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346)화 (346/1,004)

346화 이번 판에서 좀 꼴사납게 졌구나

“월령안이 그렇게 말했나?”

“네.”

육장봉은 손에 든 책을 다시 손불사에게 쥐여 주었다. 지금쯤이면 책을 읽을 생각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 고얀 것! 내가 치료 처방을 상세하게 써 줬잖아? 다른 의원을 찾아서 대신하면 안 된대?”

아니나 다를까, 손불사는 책을 읽을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는 화가 나서 씩씩대며 눈을 부라리고는 제자리에서 뱅뱅 돌았다.

“그 고얀 것이 그래서 나와 기어코 계약을 맺자고 했구나. 바로 이런 때를 노리고 있었어. 혹시 처음부터 함정을 판 거였나? 걔…… 걔더러 그렇게 잘났으면 앞으로 다시는 내게 부탁하지 말라고 해. 내가, 내가 정말 괘씸해서 원!”

‘이 계집애가 나를 괴롭혀 죽이려는 건가? 돈과 의서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는 건가? 나는 어른이야. 어른이 둘 중 하나만 고르는 거 봤나? 당연히 다 가져야지!’

“하라는 말은 다 전했습니다. 손 신의께서는 천천히 읽으시죠.”

육장봉은 눈에 담긴 웃음기를 숨기고 돌아서서 가 버렸다.

손불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읽긴 뭘 읽어? 뭘 더 읽겠어! 책이야 여기 있으니 내가 언제든 볼 수 있겠지! 그 고얀 것과의 약속을 어기면 난 전 재산을 잃게 되는 건 물론이고, 주기로 한 이익도 주지 않을 게 뻔해.”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육장봉은 이 상투적인 표현이 손불사를 위로하는 데 딱 알맞다고 생각했다. 손불사는 지금 초상을 치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철든 놈들이 하나도 없구먼.”

손불사는 육장봉을 노려보고는 손에 든 의서를 책장에 꽂아 넣었다. 그러더니 씩씩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육장봉은 책을 들고 장서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을 지키는 내관에게 말했다.

“이 책은 내가 빌려 가겠다. 사흘 뒤에 반납할 것이다. 장서루의 모든 의서의 사본이 필요하니, 사람을 동원해 전부 베껴 놓도록 해라.”

손불사가 눈독 들이는 것은 기껏해야 희귀한 의서였다. 한 부라도 베껴 내면 더는 황실 독점물이 아니었다.

“대장군, 장서루의 규칙은…….”

내관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는 내가 말씀드리겠다.”

육장봉도 그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대장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바로 사람들에게 일러 베끼도록 하겠습니다.”

육장봉의 이 말이 떨어지자, 문지기 내관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최대한 빨리 하도록.”

육장봉은 명령을 남기고 의서를 든 채로 장서루에서 나왔다.

그는 다시 난각으로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황제를 만나는 대신 이반반에게만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반반을 자초지종을 들은 뒤,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대장군……, 이 일은 저희끼리 몰래 처리하는 것이 어떤지요? 폐하께서 모르시게 말입니다.”

황제가 알면 화를 낼 것이 뻔했다.

물론, 육 대장군에게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처럼 황제의 측근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불똥이 튈 것이다.

“자네 말을 듣겠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하지 않았다.

“대장군, 이건…… 정말이지.”

이반반은 그 말을 듣자, 자기가 육장봉의 계략에 걸려들었음을 알아챘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나왔다.

육 대장군은 처음부터 황제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가 먼저 황제에게는 숨기자고 하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누가 무장은 무식하고 사람을 다룰 줄 모른다고 했나?’

정말 그 사람들에게 와서 육 대장군이 사람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한번 와서 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반반, 수고하시오.”

육장봉은 목적을 달성하자, 한마디도 더 하지 않고 돌아서서 가 버렸다.

이반반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난각으로 돌아가 황제의 시중을 들려고 할 때였다. 내관 하나가 서둘러 다가왔다.

“총관, 총관……. 큰일 났습니다. 손 신의, 그분이, 그분이 황궁을 나가겠다고 하십니다. 도저히 붙잡을 수 없었어요. 여기 계속 있다가는 전 재산이 날아가서, 옷가지마저 싹 다 털릴 거랍니다!”

“어찌 된 일이냐?”

순간, 이반반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이 일도 육 대장군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구체적인 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육 대장군께서 장서루에 가셔서 손 신의에게 무언가 이야기하신 모양입니다. 그다음 손 신의가 다급하게 장서루에서 나오시더니, 바로 물건을 챙기고 황궁을 떠나려고 하십니다. 소인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관은 울상을 짓고 말했다.

“역시 대장군 때문이었구나.”

이반반은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는 내관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해서 직접 손 신의를 찾아갔다. 바람처럼 빠르게 걸은 끝에, 겨우 대전 입구에서 손 신의를 막아설 수 있었다.

“손…….”

손불사는 이반반이 입을 열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내 조금 전에 갑자기 월령안과 한 약속이 떠올랐소이다. 만약 내가 약속을 어긴다면 진료비의 열 배를 배상해야 하오. 배상하지 못한다면 약왕곡 전부를 월령안에게 주기로 한 데다가, 이 몸이 무상으로 십 년이나 일을 해야 하오. 내가 그 약속을 할 적에 강호인들이 입회했소. 이 약속을 어긴다면, 내 명성이 땅에 떨어질 테니 계약대로 해야 하오.”

이반반은 그 말을 듣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소인은 손 신의를 잡지 않겠습니다.”

그가 억지로 잡았다가는 오히려 손 신의를 해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럼 월령안을 도와주는 격이었다.

“휴, 총관께서 나 대신 폐하께 죄송하다고 전해 주시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요.”

손불사는 덤덤한 얼굴을 했지만, 속으로는 참지 못하고 욕을 퍼붓고 있었다.

‘내 유일본 의서야, 이번 생에 널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는지 모르겠구나.’

“손 신의,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사정을 아시면 절대 신의를 탓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기분이 언짢을 것은 분명했다.

이제는 정말로 육 대장군이 의서를 베끼라고 한 일을 황제에게 알릴 수 없게 되었다. 황제가 아는 날에는 더욱 화를 낼 것이다.

이반반은 한숨을 내쉬고 손불사를 배웅했다. 그리고 황제에게 보고하러 난각으로 갔다.

육 대장군이 의서를 베끼게 한 일은 몰라도, 손 신의가 떠나간 일은 숨길 수 없었다.

이반반이 난각으로 돌아갔을 무렵에는 황제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황제가 쉬는 틈을 타서 손불사가 가 버린 자초지종을 말했다.

말을 마친 다음에는 손을 모으고 서서, 황제를 쳐다볼 엄두도 못 냈다.

뜻밖에도 황제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사람마다 월령안의 수완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에야 드디어 그 실력을 알았구나. 짐이 손불사를 붙잡으니 월령안이 짐의 어의를 빼내 갔고, 짐이 어의를 불러들이니 손불사가 또 황궁을 나갈 수밖에 없구나. 이반반, 네가 보기에 이번 판에서 짐이 졌느냐, 이겼느냐?”

“당연히 폐하께서 이기셨습니다.”

이반반은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짐의 태의원 원정이 월령안에게 신세를 졌다. 짐은 이번 판에서 좀 꼴사납게 졌구나.”

이반반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속으로는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

오늘의 이 일들이 월령안에게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알 수 없었다.

* * *

월령안은 황궁에서 나가자, 먼저 송 어의를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급료를 미리 준다는 구실로 송 어의에게 은표 백 냥을 줬다. 집안일을 잘 챙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후에는 그를 명월산장으로 데려가야 했다.

“송 어의,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집 어르신이 성 밖에서 요양하고 계십니다. 오후에는 약욕을 해야 해서 의원이 꼭 필요합니다.

손 신의가 황궁에서 나오지 못하니 송 선생님께서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빼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부터 일을 해 주세요. 어르신께서 상세가 좋아지시면 장기 휴가를 드릴게요. 괜찮으신가요?”

월령안은 송 어의를 집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

송 어의 집의 초라한 대문을 보니 집안 형편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힘들 수도 있었다.

그녀가 들어가 잠시 앉겠다고 하면, 집안사람들은 틀림없이 잘 접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수도 있었다.

“월 가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송 어의는 은표 백 냥을 들고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도 고결하게 지내고 싶었다. 생계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는 이 돈이 너무 필요했다.

이번 달이 되자, 그의 집에 있는 물건은 모조리 저당 잡혔다. 마누라와 며느리의 혼수마저도 그 물건에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이번 달에도 집에 돈을 가져가지 못하면 온 가족이 쫄쫄 굶어야 했다.

또 그의 손자가 공부하는 서원의 학비도 삼 개월이나 밀린 상태였다. 그의 마누라 말로는 학비를 내지 못하면, 서원에서 손자를 돌려보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송 선생님, 별말씀을요. 선생님은 이제 우리 월씨 가문의 사람입니다. 이것들은 원래 선생님께서 마땅히 받을 돈이에요. 제가 미리 드린 것뿐이에요. 앞으로 여기서 깎을 거예요.”

월령안은 이 돈을 베풀었다고 여기지 않고, 싹싹하게 말했다.

“올해 저희 집에 일손이 부족하여 옷은 당장 새로 지어 드리지는 못할 것 같네요. 대신 나중에 집사더러 올해 춘계 분례(份例 – 급료 외에 정기적으로 따로 지급하는 돈)를 보내라고 할게요. 제가 옷을 떼먹는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월 가주, 당신은 좋은 분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부터 최선을 다해서 월씨 가문을 위해 일을 하겠습니다.”

송 어의는 은표를 꼭 쥐고 정중하게 말했다.

은혜를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이것은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쩐지 월 가주가 장사를 그렇게 크게 하더라니.’

월 가주는 덕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그가 장사하는 사람이었더라도 월 가주와 거래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송 선생님, 별말씀을요. 앞으로 송 선생님께 부탁드려야 할 일이 많아요. 일단 집에 가셔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세요. 저도 돌아가서 준비해야겠어요. 미시(未時 - 13시~15시)에 모시러 올게요. 괜찮으시죠?”

그녀는 큰돈을 내놓고, 송 어의는 뛰어난 의술을 내놓는다. 이건 양쪽 모두가 원하는 거래였다. 그래서 월령안은 이걸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송 어의가 어려운 처지라 그녀에게 신세를 진 게 맞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이 그의 은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은인이랍시고 송 어의를 내려다보며, 그의 고생을 당연하다는 듯이 누릴 수는 없었다.

아무리 큰 은혜라고 해도 언젠가는 완전히 소모되는 법이다. 그녀는 정과 의리를 중요시하는 사람과 거래하는 쪽을 더 선호했다.

사람은 신선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하고,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

그런데 어찌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평생을 고생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 * *

월령안은 송 어의를 데려다준 다음, 월씨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육장봉이 보낸 예물은 그녀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전부 곳간에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막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였다. 집사가 책자를 가지고 나왔다.

“아가씨, 이건 대장군 쪽에서 보낸 예, 아니, 선물입니다. 소인이 기록해 두었습니다. 한번 살펴보시지요.”

“치우게.”

월령안은 손을 들어 밀어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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