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나는 소개해 주지 않을 거요?
성 밖에 나간 뒤, 육장봉은 마부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분부했다. 느릿느릿 달린 바람에, 일행은 두 시진이나 걸려서야 광원사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춰 섰다. 단잠에 빠졌던 월령안도 잠에서 깼다.
“도착했나요?”
잠이 채 깨지 않아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잠긴 듯한 목소리에는 막 잠에서 깬 나른함이 섞여 있었다.
“음, 도착했소.”
육장봉은 이상하게도 입이 바싹 말랐다.
월령안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상황이 파악되자, 바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만 잠들었네요.”
‘남’ 앞에서 잠드는 것은 정말 큰 실례였다.
육장봉은 월령안의 말에서 거리감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마차 밖에서 기다리겠소.”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월령안의 앞을 지나 마차에서 내렸다.
월령안은 얇은 담요를 안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문질러서 정신을 제대로 차린 다음에야, 자는 동안 헝클어진 긴 머리와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동안 일각이 지났다.
육장봉은 마차 밖에서 바구니를 팔에 끼고 한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월령안이 나오는 순간, 바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가로놓인 손을 한 번 보고 다시 육장봉이 팔에 낀 바구니를 보았다. 묵묵히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제대로 선 뒤 육장봉에게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했다.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갑시다.”
육장봉은 어쩐지 월령안의 손이 닿았던 팔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손을 등 뒤로 돌려, 등에 대고 한 번 문질러 보았다.
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월령안의 손이 닿았던 곳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가는 내내 굳은 표정을 지어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월령안은 그를 힐끗 보았다.
‘육장봉이 멀쩡하다가 왜 또 저러지?’
상대하기 어려우면 피한다는 원칙에 따라 일부러 발걸음을 늦춰 그와 두어 걸음 거리를 벌렸다.
육장봉은 월령안이 보이지 않게 되자, 얼굴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등 뒤의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걷기 힘드오?”
월령안은 얼른 대답했다.
“아니요.”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았다.
월령안이 쉽게 따라잡을 수 있도록, 육장봉은 티가 나지 않게 걸음을 늦추었다.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월령안을 보자, 육장봉의 차가운 얼굴도 드디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졌다.
그가 월령안에게 무슨 말을 할까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일전에 월령안을 접대했던 지명 스님이 사찰 문을 지나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육 시주, 월 시주.”
“지명 스님.”
월령안은 두 손을 합장하여 불교식으로 답례했다.
육장봉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명 스님은 육장봉의 태도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예의 바른 웃음을 띤 채 둘을 광원사로 안내하며 자상하게 물었다.
“두 시주분께서는 서탑으로 가서 자당(慈堂)의 제사를 지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육장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령안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결정을 기다렸다.
“먼저 제사부터 지내겠습니다.”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무겁고 비통한 심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즐거울 수는 없었다. 매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어머니가 영영 떠났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는 부모 없는 고아가 되었고, 이젠 혼자였다.
월령안 어머니의 관은 여전히 광원사의 서탑에 안치되어 있었고, 매일 고승이 염불해 주고 있었다.
저번에는 온갖 심혈을 다 기울여 혜능 대사를 설득하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육장봉이 따라왔으니 월령안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사찰의 승려들이 문을 열어 두 사람이 들어가도록 했다.
예전과 지금의 대우가 이렇게 분명히 차이가 났지만, 월령안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모든 불공평한 대우에는 일찌감치 익숙해져 있었다.
월령안은 말없이 대전에 들어섰다. 한가운데 놓여 있는 관을 보자,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묵묵히 다가가서 어머니의 관 앞에 꿇어앉아 향 세 개를 올렸다. 그리고 육장봉에게서 바구니를 받아 그 안에 든 초와 간식을 하나하나 꺼내서 차렸다.
“어머니, 지난번에는 급히 오느라 아무것도 못 가져왔었죠? 이번에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하화소(荷花酥 – 연밥을 넣어 만든 과자)를 가져왔어요. 즐겨 드시던 낙신화차(洛神花茶 – 히비스커스 차)도요.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좋아하던 율자고(栗子糕 – 밤 앙금으로 만든 과자)도 가지고 왔어요. 만약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만나시면, 저는 잘 지내고 있다고 대신 전해주세요.”
어머니의 관을 마주하자, 지난번에 느꼈던 슬픔과 비통함과는 달리 이번에는 좀 더 마주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이성으로도, 감정으로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차분하게 어머니의 관 앞에 꿇어앉아 분향하고, 말도 건넬 수 있었다.
바구니 안의 제물을 꺼내 일일이 차렸다. 또 낙원의 계약서를 꺼내 보이며, 이번에 온 목적을 말했다.
“어머니, 이번에는 알려 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뵈러 왔어요……. 낙원이 다시 어머니 것이 되었어요. 지금 낙원 계약서를 태워 드릴게요.”
아쉽게도 그녀 자신이 범씨 가문에게서 직접 빼앗은 것은 아니었다. 살짝 불만스럽지만, 낙원은 이미 손에 넣었다. 이런 것들을 이야기한들 의미가 없었다.
월녕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숙이고 계약서에 불을 붙인 뒤, 앞에 놓인 작은 구리 대야에 버렸다.
계약서는 얇은 종이 한 장이었다. 순식간에 다 타 버려 재가 됐다.
잿더미가 된 계약서를 바라보는 월령안의 눈빛이 다소 흐려졌다.
많은 공을 들여야만 낙원을 빼앗아 올 수 있을 줄 알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손쉽게 빼앗아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쉬워서 이게 현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월령안은 정신을 차렸다. 영원히 답을 해 주지 않을, 칠흑처럼 검은 관을 흘끔 바라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고 일어섰다.
“어머니, 다음에 또 뵈러 올게요.”
“나는 소개해 주지 않을 거요?”
한쪽에 서 있던 육장봉은 끝내 참지 못하고 넌지시 말했다.
‘혹시 우리가 함께 어머니 제사를 지내러 왔다는 걸 잊었나? 어떻게 나를 잊을 수가 있지? 내 존재감이 이리 미약했던가?’
월령안이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다시 돌아와 관에 대고 말했다.
“어머니, 제 옆에 있는 이분은 주나라 추밀사이자 초품 대장군이에요. 이분이 딸 대신 낙원을 되찾아 왔어요.”
육장봉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장모 앞에서 이름을 댈 자격도 없단 말인가?’
육장봉은 월령안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래도 그녀의 ‘어머니’가 계신 자리임을 떠올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월령안의 어머니에게 향을 올린 다음 절을 올렸다.
월령안은 옆에 서서 육장봉이 어머니 관 앞에서 아랫사람으로서 예를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내심 평온해졌다.
육장봉의 마음은 이미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아니, 육장봉은 결코 마음을 숨긴 적이 없었다.
* * *
두 사람은 서탑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육장봉이 월령안의 어머니에게 예를 올리고 나서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지명 스님이 서탑 밖에서 기다리다가 두 사람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광원사의 사찰 음식은 맛이 좋았다. 그러나 월령안은 기분이 좋지 않아 많이 먹지는 못했다. 억지로 육장봉과 함께 앉아 있기는 했지만,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더는 먹지 않았다.
“우리…….”
“돌아가고 싶어요.”
월령안은 육장봉에 앞서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거절할 수 없도록 말했다.
“한낮은 너무 무더우니 잠시 쉬었다가 가지.”
월령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깥의 일이 좀 걱정되네요…….”
“걱정하지 마시오. 소씨 가문 문인들은 당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오. 조회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오.”
육장봉도 마찬가지로 월령안의 말을 가로챘다.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소씨 가문 문인들이 행동을 멈춘 것은, 전부 육장봉이 어제와 오늘 벌인 행동 때문임은 알고 있었다.
어제는 기세등등한 선물 작전으로 소씨 가문의 문인들을 한 걸음 물러서게 했다.
오늘은 그녀를 위해 대조회에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소씨 가문 문인들에게 그의 결심을 보여주었다.
소씨 가문 문인들이 육장봉과 척을 지려는 게 아닌 이상, 그들은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작은 일일 뿐이오.”
육장봉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 기뻤다. 월령안이 자신이 그녀를 위해 한 일을 알아주고, 그에 감사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늘 일 때문에 대장군께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요?”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육장봉이 작은 일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정말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와 함께 성은 나가느라 대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황제에 대한 불경이었다.
황제에 대한 불경죄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폐하는 기껏해야 성지를 내려 나를 훈계하고 또 내 권력의 일부를 빼앗아 갈 것이오.”
이것은 그가 원하는 바였다.
“그렇다면 마음이 놓이네요.”
월령안은 마음을 놓고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웃었다.
이제 요녀라는 악명은 더더욱 벗을 수 없게 되었다.
월령안이 느긋해지자, 육장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광원사는 경치가 좋으니 나와 함께 걷지.”
조금 전에 육장봉에게 크게 신세를 졌다. 월령안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결국 거절하지 않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
육장봉은 광원사를 잘 알고 있었다. 월령안을 데리고 여러 사람을 피해 뒷산의 월계화(月季花) 밭으로 갔다.
광원사의 월계화는 아주 유명했다. 일 년 사계절 내내 활짝 피어 많은 사람이 구경하고 싶어 했지만, 광원사에서는 매년 팔월에만 월계화 밭을 개방했다. 평소에는 지키는 사람을 두어, 외부 사람의 출입을 금지했다.
물론, 육장봉은 그 ‘외부 사람’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사전에 광원사에 이야기해 꽃밭을 지키던 승려마저 물렸다.
지금 커다란 월계화 밭에는 육장봉과 월령안 두 사람만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자 은은한 꽃향기가 확 풍겨 왔다. 육장봉은 고개를 돌려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광원사의 월계화는 아주 유명하오. 매년 많은 사람이 보러 온다더군.”
이곳은 이번 여정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명월산장에서 월령안이 꽃 사이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본 뒤로, 육장봉은 어디에 월령안과 어울리는 예쁜 꽃이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당연히 광원사에 있는 이 꽃밭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월령안의 눈에는 기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한순간, 육장봉은 마음속에 실망과 함께 자신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월령안은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잘 알았다. 무엇이든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는 월령안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몰랐다.
그 바람에 그는 매우 좌절감을 느꼈다. 설령 싸움에서 지더라도 이렇게까지 좌절감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불과 한순간이었다. 육장봉은 또다시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았다. 언젠가는 그도 월령안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가 보내는 선물도 더는 그가 보내고 싶은 것이 아닌, 월령안이 좋아하는 것을 보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