 내지 못했소.”

월령안이 벙찐 사이 육장봉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손을 잡아 그녀의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주었다.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월령안은 순간적으로 마차 안의 공간이 좁게 느껴져 질식할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손을 확 빼내더니 뒤로 감추었다. 그리고 냉랭한 표정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대장군, 선을 넘으셨네요.”

“난 그저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 주고 싶었을 뿐이오.”

육장봉의 손은 여전히 월령안의 볼을 쓰다듬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육장봉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에 도로 앉았다.

“필요 없어요.”

월령안은 또 뒤로 쑥 물러나더니 육장봉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필요하오. 방금 내가 도와줬잖소.”

육장봉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 눈에 말로 하기 힘든 감정이 차오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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