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당신에게는 남다른 사람
최일은 육장봉이 벌이는 일을 구경하면서도 일이 커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선물이 열여섯 개나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육삼이 어떻게 에둘러 설득하든, 직접적으로 협박하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구경을 다 하기 전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저희 장군은 거친 분이십니다. 기분이 나쁘시면 주먹으로 이야기를 하시지요. 최 대인, 잘 생각해 보십시오!”
육삼은 최일을 어쩔 수가 없었다. 좋은 말, 거친 말 다 해 보았지만, 최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장군을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최일이 눈치껏 얼른 사라져 주기를 바랐다.
육삼이 이 말을 하지 않았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이 말을 꺼내자, 최일은 더욱 가지 않으려고 했다.
최일은 크게 웃으며 월령안을 돌아보았다.
“령안, 육 대장군이 아직도 기러기 열여덟 쌍을 잡지 못한 모양이군요. 아까 내가 산 그 한 쌍을 육 대장군에게 팔면 어떨 것 같아요?”
“당장…….”
육삼은 화가 나 어쩔 줄 몰랐다. 하마터면 최일에게 입을 닥치라고 말할 뻔했지만, 그의 신분과 그의 예리함을 떠올렸다. 결국 화를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최일은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더 말하다가는 바닥까지 탈탈 털릴 것 같았다.
육삼은 코웃음을 치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도도하게 말했다.
“고작 기러기 열여덟 쌍을, 저희 장군께서 못 잡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최 대인, 제멋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저희 장군의 능력을 대인과 비교할 수는 없지요.”
“믿고말고. 나는 대장군의 기러기 열여덟 쌍을 기다리겠네.”
최일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육삼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두고 보시지요, 최 대인.”
육삼은 속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그래도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잦고, 적게 하면 실수가 적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최일과 더는 말을 섞지 않으려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큰소리를 쳤다. 그다음 월령안에게 작별 인사를 하더니 사람을 거느리고 떠나갔다.
월씨 저택의 대문을 나서자마자, 육삼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최 대인더러 뭘 두고 보라고 한 거지? 이건 대장군과 월 낭자의 일이잖아! 최 대인도 너무 교활하군. 날 떠본 걸 둘째치고, 날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다니. 안 되겠다. 이 일은 바로 대장군께 알려야겠다. 대장군께서 최 대인을 혼내시게 해야지.”
그로서는 최 대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최 대인도 그들 장군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최 대인, 두고 봅시다!’
육삼이 떠나가자, 최일은 얼굴의 웃음기를 거두었다. 비단함을 움켜쥔 채 태연한 척하는 월령안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갔으니 억지로 버티지 마시지요. 울고 싶으면 울고, 욕하고 싶으면 욕해요. 아무도 비웃지 않을 거예요.”
“대인께는 절 비웃을 기회를 안 드릴 거예요.”
월령안은 손에 든 비단함을 다시 한번 꼭 움켜쥐고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야 돌아서서 최일에게 홀가분한 미소를 띤 얼굴을 보였다.
“십몇 년 치 선물을 받는 것뿐이에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걸요. 육장봉이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죠. 저는 구경이나 할 거예요.”
‘난 절대 육장봉의 얕은수에 감동하거나 하지 않을 거야.’
그녀가 돈을 뿌리며 그의 기쁨을 사려고 했을 때, 육장봉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최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월령안의 체면을 봐주기는커녕 바로 그녀의 허세를 꼬집었다.
“육장봉의 이런 행위는 귀족 여인들에게는 투박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겠죠. 그들에게는 어쩌면 아름다운 시 한 수보다 덜 감동적일지도 몰라요. 그들은 마음에 담아 두지 않겠지만, 당신은 다를 거라고 믿습니다. 령안은 진실한 사람이니까요.
실속 없는 허황 된 것들을 많이 보았을 테니, 육장봉이 한 것은 당신의 약한 부분을 찔렀겠지요.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거예요. 더구나 육장봉에게 많은 정성을 쏟았잖습니까. 육장봉은 당신에게는 남다른 사람이에요.”
월령안은 더는 얼굴의 미소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최일을 노려보며 코가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도 참, 하루라도 얄밉게 굴지 않으면 어디가 덧나요?”
“진실한 말은 늘 얄미운 법이죠.”
최일은 월령안의 앞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살짜리 꼬마 령안이는 혼자가 아니니까 잠시 기댈 수 있게 어깨를 빌려줄 수도 있어요.”
“고마워요. 하지만 이젠 필요 없어졌어요.”
월령안의 마음속에 약간 남아 있던 감동과 우울은 최일 덕분에 산산조각이 났다. 도저히 되돌릴 수가 없었다.
‘최일, 이 사람은 분위기를 깨는 데는 고수라니까. 정말 얄미워.’
그래도 그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필요 없다고요? 그럼 이제 육 대장군, 그 풍류라고는 모르는 인간이 어떤 선물을 보냈는지 볼 수 있을까요?”
월령안의 눈에 드리웠던 우울한 기색이 제법 사라지자, 최일도 더는 그녀를 놀리지 않았다.
진심이란 소중하게 다뤄질 가치가 있다.
월령안이 감동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월령안이 감동하는 동시에 이성을 유지하기 바랐다.
청주 월씨. 이 가문이 무엇을 대표하는지, 남들은 몰라도 최일은 알고 있었다.
지금의 월령안에게는 사랑을 논할 만한 밑천이 없었다.
최일은 늘 이렇게 총명하고 만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월령안은 최일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자, 그를 정말 미워할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미 약속을 했으니 어길 수 없었다.
“이 기러기 한 쌍은 일단 기르는 거로 해라.”
월령안은 육삼이 들고 들어온 기러기를 잊지 않았다. 가기 전에 특별히 한마디 지시했다.
육장봉이 인제 와서 벌충하는 게 우습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최일은 월령안과 반걸음 뒤떨어졌다. 그는 전혀 자신을 손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 월씨 가문의 하인에게 자연스럽게 분부했다.
“방금 내가 산 그 기러기도 주방에 죽이지 말라고 전하게. 아주 비싸게 팔 거니까 살려 두어라.”
월령안은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역시 함께 노는 사람들의 본성은 비슷하구나. 하나같이 자기가 손님이라는 자각이 없다니까.’
월령안과 최일은 화청으로 돌아왔다. 그녀 앞에는 비단함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비단 함 위에는 칼로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하나는 ‘월령안 돌’, 다른 하나는 ‘월령안 두 살 생일’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육장봉의 글씨가 맞아요. 정말 정성을 쏟았네요.”
최일은 월령안과 내외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육장봉이 정성을 쏟을수록 월령안은 더욱 빨리 빠져들 것이다.
월령안에게는 돈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살 수 있었지만, 유독 진심만은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육장봉이 월령안에게 바친 것은 그의 정성과 진심이었다.
승리를 거두려면 마음을 공략하라.
‘육장봉은 정말 무서운 남자로군.’
최일은 몰래 고개를 저었다. 속으로는 점점 더 조계안을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계안과 육장봉은 같은 급이 아니었다. 육장봉이 이제는 정성과 진심까지 쏟기 시작했으니 조계안이 무엇으로 육장봉과 겨루겠는가.
월령안은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최일의 기대를 받으며, 육장봉이 준 돌 선물을 열었다.
손바닥만 한 비단 함 안에는 작은 도장이 들어 있었다. 낡은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월령안은 도장을 꺼내 뒤집어 보았다. 도장 위에는 ‘봉’ 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봉’ 자는 육장봉의 글씨체가 아니었다.
“이 글씨체는……. 아주 눈에 익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최일은 도장 위의 글씨를 보자, 표정이 드물게 진지해졌다.
“이건 분명히 육장봉의 윗사람이 그의 돌 선물로 줬을 겁니다. 아주 좋은 양지옥으로 만들었군요. 결이 세밀하고 반짝거리면서도 부드럽지요. 도장의 변두리도 둥글고 투명해요.
아마도 육장봉이 좋아해서 자주 손에 쥐고 놀았나 보군요. 그래서 옥을 이렇게 잘 보관했을 겁니다.”
월령안은 도장을 손 위에 올려놓고 꼭 움켜쥐었다. 그녀의 얼굴은 우수로 가득했다.
육장봉이 그녀에게 준 돌 선물은 대단히 귀한 것이었다.
이 도장은 육장봉의 손에서 매우 훌륭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이로 보건대 이 도장이 그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월령안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 선물에 전혀 감동하지 않았고,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리라.
육장봉은 자기가 가장 좋다고 여기는 물건을 그녀에게 주었다.
마치 그동안 그녀가 가장 좋다고 여긴 모든 것을 육장봉에게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육장봉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리석었다. 너무 바보 같았다.
그들처럼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단순하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마음속의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도장을 손에 들고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도로 넣었다.
“이 선물은 너무 귀중해요. 받을 수 없어요.”
그녀는 비단함을 닫고 한쪽으로 치웠다.
그러나 최일이나 월령안이나, 모두 이걸 돌려줄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 선물은 월령안이 받을 수 없더라도 받아야만 했다.
월령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두 번째 비단함을 열었다.
비단 함 안에는 한 쌍의 작은 옥팔찌가 들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양지옥으로 만든 것으로, 새것이 아니었다. 색깔이 어두운 것을 보니, 주인이 오랫동안 만지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최일은 힐끗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몰랐는데 꼬마 령안은 두 살 때 아주 통통했던 모양이네요. 이 옥팔찌는 작지 않군요. 손목이 너무 가늘면 낄 수가 없을 텐데.”
마음속의 말로 표현할 수 없던 감정은 또 한 번 최일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만 좀 하세요!”
‘하여튼 분위기 깨는 데 뭐 있다니까.’
월령안은 퉁명스럽게 최일을 흘겨보았다.
“우리는 친구가 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예전처럼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예의를 차리는 사이가 아주 좋을 것 같네요.”
거리를 유지할 줄 알고, 예의가 바른 최일은 말도 좀 더 듣기 좋게 했다. 이렇게 사람의 아픈 구석을 찌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최일이 있었기에 망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 혼자서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최일은 웃더니 비단 함 안의 옥팔찌를 가리키며 말했다.
“꼬마 령안, 정말로 이 옥팔찌가 눈에 익단 말입니다. 꼭 황궁에서 나온 물건 같습니다만.”
“육장봉에게 황궁의 물건이 있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육장봉과 황제의 관계만 봐도 그러했다. 황궁의 물건 중 옥새만 빼면, 육장봉이 마음에 든 물건은 모두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육장봉이 누가 착용했을지도 모르는 낡은 물건을 아무거나 골라서 령안에게 줬을 것 같아요?”
육장봉이 월령안에게 준 선물은 아주 신경 써서 고른 게 분명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하세요?”
월령안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최일이 살짝만 일깨워 줬을 뿐인데도 바로 알아맞혔다.
최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옥팔찌의 주인은 육장봉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크죠. 전 육장봉 어머니의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일은 월령안이 육장봉의 생모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몰라, 먼저 설명해 주었다.
“육장봉의 생모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습니다. 누군가는 육장봉의 어머니가 현음 장공주라고 했지요. 하지만 육장봉이 태어나던 해에 현음 장공주는 이미 북요로 시집간 상태라, 이 소문도 자연히 헛소문이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