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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44)화 (344/1,004)

344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월령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먼저 입을 열었다.

“청희 장공주는 세력을 잃었어요. 어르신의 실력이라면 태의원에서 이름을 날리는 것은 시간문제예요. 제가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세요. 하지만 급한 일이 있다면 월씨 저택으로 저를 찾아오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 두말하지 않을게요.”

“월 가주, 저를 고용하기 싫다는 말씀이신가요?”

늙은 어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르신은 어의잖아요. 어찌 제가 고용할 수 있겠어요.”

월령안이 농담을 하듯 말했다.

그녀야 당연히 인재를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신세 진 것을 이용해 타협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억지로 그녀를 따라가게 하느니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더 나았다. 어쩌면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럼 고용하시지요. 전 이제 어의 노릇 안 하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오랜 세월을 버티느라 질렸다.

“이제 좋은 날이 올 텐데요. 이런 때 사직하시는 건 아쉬우실 거예요.”

월령안은 그의 처지를 생각해 권유했다.

“월 가주, 인정이 많은 분이시군요.”

그는 자신의 결심에 더욱 확신이 생겼다.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태의원이라는 곳은 의술이 뛰어나다 해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제 성격은 제가 잘 압니다. 저는 태의원에서 승승장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귀인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또 그런 것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그는 의원이지 간신이 아니었다.

늙은 어의가 말을 이었다.

“제가 사직하지 못한 건 생계가 끊길까 두려워서입니다. 태의원의 녹봉이 없으면 우리 식구가 거리에 나앉게 될 테니까요. 또 관리라는 신분이 사라지면 비명횡사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도 했지요. 이제는 위험도 사라졌다니, 이 태의원에 더는 있고 싶지 않습니다.”

이십 년 동안이나 냉대를 받고, 억압과 배척을 당했다. 마음은 진작에 식었다.

그는 뛰어난 의술을 지녔지만, 황궁 사람을 치료하고 싶지는 않았다. 황궁은 사람을 잡아먹는 곳이었다.

늙은 어의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월령안은 그가 진심으로 사직을 바라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되자, 그녀도 사양하지 않았다. 그더러 재빨리 사직하라고 했다. 마침 그녀와 함께 황궁을 나가면, 따로 마차를 부를 돈도 아낄 수 있었다.

늙은 어의는 헤벌쭉 웃었다. 그는 월령안에게 공수하며 말했다.

“앞으로 주인어른 덕에 먹고 살겠습니다.”

“어르신, 별말씀을요.”

월령안은 몸을 일으켜 반례(半禮)를 올렸다.

늙은 어의의 말대로였다. 그가 사직하겠다고 말을 꺼내자마자, 태의원 사람은 도장을 찍어 둔 문서를 그에게 넘겨 주었다. 그리고 늙은 어의를 비웃으며 말했다.

“송(宋) 어의, 드디어 입을 열었구먼. 우리는 진작 이 수속을 준비해 두었네. 자네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지.”

송 어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개인 물품을 정리하고 작은 의료함을 메더니, 월령안을 따라서 나갔다.

그의 기분이 우울해 보이자, 월령안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저자들은 나중에 후회할 거예요.”

“네. 웃는 건 제가 될 겁니다.”

태의원을 나선 송 어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굳센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반드시 태의원의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큰 명의가 될 것이다.

* * *

월령안은 태의원에서 반 시진 넘게 쉰 덕에, 몸이 많이 좋아졌다.

송 어의는 태의원을 떠나기 전에 직접 만든 냉향환(冷香丸)을 월령안에게 먹였다. 그러자 다시 살아난 것처럼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녀는 육장봉이 안아서 황궁 밖으로 데려다주겠다는 제안을 꿋꿋하게 거절했다. 또 가마를 태워 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하고, 한사코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육장봉은 그녀가 지금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그 역시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황제가 그녀에게 불만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송 어의에게 월령안의 몸 상황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 받고 나자, 육장봉은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단지 황궁 밖까지 배웅해 주는 것만큼은 고집했다.

육장봉은 황궁을 마음껏 누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육장봉을 앞세운 이상, 월령안과 송 어의는 길을 가는 내내 아무런 질문도 받지 않았다. 금군들은 월령안이 어의 하나를 데리고 황궁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세 사람은 곧 마차가 세워진 곳에 도착했다. 월령안은 저 멀리서 육십과 육십일이 마차 옆을 지키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런데 마차 문이 굳게 잠겨 있는 것을 보자, 은근히 불안해졌다.

이건 손불사답지 않았다. 그가 마차 안에 있다면 반드시 창문을 열고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손불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마차에 가까이 다가간 월령안은 육십과 육십일이 예를 올리기도 전에 물었다.

“손불…… 손 신의는요?”

“월 낭자, 손 신의께서는 황궁에 남으시겠답니다.”

육십과 육십일은 억지로 보고했다. 마음속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월 낭자가 그들이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했다며, 다시 장군부로 돌려보낼까 걱정이 되었다.

월령안이 초조하게 물었다.

“황궁에 남겠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폐하께서 만류하셨나요?”

“아닙니다. 손 신의께서 먼저 남겠다고 하셨습니다.”

육십일이 아주 빠르게 대답했다. 월령안이 다시 묻기도 전에 편지 한 통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월 낭자, 이것은 손 신의께서 낭자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그분 말씀으로는 낭자께서 편지를 보시면 아실 거랍니다.”

월령안은 편지를 꺼내 펼쳤다. 대충 훑어보고 난 뒤, 화가 나서 실소했다.

“폐하께서는…… 너무 지혜로우시네요.”

황제는 실전된 의학 고서로 손불사를 유혹한 것이다. 그녀는 정말 황제에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 수법은 정말 제대로 적중했네.’

월령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손불사는 좀 비싸게 굴면 어디가 덧나나? 속세를 벗어난 고인이라는 명성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쉽게 매수되면 안 되지!’

“왜 그러시오?”

육장봉은 월령안이 화가 나 씩씩거리는 것을 보았다. 손불사가 ‘먼저’ 궁에 남아 있겠다고 한 일에 다른 이유가 있는 줄 알고, 월령안의 손에서 편지를 건네받았다.

편지에는 딱히 감출 만한 내용이 없었기에 월령안도 순순히 넘겨주었다.

편지를 읽은 육장봉이 말했다.

“이 편지에 다른 뜻이 더 있소?”

황궁은 이야기를 나누기 편한 곳이 아니었다. 손불사가 은어를 사용했을 수도 있었다.

“없어요!”

월령안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도와줄 방법이 없소.”

육장봉은 편지를 월령안에게 돌려주었다. 문득 웃고 싶어졌다.

월령안은 방금 태의원에서 재주가 범상치 않은 어의를 빼냈다. 그런데 황제는 의학 고서를 미끼로 손불사를 황궁에 붙잡아 두었다.

‘이야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닌가.’

월령안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지만, 그래도 참아야만 했다.

“대장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육장봉에게 예를 올렸다. 그리고 편지를 송 어의에게 넘겨주었다.

“송 선생님, 보세요. 이 처방대로 환자에게 침을 놓을 수 있나요?”

다행히 손불사는 황궁 밖에 아직 환자가 두 명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편지에 치료법과 그 순서를 자세히 적어 두었다.

그게 없었더라면, 그녀는 칼을 들고 황궁으로 쳐들어가서 손불사를 죽여 버리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고서는 황궁에 있는 건데 언제 봐도 상관없잖아? 우리 영감님 목숨이 고서 몇 권만도 못한 거야? 손불사는 자기가 의원이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 거야?’

“이 처방은…… 정말 절묘합니다.”

송 어의는 그 처방을 한 번 훑어보자, 머릿속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당장 흥분해서 말했다.

“월 가주, 이 처방이 혹시 약왕 손불사에게서 나온 것입니까?”

“맞아요.”

월령안은 또 짜증이 나려고 했다. 지금은 손불사의 이름을 듣기도 싫었다.

‘이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 하는 나쁜 늙은이 같으니!’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손 신의의 처방을 보게 될 줄이야! 손 신의는 역시 손 신의로군요. 이 처방은 그야말로 완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줄이거나 보태서도 안 됩니다.”

송 어의는 처방을 받들고 뜨거운 눈물을 글썽였다.

편지의 말투를 보건대, 손 신의와 월 가주는 사적으로 교분이 두터운 것 같았다. 어쩌면 그도 손 신의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 기회만 준다면, 그는 월령안을 결코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라 보장할 수 있었다.

“송 선생님, 이 처방대로 약을 배합하고, 환자에게 약을 쓰고, 침을 놓을 수 있나요?”

월령안은 미칠 듯이 흥분한 송 어의를 바라보았다.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도 예전에는 약왕 손불사를 신선처럼 숭배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던가.

‘말을 말아야지. 손불사, 이 인간은 세상 사람들이 가진 환상을 깨트리는 게 특기라니까.’

“할 수 있고말고요. 제가 하겠습니다.”

송 어의는 단호한 말투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럼 송 어의께 부탁드릴게요.”

월령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불사에 대한 원망도 어느 정도 사라졌다. 동시에 송 어의를 빼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장 어디 가서 손불사가 말한 침술에 능숙하고, 의술이 고명하며, 체력까지 좋은 의원을 찾을 수 있겠는가.

저택에 있는 노 의원의 의술도 괜찮았다. 하지만 노 의원은 환자를 돌보는 데 더 능했다. 게다가 나이가 많다 보니 과로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노인은 매번 약욕을 하면서 침도 맞아야 했다. 노 의원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이제는 송 어의가 있었다.

물론, 월령안은 손불사를 이렇게 쉽게 놔 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육장봉과 말했다.

“대장군, 황궁에서 손 신의를 만나거든 제 말 좀 전해 주세요. 제가 예전에 약왕곡과 계약을 맺었거든요. 지금 손 신의가 계약을 위반했으니 계약의 조항대로 열 배로 배상하라고 하세요. 만약 배상하지 않겠다면…… 제가 계약을 위반해도 탓하지 말라고 하시고요.”

그녀는 어마어마한 돈으로 손 신의를 청해 노인의 병을 치료하게 했다. 손불사가 나 몰라라 하면 그녀도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수 있었다.

‘손불사, 후회할지 안 할지 두고 보자고!’

“좋소.”

육장봉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내가 꼭 당신 대신 전하겠소.”

역시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월령안다웠다. 그는 손불사가 화가 나 펄쩍 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대장군께 감사드려요. 시간이 늦었으니 저와 송 선생님은 먼저 나갈게요.”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읍하며 작별을 고했다.

“그러시오. 며칠 간은 조심하시오. 월 삼낭을 아직 찾지 못했소. 월 삼낭은 어두운 곳에, 당신은 밝은 곳에 있으니 조심하시오. 장씨 가문에서도 손녀가 죽었으니 이 원한을 당신에게 갚으려고 할 것이오.”

육장봉은 월령안이 이렇게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녀더러 남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조금이나마 더 보려고 당부의 말을 건네며 시간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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