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자기만의 전장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불쌍하기는 하군.”
고종 황제가 애지중지하던 공주는 원래 세상의 부귀영화를 거리낌 없이 마음껏 누려야 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야망 때문에 욕심을 부리다가 반평생이 넘는 세월을 억울하게 보냈다.
그리고 남은 반평생도 편히 보내지는 못할 것이다.
황제가 아무리 온화하고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해도 황제였다. 그는 제왕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를 농락한 사람은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송 원정은 청희 장공주가 가짜로 임신했음을 알고 크게 당황했다.
그는 청희 장공주가 임신했다는 진단이 거짓임이 알려지면, 월령안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이 되었다. 황제가 월령안이 자신을 기만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손을 빌려 청희 장공주를 제거하려 든다고 생각할까 봐 겁이 났다.
황제는 결국 황제였다. 그도 청희 장공주를 제거하고 싶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걸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송 원정이 있으니 월령안이 한 일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청희 장공주도 이 풀 길 없는 억울함을 고스란히 겪어야만 했다.
육장봉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또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웃는 일은 대단히 드물었다. 가끔 웃더라도 담담하게 옅은 미소만 지었을 뿐, 곧 무표정해졌다.
월령안은 그가 이렇게 홀가분하고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매우 드물었다. 하마터면 육장봉의 웃음에 넋을 잃을 뻔했다.
아니, 넋을 잃을 뻔한 게 아니라 이미 넋을 잃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는 새에 육장봉을 몇 초나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육장봉의 웃음도 점점 찬란해졌다. 심지어 웃음소리도 났다.
그러나 월령안은 자제력이 너무 뛰어났다. 넋을 잃었던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영녕후부가 무사할까요?”
육장봉은 꽤 실망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영녕후는 총명한 사람이오. 그자가 역심을 품지 않는 이상, 무사할 뿐만 아니라 폐하께 큰 상과 위로를 받을 거요.”
월령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영녕후가 이 기회에 병권을 내놓아 폐하의 신임을 살까요?”
“그렇지.”
육장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항상 바르게 앉던 몸도 자세를 바꾸어 의자에 반쯤 편히 기댔다.
월령안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늘 그가 하려는 말을 알고 있었다.
육장봉은 의자에 기대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무심하게 말했다.
“영녕후 세자는 이미 폐했소. 영녕후부의 적차자(嫡次子 - 가문 직계 둘째 아들)는 과거의 길을 가게 될 거요. 올해 은과가 열리니 영녕후의 아들은 반드시 참가할 거고, 성적이 아무리 안 좋더라도 폐하께서 합격시키실 것이오. 또 진사(進士)의 신분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하시겠지.”
“이건 좋은 기회예요. 영녕후가 병권을 내놓고 가문을 재정비한다면 앞으로 영녕후의 가문이 더는 지위가 낮은 무장 취급을 받지 않을 테니까요.”
주나라 무장들의 처지를 떠올리자, 월령안은 영녕후의 수법이 매우 이해되었다.
“그렇소.”
육장봉은 대답하면서도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주나라는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경시했다. 무장은 크게 억눌렸다.
주나라의 개국 황제는 병권을 손에 쥔 무장이었다. 아랫사람들이 정변을 일으켜 제왕의 자리에 올려 주었다. 그는 그렇게 무력을 이용해 황제가 되었지만, 본인도 같은 방법으로 권력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개국 황제부터 시작하여 주나라의 역대 황제들은 무장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쳐 왔다.
무장의 승진과 임명이든, 공로의 평가든, 녹봉 등급이든, 군량 공급까지도 모두 문관이 결정했다.
호부, 이부에서 병사 한 명이 하루에 먹는 양식이 반 근이라고 정하면 딱 반 근만 지급했다. 그것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을지는 무장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녹봉, 양식, 승진과 이동 등 무장의 목숨줄은 전부 문관이 손에 쥐고 있었다. 무장이 아무리 병권을 장악하고, 빛나는 전공을 세우더라도 문관에게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일품 대장군이라고 해도 수시로 삼, 사품 하급 관리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들이 핑계를 대고 군대의 급료와 양식을 떼어먹는다면 부하들이 배를 곯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주나라의 무장으로 살기란 대단히 힘들었다.
군공을 세우고 병권을 쥐고 있더라도, 문관에게는 허구한 날 공으로 황제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둥, 역심을 품을까 우려가 된다는 둥 탄핵을 당했다.
군공도, 병권도 없는 무장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기본적인 발언권조차 없었다.
영녕후처럼 일찍이 군공으로 일어선 가문은 전쟁터에서 군공을 세울 기회를 찾지 못한다면, 천천히 문관에게 밀려 이류, 삼류 가문이 될 것이다.
그렇다 보니 영녕후부에서는 가문을 재정비하는 게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청희 장공주를 이용해 영녕후부에 대한 황제의 미안함을 불러일으킨 뒤, 자연스럽게 병권을 내놓아 정치적인 이득을 얻는다.
영녕후의 이 수법은 대단히 절묘했다.
그와 동시에 주나라 무장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주나라의 모든 무장은 기회만 된다면 다 가문을 재정비해 문관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무장이 없다면, 전쟁을 이끌 장군이 없다면 주나라는 누가 나서서 지키겠는가. 설마 말로만 인의와 도덕을 외치는 문관이 지키겠는가.
육장봉은 문관의 방자함과 주나라 무장의 처지를 떠올리자, 기분이 대단히 울적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바로 그 감정을 가라앉혔다.
주나라의 군사와 정치 제도는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황제가 무장을 신임하지 않고 억누르려고 한다면, 그가 아무리 걱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는 그가 걱정하게 하는 여인이 있었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영녕후는 셈이 빠른 사람이오. 상대하기 쉽지 않겠지. 당신이 영녕후와 크게 원수를 진 것도 아니니 영녕후부와 적이 될 필요는 없소. 당신과 장군왕부의 협력도 이쯤에서 마무리하오.”
어쨌든 육장봉이 이미 그 술을 샀다. 월령안도, 장군왕부도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월령안은 꿋꿋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협력은 그만둘 수 없어요.”
“그럼 이유를 하나 대 보시오.”
육장봉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예전처럼 묻지도 않고 자기 의견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상업계는 전쟁터와 같습니다. 한발 물러서면 계속 물러서야 해요.”
월령안은 육장봉이 그녀에게 그만두라고 계속 요구하거나, 또는 잠시라도 그만둬야 한다고 협박할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그는 그녀의 해명을 들었다.
“상업계에서 서로 장사를 빼앗고, 경쟁하는 것은 더없이 정상적인 일이에요.”
월령안은 몸을 살짝 뒤로 기댔다. 어둠 속에 묻힌 그녀의 얼굴에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오만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세상에 독점하는 장사는 없어요. 무슨 장사를 하든 전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어요. 잠깐 경쟁 상대를 마주치지 않더라도 언젠가 따라 하는 사람은 생기기 마련이에요.
만약 매번 누군가와 장사하는 품목이 겹친다고 제가 물러선다면, 또는 누군가 절 따라 한다고 제가 그만둔다면 제가 무슨 수로 돈을 벌겠어요? 무슨 장사를 할 수 있겠어요?”
“당신과 장군왕부가 협력하는 것은 영녕후부에 대한 도발이오.”
월령안은 또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왜 도발이죠? 장군왕부도 예전에 술 장사를 했어요. 영녕후부의 핍박 때문에 더는 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주류 업계에서 물러난 거예요. 지금 장군왕부가 다시 주류 업계에 뛰어드는 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것뿐이에요.”
월령안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무척 확고했다. 전혀 양보하려고 하는 기색이 없었다.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월령안을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설득당한 느낌이었다.
월령안은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자기만의 고집과 신념이 있었다. 또 자기만의 전쟁터가 있었다.
월령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상업계는 전쟁터와도 같았다. 그 역시 전쟁터에서 적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이유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월령안도 상업계에서 적이 강하다고 해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일단 물러난다면, 다시 한 발을 내딛기는커녕 원래의 자리를 지키지도 못한다.
육장봉이 말없이 가만히 있자, 월령안은 다시 말을 이었다.
“대장군, 장사하는 사람은 신용을 지켜야 해요. 저는 신용을 저버릴 수 없어요. 청희 장공주가 기세등등할 때, 장군왕부는 청희 장공주에게 미움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저와 협력을 했어요. 인제 와서 제가 물러설 수는 없어요.
어차피 장사일 뿐이잖아요. 제가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할 거예요. 설마 청희 장공주라는 뒷배 없이, 영녕후가 여전히 사업을 독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죠?”
“됐소, 난 당신을 설득하지 못하겠소.”
육장봉은 진작 그녀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단지 그는 월령안이 자신만만하게, 여유롭게 말하는 모습이 좋아서 계속 듣고 있었다.
이럴 때의 월령안은 빛나는 것 같았다. 특히 그 두 눈은 반짝이다 못해 사람을 흠뻑 취하게 했다.
“육 대장군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육장봉이 한발 물러서자 월령안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공수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대장군, 걱정하지 마세요. 주의할게요. 될수록 영녕후와 마찰이 생기지 않게 할 거예요. 제게 주조 허가증이 있으니, 영녕후 쪽에서 원한다면 그쪽과도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어요.”
상업계는 평화로울 수가 없다. 장사를 뺏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장사를 뺏기 위해 원수가 되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장사를 하는데 미움을 안 받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미움받는 걸 두려워한다면, 상업계에서 발을 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시집이나 가는 게 나았다.
“음.”
육장봉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장사라면 월령안이 그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또 월령안은 후원에만 머무르며, 남자에게 기대어 보호받는 연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육장봉은 화제를 돌려 다른 일을 물어보았다.
“월 삼낭의 행방은 찾았소?”
육일과 육이가 손을 잡고도 여인 하나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했다. 월 삼낭은 보통 여인이 아님이 분명했다. 아니, 월씨 가문이 보통 가문이 아닌 것이리라.
월씨 가문에는 몸을 숨기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변경에 특수한 세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육장봉이 에둘러 물었지만, 월령안은 그 말에 감춰진 속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장군께서 아시다시피,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저는 여덟 살이었어요.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월씨 가문의 인맥을 제가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죠.
과거 월씨 가문의 일원이었던 그 사람들은 범씨 가문에 투항했거나, 아니면 독립적인 상인이에요. 저를 따르는 사람은 겨우 몇 명밖에 안 돼요.
그렇게 저를 따르는 사람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월 삼낭의 행방을 찾지 못했어요. 심지어 월 삼낭은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월씨 가문의 일 처리 방식을 더 잘 알고 있겠죠. 그래서 제가 더 찾기 어려운 거예요.”
육장봉이 월씨 가문의 은밀한 세력을 알아내고 싶더라도, 그녀에게 손을 쓰는 거로는 소용없을 것이다.
월씨 가문이 그녀에게 남긴 세력은 많지 않았다. 설령 모두 그녀의 손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육장봉에게는 절대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비밀이 비밀인 이유는 다른 사람이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긴다면 그 일은 더는 비밀이 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