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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62)화 (362/1,004)

362화 이름을 아주 제대로 지었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최일은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그 ‘봉’ 자의 글씨체를 어디서 보았는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가 그 도장의 글씨체가 익숙하다고 했잖아요? 제 셋째 삼촌의 방에 있던 서화에 글을 쓴 사람이 현음 장공주였어요.”

그 서화는 그의 셋째 삼촌이 소중히 간직하는 보물이었다. 그도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라서,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육장봉의 어머니가 현음 장공주라는 건가요? 이 옥팔찌는 현음 장공주의 물건이고요?”

월령안은 손에 든 옥팔찌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육장봉의 신분은 그녀의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의 메마른 상상력으로는 육장봉의 생모가 현음 장공주임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니, 또 의외라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황제가 육장봉을 대하는 태도는, 그 둘의 관계가 보통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건 청희 장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육장봉 앞에서 일부러 그의 생모를 들먹이며 비하하려고 했다.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십 년 전에 육장봉이 북요에 간 적이 있으니까, 예상 밖의 일은 아니네요.”

그때 육장봉은 현음 장공주를 만나러 북요에 갔었다. 그리고 북요에서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시신을 가지고 왔다.

그녀와 육장봉의 만남은 어쩌면 하늘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때, 하인이 다급히 걸어왔다.

“아가씨, 육 대장군이 보낸 사람이 아가씨께 선물을 드리러 왔습니다.”

“또 왔어?”

월령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이상하게 나가기 싫어졌다.

그러나 최일이 먼저 일어섰다.

“저는 아주 기대되는군요. 당신의 세 번째 생일 선물로 육장봉이 무얼 주었으려나.”

월령안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최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 령안,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없어요. 육장봉이 보냈는데 받지 못하겠나요?”

“못 받겠어요.”

월령안은 솔직하게 겁을 먹었음을 인정했다.

육장봉이 또 이런 귀중한 선물을 줄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자신이 갚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월령안은 늘 대범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은 최일도 처음 보았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잊었어요? 당신이 삼 년 전에 육장봉에게 선물했던 것들은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이었어요.”

월령안은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옥팔찌를 비단 함 안에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었을 뿐이에요. 그게 뭐라고요.”

“진심으로 진심을 얻는 거죠. 육장봉이 당신에게 주는 이 물건들은 당신이 예전에 육장봉한테 줬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소중한 것들이에요. 누가 더 귀한 걸 줬는지는 따질 수 없어요.”

그러나 최일이 보기에는 육장봉이 월령안보다 못했다.

월령안은 가뭄의 단비를 선물했다. 반면, 육장봉은 기껏해야 금상첨화 정도였다.

“하지만…….”

육장봉의 진심은 너무 늦게 왔다.

삼 년이다. 그녀의 마음이 차갑게 식고 나서야 육장봉의 진심이 왔다.

월령안은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손을 들어 눈가에서 떨어지려는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가요. 세 번째 선물이 무엇인지 보자고요.”

“령안, 무슨 생각이 들든지 간에, 이 선물은 전부 받아야 해요.”

월령안의 기분이 울적해 보이자, 최일은 그녀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까 걱정되었다. 저도 모르게 충고가 나왔다.

“육장봉의 선물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에요. 말 없는 보호예요. 지금 행동으로 소씨 가문 문인들에게 당신은 육장봉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는 겁니다.”

최일은 조금 전에야 육장봉이 왜 하필 오늘을 선택했는지, 월령안에게 하나, 또 하나씩 선물을 보내는지 깨달았다.

내일이 바로 대조회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내일, 소 승상의 문인들은 반드시 월령안을 공격할 것이다. 육장봉은 그들이 손을 쓰기에 앞서, 소 승상의 문인들에게 경고한 셈이었다.

최일로서는 이제 조계안의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조계안이 잠자고 있을 때, 육장봉은 어떻게 월령안을 보호할지 다 생각해 두었다. 둘의 차이가 보통 큰 게 아니었다.

월령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자조적으로 말했다.

“저는 거절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인가요?”

그녀로서는 육장봉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고 오기를 부릴 수가 없었다. 육장봉의 보호가 있다면 그녀도 더욱 편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쟁에서는 교활한 쪽이 이기죠. 당신은 육장봉의 상대가 아니에요. 졌다고 인정하세요. 꼬마 령안.”

최일은 이상하게 월령안에게 조금 동정이 갔다.

육장봉은 훌륭한 장군이었다. 또한, 타고난 사냥꾼이기도 했다.

월령안은 육장봉이 눈독 들인 사냥감이었다. 그녀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육장봉이 월령안에게 주는 세 번째 선물은 육사가 가져왔다.

기러기 한 쌍, 그리고 목마 한 필이었다. 크기는 딱 세 살 먹은 아이들이 탈 만한 것이었다.

월령안은 앞서 받은 두 선물로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과감하게 선물을 받았다.

육사는 활짝 웃으며 한마디 했다.

“월 낭자께서 마음에 드시면 좋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더니, 최일에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최 대인, 저희 장군께서는 최 대인이 월 낭자의 저택에 계시는 걸 아시고, 대인께 안부 인사를 올리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육사는 말을 마치더니 매우 험상궂은 미소를 지었다.

최일은 말없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나는 단지 지나던 길에 들른 것뿐이네. 조금 있다 갈 생각이네.”

물론, 구경을 다 하고 갈 생각이었다.

육장봉을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구경을 끝까지 하지 않으면 크게 손해를 보는 셈이었다.

“최 대인의 말씀은 소인이 잘 전해 드리겠습니다. 월 낭자, 최 대인,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육사는 전혀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났다. 최일과 다투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본인이 최일의 상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북요의 공예품이군.”

육사가 가자마자, 최일은 아까 자기 입으로 한 ‘조금 있다 가겠다’라는 말을 잊어버린 듯했다.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 육장봉이 보내온 목마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옛 물건이긴 하지만, 가지고 논 흔적은 없군요. 세 살 때의 육 대장군은 목마 타는 걸 좋아하지 않았나 보네요.”

월령안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대인께서는 이제 가셔도 될 것 같아요.”

아무리 보아도 최일은 육장봉이 그녀에게 뭘 선물했는지가 궁금한 게 아니었다. 육장봉을 놀리려는 게 뻔했다. 나중에 오늘 일을 가지고 육장봉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네, 조금 있다가요.”

최일은 목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월령안은 최일을 흘겨보며 말했다.

“최 대인의 ‘조금 있다’는 육장봉의 부하가 기러기 열여덟 쌍을 전부 보내온 다음인가요?”

“육 대장군은 오늘 안에 기러기를 열여덟 쌍이나 사냥하지는 못할 거예요. 기러기는 그렇게 쉽게 잡히는 게 아니거든요. 특히 지금 같은 계절이면, 기러기가 멀리 날아가지는 않았더라도 서둘러 둥지를 트느라고 바쁘죠. 산에서 마구 날아다니지 않는다고요. 육 대장군은 아마 오늘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못할 것 같네요.”

최일은 고소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다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갑자기 목마를 집어 들어 뒤집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육 대장군이 이렇게 엉큼한 줄은 몰랐는데요. 일부러 여기에 당신의 이름을 쓴 데다가, 당신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 안에 숨겼군요. 정말 웃겨 죽겠네. 이 이상한 글자만 가지고도 육 대장군을 일 년 동안 놀려줄 수 있겠는데요.”

“뭐라고요?”

최일의 말에 월령안도 호기심이 동했다. 앞으로 다가가 최일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목마의 배에는 과감한 필체로 ‘봉’ 자가 쓰여 있었다. 도장 위의 ‘봉’ 자와 글씨체가 똑같았다.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글씨가 분명했다.

그리고 ‘봉’ 자 안에는 새로 새긴 ‘령’ 자가 있었다.

목마의 ‘봉’ 자는 아주 컸다. 워낙 큰 글자다 보니 중간에 공간이 조금 빈 데가 있었다.

하필 육장봉이 그 중간에 ‘령’ 자를 새긴 것이었다. 덕분에 글자는 이도 저도 아닌, 아주 이상한 글자가 되었다. 멀쩡하던 글자 하나를 망친 셈이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글씨체를 알고 있었다. ‘봉’ 자의 안에 있는 ‘령’ 자는 육장봉이 더한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장봉! 장봉! 육장봉이라, 이름을 아주 제대로 지었네. 당신 이름을 자기 이름 속에 감춘 것은 물론이고, 이렇게 자기 이름을 드러내다니. 참 재미있네요.”(육장봉의 이름 중 '장(藏)'은 숨긴다는 뜻. '봉(鋒)' 자에 '령(寧)' 자를 몰래 감추고(藏), 이 감춘다는 행위(藏)와 목마에 쓰인 봉(鋒) 자로 '장봉'을 암시했다 - 역주)

최일은 그 우스꽝스러운 글자를 보면 볼수록 웃고 싶어졌다. 육장봉이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령’ 자를 ‘봉’ 자 사이에 새겼는지 궁금했다.

육장봉의 엄숙한 얼굴로 목마를 안고 진지하게 글자를 새기는 모습을 떠올리자, 최일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장면은 조금 훈훈하게 느껴졌다.

“최 대인, 그만하시면 됐어요. 육장봉은 그렇게 쉽게 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월령안은 최일의 손에서 목마를 빼앗았다. 보기에는 가벼워 보였던 목마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월령안은 하마터면 목마를 곧바로 떨어트릴 뻔했다.

“이런 구닥다리 수법은 변경의 열몇 살 되는 애들도 안 쓸 거예요. 육 대장군이 이런 걸 써먹다니. 역시 순정파였네요.”

최일은 일어나서 손을 털었다. 그는 새장 안에서 푸드덕거리는 기러기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령안, 당신도 참 안목이 뛰어나네요.”

사치스럽고 실속 없는 변경에서 육장봉이 보여 준 순정은 정말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것이었다.

월령안은 사람을 제대로 보았다.

그녀는 목마를 안은 채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진시가 지난 뒤, 육 대장군은 반 시진마다 계속 사람을 시켜 기러기 한 쌍과 생일선물을 송취 골목의 월씨 저택으로 보냈다.

처음에 기러기를 담은 것은 나무 상자였으나, 네 번째 선물부터는 새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송취 골목 부근의 사람들은 육장봉이 월씨 저택에 기러기를 보냈고, 게다가 한 쌍만 보낸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송취 골목으로 모여들어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월령안은 이 사실을 몰랐다.

그 무렵 그녀는 화청에 앉아 눈앞에 놓인 생일선물을 하나하나 마주하고 있었다.

진시부터 오시(午時 – 오전 11시~오후 1시까지)까지 모두 여섯 개의 선물을 받았다.

돌 선물은 도장, 두 살 선물은 옥팔찌, 세 살 선물은 목마, 네 살 선물은 은방울, 다섯 살 선물은 작은 연, 여섯 살 선물은 나무 호각이었다.

나무 호각의 공예를 보니 최근에 만든 것 같았다. 위에는 명월청봉도(明月靑峰圖)가 새겨져 있었다.

월령안은 그게 눈에 익다고 여겨졌다. 문득 일전에 육장봉이 암위를 통해 그녀에게 보냈던, 그림을 새긴 호각이 떠올랐다.

월령안은 목에 건 호각을 꺼내 나무 호각과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두 그림이 한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음을 알아차렸다.

이 조각들은 모두 육장봉이 직접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짐작이 맞다면, 육장봉은 그녀가 잘못 보낸 그 조각도를 사용했을 것이다.

월령안은 그 두 호각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눈시울 주변이 시큰해져서 괴로웠다.

육장봉은 정말 정성을 쏟았다.

그녀는 육장봉의 이까짓 수단에 현혹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사이, 마음속 깊은 곳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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