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366)화 (366/1,004)

366화 내가 제시간에 왔소!

「나의 아내에게」

월령안은 편지 봉투 위의 글자를 보며 웃었다.

“나의 아내라고?”

천여 일 동안 기다리고 기대했던 답장이었다. 그런데 육장봉의 아내가 아니게 된 지금에야 이런 편지를 받다니 정말 우스웠다.

“누가, 누가 당신의 아내란 거야?”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상자 속의 편지를 꺼내 갈기갈기 찢은 다음 힘껏 던져 버렸다.

“육장봉, 당신이 그렇게 잘난 줄 알아? 내가 당신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쓸 때 당신은 한 통도 보지 않고 답장 한 통도 보내지 않았잖아. 뭘 믿고 내가 당신의 답장을 귀하게 여길 거로 생각한 거야?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당신이 주면 내가 다 받아야 해? 난 안 받아!”

바닥에 가득 널려 있는 종잇조각을 보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힘껏 닦았지만, 닦으면 닦을수록 눈물이 점점 더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종잇조각을 짓밟고서 씩씩거리며 말했다.

“고작 편지 한 통이잖아? 월령안, 너 정신 좀 차려. 네가 육장봉에게 그렇게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그 사람이 답장을 한 번이라도 했어? 거들떠보기나 했어? 고작 편지 한 통 가지고 왜 이래! 육장봉에게 그럴 재주가 있으면 지난 삼 년 동안 쓴 편지에 전부 답장하라고 해!”

“아가씨, 괘, 괜찮으십니까?”

집사는 울었다 웃었다 하는 월령안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월령안은 손등으로 힘껏 눈물을 훔쳤다.

“땅바닥에 떨어진 걸 전부 줍게.”

집사는 이 말을 듣고 몰래 탄식했다. 아가씨가 후회할 줄 알고 있었다.

“모아서 태워버려!”

“아가씨, 뭐라고요?”

집사는 잠깐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전부 주워다 태워버려라. 알겠느냐?”

‘집사는 내가 뭘 할 거로 생각한 거야? 설마 이 조각들을 모조리 주워 붙이라고? 참 웃기지도 않네!’

그녀는 육장봉이 편지에 뭐라고 썼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낸 편지에 육장봉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가씨, 정말로 태웁니까?”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까?’

집사는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서는 그 뜻이 훤히 드러났다.

“그래. 시간이 많이 늦었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하게. 목욕하고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겠네.”

월령안은 몸을 돌려 안뜰로 걸어갔다.

“아가씨, 그리고…….”

집사가 한 걸음 쫓아가자, 월령안의 말이 들렸다.

“물건은 받아 두게. 내일 볼 테니까. 또 편지면 그냥 태워버리게. 굳이 내게 보여 줄 필요 없네.”

집사는 한숨을 쉬었다. 월령안이 가고 난 다음, 땅바닥에 떨어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웠다. 손톱만 하게 조각난, 붙이려야 붙일 수 없는 편지를 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우리 아가씨가 육 대장군께 보낸 편지도 이런 꼴을 당한 건 아닐까? 어쩌면 이보다 더 비참할 수도 있겠구나. 찢기조차 귀찮으니 그냥 사람을 시켜 태워버렸을 수도 있겠군.’

집사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더는 속상하지 않았다. 육 대장군이 딱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작은 화로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손에 든 조각들을 화로 안에 던졌다. 그리고 종잇조각이 재가 되는 것을 보며 조용히 탄식했다.

“진심이 버려지고 남에게 짓밟히는 게 힘드시겠죠? 대장군, 애초에…… 대장군께서 아가씨를 육씨 가문 부인으로 대접하고, 아내로서 존중을 해 주었다면 오늘 아가씨가 이렇게 편지를 찢지도 않았을 겁니다.”

끼룩끼룩!

어찌 된 영문인지 기러기 열여섯 쌍, 서른두 마리가 동시에 날카롭고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내었다. 마치 집사의 말에 대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집사는 깜짝 놀라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끼룩끼룩!

서른두 마리나 되는 기러기가 계속 울자 시끌벅적해졌다. 끊임없이 날갯짓하는 게, 멀리 날아가 버리려는 것만 같았다.

집사는 기러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도 참 불쌍하구나.”

끼룩끼룩!

기러기는 여전히 울음소리로 집사에게 대답했다.

기러기 한 마리가 울자 나머지 기러기가 전부 따라 울었다. 기러기 한 마리 소리도 귀에 거슬리는데, 기러기 떼가 울부짖자 사람을 미치게 할 정도였다.

집사는 이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 기러기를 달래려고 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이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 기러기들도 아가씨와 마찬가지로 점심때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이놈들에게 먹을 걸 좀 가져다주어라.”

집사는 하인에게 분부했다. 또 직접 주방에 가서 월령안에게 먹을 것을 좀 가져가라고 분부했다.

월령안이 목욕하고 나왔을 때 탁자 위에는 간식과 죽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치우라고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감정이 격해져서 몰랐지만, 지금은 정말 배가 고팠다.

목욕하고 식사하느라 또 반 시진이 지나갔다.

육오가 열일곱 번째 선물을 가져왔다. 기러기 한 쌍과 비단함 하나였다.

“대장군께서 이 선물은 꼭 월 낭자께 직접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네.”

육오는 비단 함을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에 편지가 있습니까?”

집사는 육오를 어찌할 방법이 없어 일단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닐세.”

육오가 확실하게 대답했다.

‘장군께서 어떻게 같은 선물을 보내실 수 있겠는가? 그건 너무 무성의하지.’

“육오 장군,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집사로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월령안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막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참이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눈만 감으면 육장봉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도 하필이면 육장봉이 경성에 돌아오던 날, 말에 타고 그녀를 내려다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만 떠올려, 월령안!”

월령안은 화가 나서 혼잣말을 하고는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등불을 켜고 책을 읽을지 말지를 망설였다.

그때 문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육 대장군의 호위병이 선물을 반드시 아가씨께 드린 다음에야 가겠다고 합니다.”

“무슨 선물이길래 꼭 내게 직접 줘야 한다더냐?”

월령안은 한창 ‘육장봉’에게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하던 참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녀의 말을 듣자, 순식간에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아무튼 오늘 이 일을 매듭짓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모양이다. 월령안은 하녀를 들어오라 해서 옷시중을 받은 다음 등롱을 들고 나갔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등껍질 속에 숨은 거북이처럼 마냥 움츠러들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냥 자시까지 기다려서 열여덟 번째 선물을 받고 나야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월령안은 화가 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눈 깜짝할 사이에 앞뜰에 도착했다.

“월 낭자.”

육오는 눈치가 빠르게, 재빨리 앞으로 다가왔다.

“가져오세요.”

월령안은 쓸데없는 인사말 한마디 없이 손을 내밀었다.

“월 낭자, 이건 저희…….”

육오가 비단함을 공손하게 올렸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월령안은 비단함을 단번에 가로채 열어 보았다.

비단함 속의 묵직한 영패를 보자, 월령안은 입꼬리를 올려 냉소를 지었다.

“육씨 가문 영패는 참 귀중한 게 분명하군요. 어쩐지 직접 나와서 받으라고 하더라니.”

육씨 가문의 영패는 육씨 가문의 사병(私兵)을 움직일 수 있었다. 육장봉의 친위대도 어떤 의미에서는 육씨 가문의 사병이었다.

이 영패를 가지고 있다면, 육씨 가문의 모든 무력을 장악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당연히 보통 귀한 물건이 아니었다.

“월 낭자,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영패를 월령안에게 전달하자, 육오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손히 물러갔다.

월령안도 배웅하지 않았다. 대신 집사에게 의자를 가져오라고 했다.

“아직 마지막 선물이 남았잖느냐? 여기서 기다리겠네.”

어차피 돌아가 봤자 잠들지도 못할 것이다.

“네, 아가씨.”

집사는 의자 하나를 가져오게 했다. 월령안이 자리에 앉자, 집사도 그 뒤에 서서 함께 기다렸다.

집사뿐만 아니라 월씨 가문의 모든 하인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다들 월령안의 뒤에 서서 육 대장군의 마지막 선물을 기다렸다.

* * *

그 시각, 육 장군은 말을 타고 밤길을 날 듯이 달려 성문 입구에 이르렀다. 성에 들어선 뒤에도 한시도 멈추지 않고 월씨 저택으로 달려갔다.

월령안의 열여덟 살 생일 선물은 직접 주고 싶었다.

이제 자시까지는 향 반 개가 탈 시간이 남았다.

말 한 마리가 송취 골목으로 날 듯이 달려갔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는 마치 전고(戰鼓) 소리처럼 급박한 박자감을 띠고 있었다.

송취 골목 양옆으로 늘어선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 소리를 들었다.

단잠에서 깬 이들은 참지 못하고 불평했다.

“반 시진에 한 번씩, 이거 사람더러 죽으라는 거 아냐?”

“진시부터 자시까지, 시작과 끝이 확실하군. 오늘 하루는 아주 완벽해.”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은 줄곧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바깥의 말발굽 소리를 듣자, 드디어 마음을 놓고 잠을 청했다. 한창때의 소녀들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부러워하며 잠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정탐꾼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송취 골목 밖에서 기다리며 입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육장봉이 나타나는 순간, 그들은 하나같이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육장봉의 말이 다가오기도 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철수하더니, 최대한 빨리 주인에게 보고하러 돌아갔다.

날이 밝으면 대조회가 열릴 것이다.

육장봉의 오늘과 어젯밤 행동은 대조회에서 여러 사람이 월령안을 어떻게 대할지, 그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육장봉은 송취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주변의 정탐꾼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런 정탐꾼이나 그들 배후에 있는 사람도 전부 안중에 두지 않았다.

남들은 그가 오늘 한 모든 일에 이러저러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행동에 옮겼을 뿐이다.

말이 서기도 전에, 육장봉은 새장을 품에 안고 뛰어내렸다. 그리고 월씨 저택의 대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쾅쾅쾅!

“문을 열거라!”

“왔습니다! 육 대장군의 목소리입니다!”

“육 대장군이 직접 오셨습니다!”

육장봉이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는 바람에 월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의 목소리에 익숙했다.

문지기는 육장봉의 목소리를 듣자,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문지기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바깥뜰에서 기다리던 월령안에게도 자연히 들렸다.

“육장봉이 왔느냐?”

그녀는 본능적으로 일어섰다. 다리를 들어 한 발짝 내디디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왜 일어나서 육장봉을 맞으러 가야 하지?’

그녀가 도로 앉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바람처럼 다가온 육장봉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밤바람과 피비린내가 풍겼다. 그는 차가운 얼굴에 아주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월령안, 내가 제시간에 왔소!”

그는 자시가 되기 일 초 전에 맞춰 도착했다.

오늘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

그는 오늘 하루 동안 열여덟 개의 선물을 모두 주었다.

“월령안, 선물이오.”

육장봉은 손에 든 새장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비단함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생일선물이라고요?”

육장봉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몸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얼굴에 이리저리 긁힌 상처도 보았다.

그것이 바위와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임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몇 군데는 흙까지 묻어 있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에 뭐 하러 갔던 거야?’

“음. 지난 열여덟 해 동안의 걸 모두 벌충했소.”

다른 누군가에게 있는 것이라면 그의 월령안에게도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