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오늘 가장 기뻤던 일
월령안은 순간 멍해졌다.
“벌충해요? 그때 없던 것을 벌충한다고 되나요?”
“안 되겠소?”
육장봉은 월령안의 살짝 붉어진 눈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이래도 안 되는 거요?’
육장봉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러자 그의 표정은 쌀쌀맞고 냉혹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사실 더없이 긴장한 상태였다.
그는 오랫동안 이런 심정을 느껴보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아군보다 몇 배나 많은 병마를 마주했을 때도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그는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 같았다. 월령안이 유일한 심판자였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손에 들린 선물을 서둘러 받지 않았다. 대신 신중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평온한 얼굴은 눈빛마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긴장도, 기대도 없었다. 이 일이 지극히 평범한 일이라는 듯했다.
월령안은 그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 남자가 왜 하필 오늘을 골라 생일선물을 벌충해 주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열여덟 가지 선물들은 한눈에 보아도 오늘 급하게 준비했던 것이 아니었다. 사전에 준비했던 것이었다. 급하게 준비한 것은 기러기 열여덟 쌍뿐이었다.
‘내가 곧 소씨 가문 문인들의 저격을 받게 될 거라서, 오늘 서둘러서 떠들썩하게 생일선물을 주는 건가?’
월령안은 마음속의 감정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다. 감동도, 막연함도, 갈팡질팡함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얄궂음을 더욱 크게 느꼈다.
그녀와 육장봉은 늘 엇갈리고는 했다.
월령안은 마음속 씁쓸함을 억눌렀다. 육장봉의 손에 든 비단함을 받아 들더니 웃었다.
“물론 벌충할 수야 있죠.”
아무리 뛰어난 복원가라고 해도, 복원한 뒤에는 흔적을 남긴다. 복원한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복원한 흔적도 사라지지 않는다.
육장봉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일시에 변했다. 그는 월령안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벌충했는데 왜 아직도 언짢은 모습이지? 내가 뭘 잘못했나?’
월령안의 그 보잘것없는 슬픔은 육장봉의 ‘사람 잡는 눈빛’에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약간 겁을 먹었다. 손안에 든 비단함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열어 봐도 될까요?”
육장봉의 눈빛이 조금 무서웠다. 그녀는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하오.”
육장봉이 온몸에서 풍기던 날카로운 기세는 월령안이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 순간, 모두 사라져버렸다.
‘월령안 앞에서는 나도 원칙이란 게 없군.’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굴의 싸늘함도 꽤 옅어졌다.
상관없었다. 어쨌든 이런 일은 이번이 끝이었다.
앞으로는 월령안이 어디에 있든지, 해마다 생일선물은 그가 직접 준비해서 직접 가져다줄 것이다. 앞으로는 이렇게 벌충할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은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변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육장봉이 더는 불쾌해 하지 않는 것 같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육장봉의 기세는 너무 강했다. 일단 그가 기세를 내보이기만 하면 그녀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육장봉의 시선을 받으며 비단함을 열었다. 안에 든 누리끼리한 종이를 꺼내 펼쳐 보았다.
“낙원의 계약서?”
월령안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눈을 치켜떴다.
“맞소.”
육장봉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계약서를 위해 그도 공을 많이 들였다. 범씨 가문도 뒷배가 없는 게 아니었다. 육장봉은 이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월령안은 손에 든 계약서를 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싫으면 그냥 태워버리시오.”
육장봉은 육일이 보내온 소식을 떠올렸다. 월령안이 자기의 편지를 보지도 않고 찢어 버린 다음 사람을 시켜 태웠다고 했다.
육장봉은 마음이 또다시 언짢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월령안을 탓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월령안의 편지를 한 통만 버린 것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결국 더 많은 잘못을 한 것은 자기 쪽이었다.
“좋아요. 어머니께 태워 드려야겠네요.”
월령안은 그녀가 편지를 태워버렸다는 사실을 육장봉이 알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럼 어쩔 건데?’
육장봉이 그 일을 까놓고 말할 자신이 있다면, 그녀도 그와 대판 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육장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 함께 가겠소.”
“내일은 조회에 참석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월령안이 의아해서 물었다.
육장봉은 가볍게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소. 누구도 감히 당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오.”
설령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소씨 가문 문인들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더 빨리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육장봉은 언제나 기회를 잡는 데는 대단히 능숙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월령안에게 함께 성 밖으로 나가 낙원의 계약서를 그녀의 어머니에게 태워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밤이 너무 깊어 피곤하다는 이유로 월씨 저택에서 나가려 하지 않았다.
“대장군…….”
월령안이 완곡하게 거절하려 할 때였다. 육장봉이 선수를 쳤다.
“내가 이틀 밤 동안 눈을 붙이지 못했소. 조금 전에도 힘들어서 하마터면 벼랑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소.”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틀 밤이 아니라 사흘 밤낮을 눈을 붙이지 않았더라도 미끄러져 떨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녀 앞에서 불쌍한 척한 것뿐이었다.
아쉽게도 월령안은 거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육장봉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말했다.
“먹을 것이 있소? 온종일 식사를 하지 못했소.”
분명 육장봉의 표정과 말투는 차분했고, 아무 감정의 기복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에 ‘서러움’이 서려 있는 것 같고, 말에서는 ‘가련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눈이 침침해진 듯했다. 낮에 겪은 감정 기복이 너무 심했기에 진이 빠져서, 귀도 제대로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착각을 할 리가 없다.
육장봉의 얼굴은 쌀쌀했고, 아무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월령안…….”
한참이나 지나도 월령안이 대답하지 않자, 육장봉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눈빛에는 원망스러움이 섞여 있는 듯했다.
월령안은 한순간 자기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육장봉의 ‘원망스러움’이 섞인 눈빛에 결국 타협하고 말았다. 하인에게 육장봉의 야식을 준비하게 했다. 또, 육장봉의 ‘서러움 공격’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서둘러 덧붙였다.
“식사를 다 하시거든 일찍 돌아가 쉬세요.”
육장봉은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좋소.”
무슨 일이든지 적정선에서 그쳐야 한다. 월령안은 오늘 이미 한발 물러섰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월령안은 왠지 모르게 한시름 놓였다. 이제는 육장봉을 조금 더 편한 눈길로 볼 수 있었다.
사실 육장봉이 계속 남겠다고 고집하면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육장봉이 한발 물러서자, 월령안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더니 집사에게 설옥고 한 병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자신은 그와 함께 화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내내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었다. 다만 싸늘한 밤바람만 두 사람의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가끔 두 사람의 머리채가 나부끼다가 끝부분이 서로 살짝 얽히기도 했다. 그러나 둘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먼저 제자리로 내려앉았다.
월씨 가문 하인은 모두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월령안이 분부하자, 주방에서는 곧 뜨거운 죽과 간식을 올렸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하인이 간식과 반찬을 한 상 차려냈다.
육장봉은 사양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더니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천천히 먹어!’
느릿느릿 간식을 먹고, 느릿느릿 죽을 마셨다. 월령안이 화가 날 정도로 느려 터진 속도였다.
그녀는 완곡하게 몇 마디 일렀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멍하니 함께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은 반 시진이 넘도록 느릿하게 식사했다. 그녀가 짜증이 난 듯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자, 그제야 정상적인 속도로 식사했다. 곧 한 상 가득 차린 음식을 깨끗이 비웠다.
배불리 먹은 육장봉은 마치 나른한 고양이처럼,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줄곧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물었다.
“월령안, 오늘 기뻤소?”
“기뻤어요.”
월령안은 솔직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육장봉에게는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가장 기쁘게 한 건 육씨 가문의 영패를 받은 것도, 낙원의 계약서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그녀가 열심히 노력하면 비슷한 종류를 스스로 얻을 수 있었다.
그녀가 가장 기뻤던 일은 육장봉의 답장을 찢어 버리고, 집사에게 그 답장을 태워버리라고 한 일이었다.
삼 년 동안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래서 몇 번이고 다짐했다.
만약 언젠가 육장봉이 답장을 하면, 절대로 뜯어보지 않고 태워버리리라. 육장봉에게 진심이 짓밟히는 게 어떤 건지 맛보여 주리라.
아쉽게도 그녀는 쫓겨날 때까지 육장봉에게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이번 생에는 그럴 기회가 없으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육장봉이 그녀에게 그럴 기회를 주었다.
오랫동안 마음을 짓누르던 그늘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하늘이 훤히 밝아지는 것처럼 느꼈다.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또 원하는 게 있소?”
그가 보낸 것은 전부 자기가 월령안에게 주고 싶은 것이었다. 월령안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월령안의 열아홉 살 생일은 아직 멀었다. 그래도 지금 말해 주면 사전에 준비할 수 있었다.
“제가 무엇을 원하든 대장군께서 다 들어 주실 건가요?”
월령안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 순간, 육장봉은 그녀가 사람을 홀리는 여우처럼 느껴졌다. 촛불 아래 그 미소는 사람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육장봉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럼 저는 대장군께서…….”
월령안의 얼굴의 미소가 점점 더 화사해졌다.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월령안은 미소를 거두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제게서 좀 멀어지셨으면 좋겠어요.”
“……는 못할 것 같군.”
육장봉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분위기도 조금 차가워졌다.
하지만 월령안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 두 손을 벌려 보였다.
“보세요……. 대장군도 뭐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음부터는 함부로 약속하지 마세요.”
“이런 게 재밌소?”
육장봉은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아가씨는 이렇게 재기발랄하고 예측불허였다.
월령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밌네요.”
“그럼, 당신이 기쁘면 됐소.”
육장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월령안이 말하기 전에 일어섰다.
“내일 진시 삼각에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
육장봉은 그 말만 남기고 몸을 돌려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침 집사가 줄곧 화청 밖에서 지키고 서 있었다. 육장봉이 그의 곁을 지나가기 전에 겨우 설옥고를 내밀 수 있었다.
“아가씨께서…….”
“너희 주인 아가씨가 나를 아끼는 건 나도 안다.”
육장봉은 설옥고를 받아 들고 웃었다.
마침 나오던 월령안은 이 말을 듣자, 말문이 턱 막혔다.
‘육장봉은 지쳐서 죽어도 싸.’
육장봉은 설옥고를 손에 꼭 쥐고 성큼성큼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