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원래는 네 혼수였구나
정씨 가문은 뿌리가 깊지 않았다. 정 장군과 정 부인이 성공한 첫 세대였다. 두 아들의 자질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빼어나게 뛰어난 편도 아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다면 미래도 그저 그럴 것이다.
정씨 가문은 그녀의 남편 혼자 지탱하고 있었다. 만약 정 장군이 쓰러지면 정씨 가문도 절반은 무너지는 꼴이었다.
그런데 지금 정 장군의 건강이 점차 좋아지고 있었다. 적어도 이십 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단다. 이만한 시간이 있다면 두 아들도 어떻게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니 월령안이 그들 가문 전체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건 제 공로가 아니죠. 정 장군의 인품이 훌륭하다 보니, 손 신의가 감동해서 선례를 깨고 치료한 거예요.”
월령안은 공로를 생색내지 않았다. 또 정씨 가문의 은인이라고도 자처하지 않았다.
“얘는……. 난 정말 네가 무척 마음에 든단다. 내 아들 둘은 너무 평범해서 네가 너무 아깝구나. 그렇지만 않았으면 내가 염치를 무릅쓰고 우리 집에 시집오라고 했을 거야.”
정 부인은 월령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정말이지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마음에 들었다.
“부인께서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 콧대가 높아질 거예요.”
월령안은 웃어넘기며, 이 일을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십 년 동안은 시집갈 수 없었다. 혹여나 나중에 시집을 가더라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갈 것이다. 이것만큼은 절대 타협할 수 없었다.
“넌 콧대 높게 굴었어야 했어.”
정 부인은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말했다. 그리고 표정을 바꾸어 심각하고 엄숙하게 물었다.
“참, 령안아, 내가 듣기로는 육 대장군이 네게 예물을 보냈다던데 어떻게 된 일이니?”
“부인께서도 이 일을 아세요?”
줄곧 명월산장에 있었던 정 부인조차 이 소문을 들었다니. 월령안은 머리가 아파 이마를 짚었다. 이 일을 그대로 넘기지 못할 줄은 알고 있었다. 육장봉이 일을 너무 크게 벌였다.
“그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온 변경에서 누가 모르겠어? 육 대장군이 무슨 뜻으로 그러는지 아니?”
정 부인은 자기가 이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월령안이 걱정되었다.
월령안이 확실히 똑 부러지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똑 부러져도 겨우 열여덟 살 소녀일 뿐이었다. 이 나이대의 소녀들은 사랑에 쉽게 눈이 멀고 만다.
특히 월령안은 원래 육장봉을 좋아했었다. 정 부인은 육장봉이 월령안의 마음을 가지고 놀다가 또 상처를 줄까 걱정이 되었다.
“그 물건들은 제 혼수인 셈이에요. 육 대장군은 단지 제 혼수를 돌려주는 것뿐이에요. 밖에서 말하는 것처럼 약혼 예물로 주는 건 정말 아니에요.”
월령안은 한숨을 내쉬며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댈 이유를 말했다.
‘정 부인에게 육장봉이 내게 심술을 부리는 거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물론, 육장봉에게 심술 말고도 다른 의도가 약간 있기는 하겠지만, 그걸 그녀의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네 혼수라고?”
정 부인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듣기로는 육 대장군이 네 집에 보낸 물건은 모두 육씨 가문 역대 가주 부인들이 남긴 것이라던데? 가주 부인에게만 넘기는 물건 말이야.”
“그때 육씨 가문의 상황은 정 부인도 아실 거예요. 육씨 가문에서는 제게 빙금(聘金 – 결혼할 때 신랑 측에서 신부 가문에 주는 돈)으로 줄 만한 돈이 없었어요. 제 혼수도 많고 하니까 육씨 가문에서는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가주 부인이 물려받는 물건을 빙금으로 준 거예요.
그때 서로 약속했어요. 제가 그 물건을 혼수로 육씨 가문에 가지고 들어가기로요. 그 물건은 전부 제 혼수 목록에 있었으니 제 혼수라고 해도 과하지 않죠. 육 대장군이 그걸 보낸 것은 저와 선을 명확히 긋기 위해서일 거예요.”
설령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대외적으로는 이런 이유여야 했다.
그녀는 육장봉이 보낸 예물을 받았다고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구나. 어쩐지, 육 대장군이 뜬금없이 너희 집으로 예물을 보내나 했어. 원래는 네 혼수였구나.”
육장봉이 월령안을 속인 게 아니라고 하니, 정 부인도 안심이 되었다.
월령안은 웃기만 할 뿐,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 부인이 다시 물을까 두려워, 재빨리 핑계를 대서 송언과 함께 떠났다.
그렇게 정 부인의 관심에서는 벗어났지만, 손불사와 노인의 놀림에 또 걸려들고 말았다.
그나마 노인은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시선에 조금 켕기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만 그렇게 느낄 뿐, 다른 사람은 그녀의 심정을 몰랐다. 그래서 얼굴이 두꺼운 그녀는 민망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불사는 본인이 무안한지, 줄곧 육장봉이 그녀에게 예물을 보낸 일을 꺼냈다. 그는 노인 앞에서 그녀와 육장봉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며 계속 암시했다.
“영감, 당신 댁의 령안이가 그 육가 놈이랑 틀림없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니까. 오늘 명화전에서 월령안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때, 육장봉이 다가와서 받아안았지 뭔가. 둘이 계단에서 끌어안고 서로 바라보는데…….
영감이 그 장면을 보지 못해서 말이야……. 쯧쯧쯧, 정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니까. 다행히 명화전이라서 사방에 사람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둘만 있어 봐. 내년에 외손주를 보게 생겼다니까.”
손불사는 말할수록 신이 나는지 이야기를 점점 과장해서 떠벌렸다. 월령안은 화가 나서 손불사를 노려보았다.
“됐어요, 됐어요. 그만 해요. 저는 어르신이 약속을 어긴 일 얘기는 하지도 않았잖아요. 먼저 제 흉을 보시기예요?”
손불사가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건 그녀가 트집을 잡을까 두려워 선수 치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말에 손불사는 바로 화를 버럭 냈다.
“내가 언제 약속을 어겼어? 내가 제시간에 안 돌아왔어, 아니면 네 일에 지장을 줬어? 난 황궁에 고작 일각만 더 머물렀을 뿐이잖아. 나한테 이 정도 자유도 없나?”
“네, 네, 네. 어르신 말이 다 맞아요. 다 맞고말고요. 손 신의에게는 자유가 있어요. 제가 자유를 간섭하지 않으면 되겠죠? 온종일 바쁘게 보냈더니 지쳐서 죽을 것 같네요. 송언도 소개해 드렸잖아요. 그 애는 제 미래의 중요한 협력자가 될 거니까 괴롭히지 말아요.
나중에 송언에게 짐을 챙겨 명월산장에서 며칠 묵으라고 할 거예요. 손불사, 앞으로 잘 가르쳐 주세요. 아주 유망한 아이예요.”
오늘 여기로 오는 길에 월령안은 송언에게 의술 방면의 지식에 관해 질문해 보았다. 송언은 나이가 어리기는 해도 의학 지식은 풍부했다. 단지 경험이 부족할 뿐이었다.
송언이 노인에게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한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말을 마친 월령안은 손불사가 허락을 하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몸이 허약해서 쉬어야겠다는 이유로 도망쳤다.
다음 날 아침, 손불사와 노인이 일어나기도 전에 월령안은 송언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육장봉이 예물을 보낸 일로 그녀를 놀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월령안은 마부에게 송언을 먼저 집으로 데려다주라고 했다. 뜻밖에도 길거리에 들어서자마자 길을 가로막혔다.
마부에게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거리의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예물이다!”
“예물 행렬이네. 육씨 가문에서 또 예물을 보냈어!”
“어서, 어서 가서 보자고……. 또 육씨 가문이야. 육씨 가문에서 또 예물을 잔뜩 보내고 있어. 오늘은 누구에게 보내는 거지?”
“예물을 보낸다고?”
월령안은 마차 밖에서 울리는 고함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육씨 가문에서 이틀 연속 예물을 보냈다. 변경의 백성들은 너도나도 빙 둘러싸 구경했다.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육씨 가문에서 오늘은 누구에게 예물을 보내는지 도박판을 열기도 했다.
월령안은 이 말을 듣자, 백 냥짜리 은표를 마부에게 주었다. 그리고 ‘육씨 가문이 소씨 저택에 예물을 보낸다’에 걸라고 했다.
마부는 금방 돌아왔다. 돈을 걸었다는 명세서를 가져오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육씨 가문이 소씨 가문에 예물을 보낸다는 것의 배율은 십 대 십일이에요.”
백 냥을 걸어서 맞추면 백십 냥을 얻게 된다. 즉 열 냥을 버는 셈이었다.
“나중에 돈을 받으면 너희끼리 나누어라.”
월령안은 기다리느라 심심해서 대충 돈을 건 것이었다. 이기고 지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오늘 육씨 가문에서 나온 예물은 규정대로 준비한 것이기에 수십 상자밖에 안 됐다. 구경하는 백성이 많기는 했지만, 움직임도 재빨랐다. 월령안 일행이 일각을 기다리자 막힌 길이 트였다.
월령안은 먼저 송언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준비가 되지 않아 방문이 힘들다는 이유로 송언의 초대를 거절하고 들어가지 않았다.
“계약서의 일은 서두르지 말아요. 오늘 돌아가서 먼저 짐을 챙기세요. 미시(未時 – 13시~15시)에 마부를 보낼게요. 마부가 명월산장으로 데려다줄 거예요.”
월령안은 송언이 경중을 가리지 못할까 걱정되어 일부러 당부했다.
“손 신의는 변경에서 며칠 머무르지 않을 거예요. 이 시간 동안은 손 신의에게 배우는 데 집중해요.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요.”
“하지만 만약 저희 가족이 허락하지 않으면요?”
송언은 조금 불안해졌다. 또 아주 의문스러웠다.
‘월 누님은 내게 먼저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한 다음에야 명월산장에 가서 손 신의에게 배우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왜 순서를 바뀌었지? 내가 손 신의한테서 배운 다음에 나 몰라라 할까 걱정되진 않는 걸까?’
“허락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죠. 날 누님이라고 불렀으니, 내 능력이 닿는 만큼 송언에게 공부를 시키려는데, 왜요? 손 신의에게 송언을 제자로 받아들이라고 한 것도 아닌데요, 뭐.”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다독였다. 송언이 여전히 고민하는 얼굴을 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요. 이건 사소한 일이에요.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송언은 얼굴을 굳히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월 누님한테는 사소한 일이지만, 저한테는 평생이 걸린 큰일이에요. 월 누님, 앞으로 어떻든지 전 계속 누님의 동생이에요. 앞으로 누님 말을 다 들을래요.”
“좋아요, 기억해 둘게요. 하룻밤이나 집에 들어가지 않았잖아요. 얼른 돌아가요. 가족들이 분명히 걱정할 거예요.”
월령안은 그 말을 듣자,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의 송언을 믿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청주의 그 가게 사장들을 떠올렸다. 다들 그녀의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고, 발탁된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형님 아우 하며 지냈건만, 나중에는 어찌 되었던가.
가게의 사장 중 구 할이 범씨 가문으로 넘어갔다. 심지어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다.
“거래는 거래고, 교분은 교분이지. 그걸 같이 묶어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지.”
그렇다. 장사는 장사고, 교분은 교분이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의 인심이 사납다고 여겼다. 세력이 있고 없음에 따라 사람의 태도가 달라진다. 사람 인심이 예전 같지 않았다.
노인만이 그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 인간 세상의 고통을 보여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 분노해서 결국에는 미치광이 악당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조계안과 비슷했으리라. 그래서 그녀는 조계안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조계안으로부터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고집, 광기, 음험함이 그녀에게도 있었다.
그녀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왜 또 이런 생각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곧 청주로 가게 되어서가 아닐까. 어쩌면 월 삼낭을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즘 따라 자꾸 청주의 일과 사람들이 떠오르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