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열 배로 배상해 달랍니다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할게요.”
월령안은 대답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또 물었다.
“대장군께서는 다른 용건이 있으신지요? 혹시 없다면…….”
“또 있소. 이변이 없다면, 올해 은과(恩科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과거)를 열 것이오.”
육장봉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월령안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월령안이 본능적으로 경계를 할 정도로 가까웠다.
그러나 육장봉이 흘린 소식은 월령안에게 이런 것들을 잊게 했다. 그녀는 기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에요?”
“내가 언제 당신을 속인 적이 있소?”
순간 육장봉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령안을 위한 일이라지만…… 다른 남자를 위해 이렇게 기뻐하다니.’
육장봉은 후회했다. 월령안에게 은과가 열릴 거라는 말을 해 주지 말 걸 그랬다.
‘유경장, 평생 낙방이나 하시지.’
* * *
마침내 월령안이 떠났다. 옆에서 한참을 기다렸던 내관이 다가와 육장봉에게 예를 올렸다.
“대장군, 폐하께서 찾아 계십니다. 난각으로 가시지요.”
“알겠다.”
육장봉이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부드러운 분위기가 순간 날카롭고 차갑게 바뀌었다.
내관은 깜짝 놀라 연신 뒷걸음질 쳤다.
사실 그는 대장군이 이제 변해서 말을 붙이기 쉬워진 줄 알았다.
그러나 대장군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월령안 앞에서만 다를 뿐이다.
육장봉이 성큼성큼 떠나가자, 내관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따라갔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따라갔지만, 대장군의 발걸음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 * *
“폐하.”
난각에 들어선 육장봉은 황제에게 읍하며 예를 올렸다.
“장봉아, 왔느냐? 앉아라.”
황제는 기분이 제법 좋아 보였다. 말하면서도 계속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짐이 듣기로, 월령안이 태의원에서 늙은 어의 한 명을 데려갔다고?”
“네.”
황궁에는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월령안이 송 어의를 데리고 나간 일도 황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어의의 의술이 어떠하냐?”
황제가 물었다.
“아주 뛰어납니다.”
육장봉이 조금 자랑스럽게 말했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월령안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왜 막지 않았느냐?”
황제는 굳은 얼굴로 짐짓 화를 내듯이 말했다.
사실 그가 마음을 쓸 것까지도 없는 일개 어의일 뿐이었다. 기분이 나쁜 이유는 그의 손에서 사람을 빼내 갔기 때문이다.
‘월령안, 너무 건방지군!’
육장봉이 되물었다.
“급료는 세 배, 일 년에 두 번 푸짐한 명절 선물까지 준다는데, 신이 어떻게 막겠습니까?”
“그럼 그자는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갔단 말이냐? 그렇게 눈앞의 이익만 보고?”
어의의 신분은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한다. 돈만 밝히는 어의는 남겨 두어도 쓸모가 없었다.
황제는 순간 흥미를 잃었다.
“물론 아닙니다.”
육장봉은 황제를 힐끗 보고 말했다.
“그자는 태의원에서 따돌림당하고 억눌려 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실력을 펼칠 기회가 없으니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월령안, 그 양심 없는 아가씨가 내 노력을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황제는 순간, 육장봉의 말에 흥미가 동했다.
“그 늙은 어의의 의술이 정말 뛰어나단 말이냐?”
누군가 경쟁자가 생기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원래 고만고만하던 것도 매우 훌륭한 것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손 신의보다는 조금 떨어지고, 다른 어의보다 뛰어납니다.”
육장봉은 솔직하게 말했다.
“장봉아, 왜 막지 않았느냐? 그렇게 의술이 뛰어나다면 짐도 녹봉을 세 배로 올려 줄 수 있다.”
황제에게 그까짓 돈이 부족하겠는가.
월령안이 돈을 써서 그의 태의원에서 의술이 뛰어난 의원을 빼내 갔다. 이 일이 소문 나면 황제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육장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폐하, 조정의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앞장서서 규칙을 무너트릴 수는 없습니다. 그자의 녹봉을 세 배로 올려 주시면, 다른 어의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녹봉을 마음대로 올릴 수 없다면 짐이 그자의 관직을 올려주면 되지 않겠느냐?
마침, 그전의 태의원 원정(院正 – 관직 이름)이 파면되었다. 그 어의의 의술이 뛰어나다니 원정으로 올리면 되겠구나.”
황제는 당장 결정을 내리고 옆에 있던 내관에게 말했다.
“이반반, 네가 이부(吏部)에 가서 이 일을 처리해라. 그 어의를 불러…… 그자의 성이 무엇이냐?”
“송씨입니다.”
“좋다. 송 원정더러 내일……. 아니, 오늘 오후부터 태의원에 와서 일하라고 해라. 그자의 의술이 얼마나 뛰어나길래 월 가주가 큰돈을 들여 빼내 갔는지 짐이 직접 보아야겠다.”
황제의 ‘월 가주’라는 단어에는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폐하, 그럴 필요까지 있습니까?”
육장봉이 심드렁하게 권유했다.
“짐의 사람은 짐만이 버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빼내서는 안 된다.”
월령안이 빼내 간 것은 어의 하나가 아니었다. 황제의 체면이었다.
“그저 폐하께서 쓰지 않으시는 늙은 어의일 뿐입니다.”
육장봉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다른 사람이 빼내 간 거라면 그러려니 할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월령안이란 말이냐.”
황제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그는 언짢은 듯 말했다.
“오늘 벌어진 일을 정말 짐이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느냐? 월령안은 청희 장공주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짐에게 뒤집어씌웠다. 게다가 짐의 사람을 빼내 가려고 했다. 짐이 지금 경고하지 않으면 아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려고 하겠지!”
월령안이 한 일이 모두 황제의 이익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절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말하다 보니 이번 사건에는 육장봉도 한몫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육장봉이 월령안과 함께 황제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다.
황제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육장봉을 언짢게 노려보았다.
육장봉은 시선을 묵묵히 돌렸다. 그는 말을 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목적을 다 이루었는데 쓸데없는 말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다 끝난 일인데, 굳이 해명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가 해명하더라도 종친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결국, 청희 장공주를 음해했다는 누명은 황제가 쓰게 되었다.
사실 황제는 만난 적도 없는 어의였다. 월령안이 빼내 가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기껏해야 칭찬이나 몇 마디 했을 것이다. 굳이 마음에 담아 두었을 리도 없다.
이제 송 어의는 도로 뺏어 왔으니, 황제도 이 일은 이쯤 해 두기로 했다. 화제를 바꾸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장봉아, 짐은 영녕후부를 처리하려고 한다. 영녕후 손에 있는 병마는 네가 장관하도록 해라.”
“폐하, 신의 수중에는 이미 삼십만 명의 대군이 있습니다. 또 경기(京畿)의 방어와 추밀원도 맡고 있습니다.”
육장봉은 황제를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많은 중임을 떠안고 있는지 소리 없이 일깨워 주었다.
그는 너무 바빠 월령안을 찾아갈 시간조차 없었다.
황제가 이런 식으로 그에게 계속 중임을 맡기면. 그가 일을 돌볼 겨를이 있는지는 둘째 문제였다. 이미 병권과 정권을 쥐고 있는데, 여기에 또 병권을 더 얹어 주겠단다.
‘내가 반역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안 되나?’
아무리 그를 신임한다 해도 일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무슨 일이든 정도가 있어야 한다. 그의 수중에 있는 권력은 너무 컸다. 그에게 반역할 마음이 없다 해도, 그의 수하 중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매수당해 다른 생각을 품을지도 몰랐다.
그때가 되면 많은 일을 제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영녕후부의 병권을 그에게 넘기겠다는 황제의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시험해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튼 이 일은 맡지 않을 생각이었다.
육장봉의 머리가 비상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 그는 적당한 사람을 물색해 냈다.
“폐하, 조 장군의 아들 조우량(曹友亮)이 군대에서 대단히 뛰어난 활약을 보였습니다.”
조씨 가문도 무장 가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일로 고종 황제의 미움을 사서 몰락했다.
조 장군의 아들 조우량은 황제의 외사촌 누이동생과 혼인했다.
황제의 생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태후는 황제의 생모가 아니었다. 황제의 생모는 하급 관리 가문 출신이었다. 그 가문에는 쓸 만한 사람도 없어서, 기껏해야 한량 노릇이나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태후가 아직 살아 있었다. 만약 황제가 태후의 친정인 유씨 가문 사람을 중용하는 대신 생모 가문 출신의 사람을 중용한다면, 태후가 불만스러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우량은 달랐다. 그와 황제의 생모 가문은 친척이 되었다. 그를 중용하면 황제 생모의 친정을 돌볼 수 있으면서도,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생각 끝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
“조우량은 너무 젊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육장봉은 조우량이 자기보다 몇 살 위라고 일깨워 주지는 않았다.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폐하, 몇몇 국공 중에서 주사(主事)를 뽑으시고 조우량은 부장으로 두십시오. 우선 몇 년은 훈련하는 셈 치시지요.”
황제는 잠시 생각했다. 당장 결정을 내리는 대신 한마디만 했다.
“짐이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겠다.”
그는 육장봉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육장봉의 우려도 일리가 있었다. 이 일은 찬찬히 생각해 보아야 했다.
육장봉은 황제가 따로 생각이 있는 것을 보자, 더 말을 얹는 대신 다른 일로 화제를 돌렸다.
육장봉은 늘 말수가 적었다. 황제도 처리해야 할 일이 가득했다. 용건을 끝내고 육장봉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황제도 잡지 못하고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장봉아…….”
그러나 육장봉이 돌아서자마자, 황제는 또 그를 불러 세웠다.
육장봉은 고개를 돌려 의아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았지만, 육장봉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곳에 서서 황제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황제는 한참이나 끙끙거렸지만, 육장봉은 말문을 터 주지 않았다. 결국 황제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계안이를 만나거든 전해다오. 짐이…… 잘못했다고.”
“네.”
육장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에는 담담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황제와 조계안, 이 형제는 사실 제법 재미있는 사람들이었다.
* * *
육장봉은 황제의 부탁을 승낙하고 떠났다. 난각을 나서자, 문득 월령안의 부탁도 떠올랐다. 그는 한 내관을 불러 세웠다.
“손 신의는 어디 계신가?”
“장군, 손 신의께서는 조금 전에 장서루(藏書樓)에 가셨습니다.”
내관은 예를 올리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음.”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장서루로 걸어갔다.
손불사는 장서루에 도착하자마자 의서를 탐독했다.
육장봉이 도착했을 때 그는 책에 푹 빠져 있었다. 육장봉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연이어 두어 번 ‘손 신의’라고 불러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육장봉은 하는 수 없이, 손불사의 손에 들린 책을 낚아챘다.
“손 신의.”
“뭐 하는 짓이야?”
손불사는 당장 잔뜩 약이 올랐다. 그는 펄쩍 뛰며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이건 유일본(唯一本)이라고! 딱 한 권밖에 없는 거란 말이다! 자네가 왜 뺏나? 그러다가 망가지면 어떡하려고? 어서, 어서 돌려줘!”
육장봉은 펄펄 뛰는 손불사를 무시하며 책을 등 뒤로 감췄다.
“월령안이 이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월령안이 약왕곡과 계약을 했는데, 지금 신의께서 약속을 어기셨으니 열 배로 배상해 달랍니다. 그리고 손 신의께서 계약을 어기시면 자기도 어기겠답니다. 처음에 약속했던 모든 것은 없던 일로 한답니다.”
“뭐, 뭐라고?”
손불사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책을 뺏으려는 생각도 잊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