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360)화 (360/1,004)

360화 연적이 나타난 건가?

월씨 가문의 하인은 크게 대답하더니 앞으로 나와 기러기를 들고 가 버렸다.

“월 낭자, 이, 이건…….”

임 참장은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막고 싶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월 낭자, 아무리 그래도 대장군께서 손수 잡으신 기러기란 말이오…….’

“이게 뭐예요? 이제 겨우 돌 선물이라고 했으니 아직도 십칠 년이나 남았네요. 그럼 천천히 보내세요.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당신네 장군께서 무엇을 보내셔도 다 받을 테니까요.”

월령안은 손에 든 비단 함을 흔들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오늘을 조용히 보내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육장봉은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바깥소문만으로도 시끄러운데. 자기까지 나서서 불을 지피다니. 혹시 지금 소씨 가문에게 나 월령안은 자기가 보호하고 있다고 대놓고 시위하는 건가?’

그녀는 그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소씨 가문을 약 올릴 수는 있었으니까.

임 참장은 울상을 하고 포권했다.

“월 낭자,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월령안의 말이 맞았다. 기러기는 아직도 열일곱 쌍이나 남아 있었다.

차라리 얼른 가서 보고하고, 장군에게 대응책을 생각하라고 하는 게 나았다. 그러지 않으면 월령안이 기러기를 모조리 팔아버릴지도 몰랐다.

임 참장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선물을 남겨둔 채 대단히 빠른 속도로 떠나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행군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임 참장 일행이 떠나자, 월령안은 최일을 화청으로 데리고 갔다.

“육 대장군께서 대단히 정성을 기울이셨군요.”

“최 대인께서도 마찬가지예요.”

최일이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핑계를 대서 거절했을 것이다.

월령안이 무심하게 탁자 위에 던져 놓은 비단 함에 최일의 눈길이 떨어졌다. 그는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월 낭자께서는 열어 보지 않으십니까?”

최일은 알아듣지 못한 척 웃으며 말했다.

“최 대인, 호기심이 큰 화를 불러오는 법이지요.”

월령안은 비단 함을 손에 들기는 했지만, 열지는 않았다.

“그럼 좋은 소식 하나와 바꾸지요.”

최일이 웃으면서 말했다.

지피지기는 백전백승인 법.

그는 대단히 궁금했다. 육장봉처럼 전쟁밖에 모르고, 남녀 간의 애정이나 여인의 마음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남자가 도대체 어떤 선물을 골라 보냈을까?

그걸 알아야 앞으로 육장봉을 만났을 때 놀려먹을 수 있었다.

“무슨 좋은 소식이죠? 먼저 말씀하시겠어요?”

월령안은 탁자 위의 비단 함을 만지작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육장봉이 첫돌 선물로 무엇을 보냈는지, 그녀도 궁금했다. 그러나 자신도 궁금해한다는 사실을 최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초성과 당제가 사흘 뒤에 풀려날 겁니다. 그들의 공적과 명예는 사라지겠지만요. 월 낭자께서 이 결과에 만족하시지 못한다면 제가 다시 노력해 볼 수는 있습니다.”

장 부승상이 이렇게 흔쾌히 허락한 것만 해도 그의 체면을 많이 봐준 셈이었다. 최일도 이 이상 요구하기는 곤란했다.

하지만 월령안이 만족하지 않는다면, 장 부승상과 더 협상해 볼 생각이 있었다. 그가 장 부승상이 만족할 대가를 내놓으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때는 월령안과는 거리를 둘 것이다.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더구나 욕심이 많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최일은 여전히 예의 바르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은 거울처럼 맑았다.

그는 월령안을 묵묵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월령안의 대답에 따라, 그가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대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월령안은 그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번에 최씨 가문에서는 아무 이익도 얻지 못하겠군요.”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최일이 장 부승상 손에서 이 두 사람을 빼내기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쉬운 일이었다면 진작 해냈을 테니까.

“최씨 가문에게 그런 이득이 필요할까요?”

최일이 웃으면서 되물었다.

“눈앞에 놓인 이득을 포기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그것도 대인 혼자만의 일이 아닐 때는 더욱이요. 이 일은 최씨 가문 전체의 이익과 연관된 일이었을 텐데.”

월령안은 미소를 거두고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제가 대인께 신세를 졌네요. 아주 큰 신세를 졌어요.”

“저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요. 친구 사이에 이렇게 예의 차릴 필요는 없지요.”

최일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금 그의 미소는 예전 그 어느 때보다 진실했다.

월령안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또 감사할 줄도 알았다. 남의 어려운 사정도 헤아릴 줄 알았고, 남의 희생도 잘 알았다.

이런 인품의 소유자는 흔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만났던 사람 대부분은 남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남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다.

“우리는 당연히 친구지요. 최 대인은 앞으로 제게 격식을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월령안은 인정했다. 최일은 조계안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기는 해도, 조계안보다는 훨씬 귀여운 맛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친구를 위해 손에 넣은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일은 월령안 하나를 친구 삼자고 최씨 가문이 큰 이득을 얻을 기회를 날려버렸다. 최씨 가문이 이번 기회를 잡았다면 얻었을 이익을 다시 얻어내려면 수십 년에 달하는 세월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월령안은 최일의 이런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최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는 이 화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거두고 보기 드물게 진지해졌다.

“이번 일을 이렇게 크게 벌였는데,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할 생각입니까?”

“왜 마무리를 해야 하죠? 불을 지핀 것은 저지만,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저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은 개입할 수 없는 일인걸요. 대단하신 분들이 알아서 마무리를 하실 거예요.”

그녀는 시작만 하면 되었다. 그녀가 직접 매듭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싸움을 마무리하려고 낭자를 희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봤습니까?”

조정 대신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소 승상의 문인들을 제거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소 승상의 문인을 모조리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소 승상의 문인을 억압하기 위해, 그들은 월령안을 도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충분한 이득을 얻기만 하면, 바로 월령안을 버리는 식으로 소 승상의 화를 잠재울 것이다.

정치는 이처럼 매정한 것이었다. 힘이 부족하면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최일, 저는 월씨예요. 청주 월씨 출신이죠.”

월령안은 최일이 자신을 친구로 여기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알았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최일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최일이 그녀의 계획을 알더라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리 늦어도 다음 달이면 저는 청주로 떠날 거예요. 정 안 된다면 내일 떠날 수도 있어요. 누구도 절 막을 수는 없죠. 또 감히 절 막지 못해요.”

‘정 안 되면 숨어버리면 되잖아?’

그녀가 청주로 가는 것은 황제의 뜻이었다. 소씨 가문의 문인 중 누가 감히 황제의 뜻을 어기는지 두고 볼 셈이었다.

최일은 실소했다.

“낭자도 참……. 됐어요.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요.”

삼십육계 중 줄행랑이 으뜸이다.

변경을 발칵 뒤집은 다음 뒤돌아 도망치면 그만이다. 이런 건 월령안만 해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아주 뛰어난 수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사실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가장 좋은 방어는 공격이다. 소씨 가문에서 먼저 손을 썼다.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싫으면 이쪽에서도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기왕 소씨 가문에 정면으로 대항하기로 한 이상, 최악의 결과도 감당할 준비를 해야 했다.

아무튼, 그녀는 죽을 리가 없었다.

“아가씨, 장군부의 사람이 또 왔습니다!”

월씨 가문의 하인이 서둘러 뛰어왔다. 얼굴에 다급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이번에는 육삼 장군입니다.”

“내 두 살 생일선물을 주러 왔다더냐?”

월령안은 피식 웃고 일어나 최일에게 말했다.

“최 대인,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갔다가 바로 올게요.”

“함께 가시죠.”

육장봉의 수작을 구경할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최일은 당장 일어나서 그녀의 옆으로 걸어왔다. 월령안이 뭐라고 할 틈이 없었다.

월령안도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화랑을 지나 앞마당에 도착했다.

육삼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최일이 빨간 옷을 입은 월령안의 곁을 슬그머니 감싸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함께 걷고 있었다. 남자는 더없이 준수하고 기개가 비범했다. 여인은 화사하고 온화하며 고상해 보였다. 두 사람은 대단히 잘 어울렸다. 멀리서 보면 완벽한 한 쌍 같았다.

‘설마 우리 대장군께 연적이 나타난 건가?’

육삼의 마음속에서 경보가 크게 울렸다. 그는 묵묵히 마음속에 이 장면을 새겼다. 돌아가서 장군에게 보고할 요량이었다.

육삼은 최일과 월령안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는 무례할 정도로 최일을 밀치더니 비단함을 바쳤다.

“월 낭자, 저는 대장군의 명령으로 월 낭자께 선물을 드리러 왔습니다. 이건 저희 대장군께서 월 낭자의 두 살 생일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최일은 연약한 서생이었다. 하마터면 육삼에게 밀쳐져 바닥에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아 망신을 당하는 건 면했다.

그런데 육삼이 데리고 온 병사들은 하나같이 호시탐탐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가 늑대라도 되는 양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최일은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구경하러 왔을 뿐인데, 육장봉의 수하들이 왜 이렇게까지 긴장하지?’

“아직도 열여섯 개나 남은 거죠? 한꺼번에 가져오면 안 되나요?”

처음 선물을 받았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내숭을 떠느니, 과감하게 모조리 받기로 했다.

육삼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수더분한 얼굴로 말했다.

“월 낭자, 저도 한꺼번에 가져오고 싶습니다. 하지만 기러기 잡기가 쉬워야 말이지요. 어젯밤, 대장군께서 숲속에서 밤새 찾으셨지만, 아직 기러기를 여섯 쌍밖에 찾지 못하셨습니다.”

월령안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나무함을 던질 뻔했다.

“대장군이 설마 기러기를 열여덟 쌍이나 주려는 건 아니죠?”

‘육장봉이 미쳤나? 그렇게 많은 기러기를 자기가 다 잡아 버리면 올해 혼인하는 부부들은 어떡하라는 거야? 기러기 같은 건은 한 쌍이면 충분하잖아. 그런 걸 열여덟 쌍이나 잡으려고 하다니. 육장봉이 그렇게 한가한가?’

“장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있는 건 월 낭자에게도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남에게 없는 것도 월 낭자께는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 장군께서는 월 낭자의 곁에 없으셨으니, 월 낭자에게 못 해 준 것이 모두 빚이 되었다고 장군께서는 생각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배로 갚아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육삼은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웃었다. 충실하고 성실한 모습이었다.

“당신들…….”

월령안은 코가 시큰해졌다. 입을 벙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남에게 있는 것은 나한테도 있어야 하고, 남에게 없는 것도 내게는 있어야 한다니. 육장봉도 잘해 줄 때는 참 잘해 주는구나. 참 다정해.’

그러나 육장봉은 이제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월령안은 비단함을 꽉 움켜쥐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