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그럼 저를 따를 건가요?
“월 가주, 그게 정말이에요?”
송언은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월 가주께 정말 유일본 의서가 있나요? 또 약왕곡의 신의가 절 가르쳐 주신다고요?”
“그럼요.”
월령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를 따를 건가요?”
“그럼요, 물론이죠.”
송언은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준수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하지만 월 낭자, 낭자가 주시는 급료가 너무 높아요. 저, 저는 이렇게 큰돈을 받을 실력이 아니에요.”
“받을 만해요!”
송언에게는 원정인 할아버지가 있다. 이제 송언을 고용하기는커녕 그와 친분을 맺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송씨 가문이 한미할 때 친분을 맺은 것은 그녀의 운이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놓친다면, 월씨라는 성씨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송 공자는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어 뻔뻔하게 굴 줄 몰랐다. 당연히 월령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녀에게 칭찬을 받으니 얼굴에 겸연쩍은 기색이 역력했다.
비록 좀 쑥스럽기는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얼떨떨해서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
월령안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미래의 전망을 제시해 주었다. 송 공자는 더욱 피가 끓어올라 흥분했다.
이제 그는 월령안을 지기(知己)로 여겼다. 흥분한 김에 그녀와 무려 이십 년이나 되는 계약을 맺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월령안도 송언을 홀대하거나 교묘한 함정에 빠트리지는 않았다.
그녀와 송언이 맺은 계약은 엄밀히 말해 고용 계약이 아닌, 협력 계약이었다. 송언은 그녀의 협력자로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월령안이 제시한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송 어의에게 제시했던 금액과 똑같이 급료를 주기로 했다. 게다가 약왕 손불사에게 해 주듯, 해마다 송언에게 새 약재와 처방을 연구할 비용으로 적어도 만 냥을 주기로 했다.
송언은 이 돈으로 새로운 약을 연구하고 개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개발한 약으로 돈을 번다면, 송언도 삼 할의 이윤을 받을 수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월령안은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마치자 송언을 데리고 서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계약서를 두 부 썼다.
그러나 계약서를 다 쓴 월령안은 송언에게 당장 서명하고 도장을 찍으라고 재촉하지는 않았다. 대신 계약서 두 부를 모두 송언에게 넘겼다.
“저는 이 두 부에 모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어요. 가져가서 가족과 상의해 보세요. 가족이 허락한다면 서명하세요. 가족들이 허락하지 않고, 고칠 데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 다시 상의해 보죠. 만약 도저히 아니다 싶으면 괜찮아요. 없던 일로 하고 계약서를 찢으세요. 그래도 돼요.”
남을 속이고, 함정에 빠뜨리는 등의 수단으로는 사업이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정정당당하게 돈을 버는 쪽이 좋았다.
그녀는 송 어의라는 줄을 잡고 싶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위해 송씨 가문을 함정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송씨 가문과 함께 잘 해내고 싶었다.
송언은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헤벌쭉 웃자 송곳니 두 개가 드러났다. 그는 진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오기 전에, 할아버지께서는 월 가주는 덕이 많은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뜻을 몰랐지만, 지금은 알겠습니다.”
그는 아까 월령안의 말에 홀랑 넘어갔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얼떨떨해져 자기가 뭘 승낙했는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도 되는 것, 하면 안 되는 것까지도 전부 승낙해 버린 것 같았다.
월령안이 계약서를 쓸 때가 되어서야 자기가 속은 건 아닐까 불안해졌다. 그러나 번복하기도 미안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월령안이 기회를 틈타 불공평한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 계약서가 얼마나 불리하든지 다 받아들이겠다고 각오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자기 혼자서 책임을 지고, 식구까지 끌어들이지는 않겠다며 다짐했다.
하지만 그가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아량을 가늠했다.
월령안이 쓴 계약서는 그에게 대단히 유리했다. 그뿐만 아니라 집에 가져가라고 했다. 집에 가서 가족들과 상의한 뒤 다시 서명하라고 한 것이다.
이 세상에 월 가주처럼 덕이 두터운 상인은 없을 것이다.
“저는 장기적인 협력을 원해요. 서로가 원하는 협력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식이죠. 속이고 함정에 빠뜨리는 방식으로는 오래가지 못해요.”
월령안은 웃고 나서 책상 위의 모래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성 밖으로 나가죠. 다른 일은 가족과 상의하시고 다시 이야기해요.”
“좋아요, 월 가주.”
송언은 또 두 송곳니가 드러나게 웃음을 지었다. 앳된 티가 물씬 풍기는 모습은 실제 나이보다도 두세 살 어려 보였다.
송 어의의 인품을 믿지 않았더라면, 월령안도 ‘이 아이가 정말 할 수 있을까?’라며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송언이 못 하더라도 다른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다른 믿을 만한 의원을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게다가 노 의원도 명월산장에 있었다. 도저히 안 된다면, 노 의원에게 하루 더 고생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면…….’
늦어도 내일쯤이면 손불사가 반드시 황궁에서 나올 것이다.
그녀는 손불사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손불사도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배상을 받아낸다고 한 이상, 반드시 받아 낼 게 뻔했다. 절대 호언장담한 게 아니다.
길더라도 하루면, 손불사는 황궁 밖으로 순순히 나올 것이다.
황제가 좀 아량을 베풀어 너무 노여워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혹시 노여워하다가 옥체가 상하기라도 하면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 * *
월령안은 육장봉이 그녀의 말을 전하기만 했다면 손불사가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손불사가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그녀와 송언보다도 일찍 도착했을 줄은 몰랐다.
“손불사가 한 시진 전에 도착했다고?”
‘내가 황궁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손불사가 바로 따라서 나왔다고? 손불사도 참……. 겁을 잔뜩 먹었군.’
그녀는 손불사의 그런 면이 참 마음에 들었다.
“손 신의께서 어르신의 치료를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남에게 맡겨도 안심할 수가 없어, 직접 지켜보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집사는 무슨 일인지 몰라, 손 신의의 말을 고스란히 월령안에게 전했다.
“됐네. 그렇게 말하니까 믿어 보지 뭐.”
월령안은 화도 났지만,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기쁜 마음이 더욱 컸다.
그녀는 무슨 이익 갈등이니,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노인의 건강만 신경이 쓰였다. 노인만 무사하다면, 전 재산을 날려도 괜찮았다.
다행히 손불사가 돌아왔다. 손불사가 지켜보고 있다면 걱정할 게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녀가 이익을 봤음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월령안은 고개를 돌리고 송언에게 말했다.
“송 공자가 헛걸음하게 했군요. 정말 미안해요. 양해해 주세요. 손 신의는 지금 바쁘니 나중에 손 신의를 소개해 드릴게요.”
“월 가주, 저를 송언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손 신의를 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 너무 좋아요. 헛걸음하지 않았어요. 좀 늦게 뵙더라도 괜찮습니다.”
송언은 두 눈을 반짝이며 생긋 웃었다. 그가 웃자 두 송곳니가 또 드러났다.
약왕곡의 손불사는 의술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모두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의술을 배우는 사람들 마음속에서 손불사는 신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음속에 모시던 신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송언은 월령안이 지금 자기를 갖다 팔아 버려도 화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송언이 아이처럼 모든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자, 월령안은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송언도 나를 월 가주라고 부르지 마세요. 내가 송언보다 나이가 많으니 괜찮다면 나를 누님이라고 부르세요. 아니면 월 낭자라고 불러도 돼요.”
“월 누님!”
송언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좋아요. 동생이 또 하나 늘었네요. 나중에 누이동생 한 명을 소개해 줄게요. 그쪽도 송언과 마찬가지로 아주 좋은…… 아가씨예요.”
월령안은 하마터면 ‘아이’라고 말할 뻔했다. 그녀는 송언과 정 낭자보다 두세 살만 더 많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 송언과 정 낭자는 모두 어린아이였다.
“좋아요, 월 누님.”
송언은 이제 월령안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월령안 앞에서 더없이 순했다. 앞서 어른인 척 조심스럽고 엄숙하게 굴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은 뻔뻔하지 못한 어린아이가 쑥스러울까 봐,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화제를 바꿨다.
“정 장군과 정 부인은 계시는가? 온 김에 그분들을 뵈어야겠다.”
그녀는 이 기회에 정 장군에게 송언을 소개할 생각이었다.
송언에게 태의원 원정의 손자라는 신분이 생겼으니, 보통 사람들은 그의 체면을 봐줄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이 날 수밖에 없다.
의술이 뛰어난 의원을 알고 지내는 것은 좋으면 좋았지 나쁜 점은 전혀 없었다.
또 송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이제는 그의 신분이 달라졌다. 그가 앞으로 교류할 사람들도 정씨 가문의 공자 같은 사람들이었다.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미리 이런 사람들과 교류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정 장군은 여전히 자리에 없었다. 월령안과 송언은 정 부인과 정 낭자만 만났다.
정 부인은 영리한 사람이었다. 월령안이 송언의 신분과 집안 상황을 설명하자, 바로 월령안의 의도를 알아챘다. 월령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두 아들을 송언에게 소개해 주어 알고 지내게 하겠다고 먼저 말했다.
“모두 나이가 비슷한 총각들이구나. 나중에 함께 놀라고 하마. 우리 아들들이 다른 건 몰라도 친구로 사귀기에는 믿음직해. 의리도 있고, 남을 함부로 괴롭히지도 않고. 물론, 감히 그 녀석들을 괴롭히는 사람도 없지만 말이야.”
월령안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정 부인은 잘 알고 있었다.
송언은 태의원 원정의 손자였다. 앞으로 변경의 명문가 자제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송언처럼 갑자기 나타난 평민 출신 공자는 변경의 고관과 명문가 자제에게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송언과 함께 어울리기는커녕 괴롭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몇 년 전, 다른 지방 출신 관원이 변경에서 크게 승진하여 그의 자제들도 변경에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변경의 귀족 자제들의 무리에 끼고 싶었다. 그러나 외지에서 왔다는 이유로 종종 무시와 조롱을 당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일은 피할 수도 없었다.
송언의 할아버지가 크게 승진했다. 사람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겉으로는 송씨 가문의 체면을 봐줄 것이다.
연회나 술자리가 있다면 반드시 송씨 가문에 초대장을 보낼 것이다. 송씨 가문이 변경의 귀족들과 전혀 교류하지 않고 문을 닫아걸고 지내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꼭 참석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정 부인이 월령안에게 말해 준 것이었다. 그녀의 두 아들이 송언과 함께 어울리든지 않든지, 송언이 변경에서 다른 귀족 가문 자제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말이다.
송언은 정 부인이 한 말에 내포된 뜻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월령안은 알아들었다. 그녀는 정 부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부인, 고맙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고맙다는 말이 웬 말이니. 고맙단 소리를 할 사람은 바로 나란다. 덕분에 바깥양반의 몸에 숨어 있던 병들도 전부 치료했어.
손 신의 말로는 바깥양반이 적어도 이삼십 년은 거뜬히 더 살 수 있을 거래. 내가 너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너는 모를 거야.”
월령안은 정씨 가문 전체의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