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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41)화 (341/1,004)

341화 나와 좀 걷지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외쳤다.

‘폐하, 제발 걱정하지 마시고 저희를 내보내 주십시오. 절대 이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겁니다.’

‘청희 장공주를 죽이시려거든 죽이십시오. 저희는 절대 다른 말을 하지 않을 겁니다. 영녕후부를 숙청하고 싶으시면 하십시오!’

‘저희는 무조건 두 손 들고 찬성할 겁니다. 만약 조정 대신들이 반대한다면, 그땐 저희가 나서겠습니다!’

황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반, 종친들을 배웅하거라.”

종친들이 다급히 말했다.

“신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은 서둘러 물러갔다.

‘드디어 무사히 궁을 나갈 수 있게 되었구나. 다시는 이런 ‘증인’ 노릇은 절대 하지 않겠다.’

‘이게 무슨 증인이란 말인가. 이는 폐하의 증인이 된 게 아닌가.’

‘폐하의 수완이 점점 고명해지는군. 분명 청희 장공주를 처리할 셈이면서, 약왕 손불사의 명성을 이용해 이 많은 사람을 증인으로 삼다니, 정말…… 대단해!’

몇몇 친왕은 궁을 나간 후 분분히 칭찬했다.

“정말 폐하는 고단수로군!”

그들은 황제가 사전에 전혀 몰랐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가 그들을 불러서 증인을 세운 게 정말 약왕 손불사의 요구 때문일 리가 없었다. 손불사의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일개 강호 인물일 뿐이다. 그런 그가 무슨 자격으로 황제에게 조건을 내걸겠는가.

이번 사건은 황제가 판 함정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청희 장공주를 동정하지 않았다.

“하늘이 저지른 잘못은 그럭저럭 넘어가도, 자기가 저지른 잘못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지.”

청희 장공주의 반응을 보면, 황제도 그녀를 음해하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황제는 그저 그녀의 계략을 역이용했을 뿐이었다.

종친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굴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황제에 대한 경계심이 늘었다.

이제 황제는 오 년 전의 수완이 유치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황제가 아니었다. 삼 년 전의 헛된 포부만 가득하고, 그에 걸맞은 실력과 수단은 갖추지 못했던 소년 황제도 아니었다. 또 작년의 그 대신들의 간섭에 계속 타협하고 속으로만 묵묵히 화를 삼키던 황제도 아니었다.

황제는 지금 수완과 계략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병권을 움켜쥔 육 대장군의 전폭적인 지지도 얻고 있었다. 이제 황제는 조정 대신들과 힘을 겨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황제의 위엄은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그만큼 앞으로 그들에게 기댈 일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들의 좋은 날도 이제는 끝이 보였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장군왕은 심오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에게 황제는 단지 월령안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말을 해야 할까?

오늘 벌어진 사건은 모두 월령안이 꾸민 일이고, 청희 장공주는 월령안의 손에 당했을 뿐이라고?

육장봉이 제때 영녕후 세자를 데리고 입궁한 일조차 월령안의 계략이었다고?

아니.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은 혼자 속으로만 알고 있으면 족했다.

장군왕은 뒷짐을 지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마음속으로 월령안의 재간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수완이면 수완, 능력이면 능력, 무엇보다도 가장 뛰어난 것은 인맥이었다. 강호에서나 조정에서나 무시무시한 거물들이 그녀를 도우려고 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하늘이 무심한 일일 것이다.

“참 다행이구나!”

장군왕은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

“다행히, 내가 아들 하나는 잘 낳았어!”

그의 골칫거리 아들이 평생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바로 월령안과 좋은 관계를 맺은 것이다. 게다가 월령안의 눈에 들어, 같이 돈을 벌며 협력하고 있지 않던가.

그들 장군왕부가 계속해서 월령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의 아들도 평생 평안할 것이다. 아니, 그의 손자 세대까지도 든든할 것이다.

월령안에게 친 누이동생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급기야, 비록 상인으로 일하는 여인이라지만, 장군왕 세자가 월령안을 세자비로 맞아들여도 괜찮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 * *

황제는 증인으로 참석한 종친들을 전부 보낸 뒤, 청희 장공주를 영취원(泠翠苑)으로 보냈다.

영취원은 경안궁과 달랐다.

내궁(內宮)에서 태후와 황후의 궁전을 제외하면 경안궁이 가장 크고 화려했다. 게다가 경안궁은 황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위치만 보아도 존귀함의 상징이라, 아무나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반면, 영취원은 냉궁과 가까워 외궁(外宮)에 속하는 곳이었다. 평소에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황제가 청희 장공주를 이곳에 묵게 한 것을 보면, 그가 그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짐작이 갔다.

물론, 청희 장공주를 영취원에 묵게 한 데는 병사들이 그녀를 감시하기 편하게 하려는 이유가 더 컸다.

“장봉아, 장공주의 몸은 귀중하다. 네가 금군을 파견하여 하루 열두 시진 빈틈 없이 보호하거라. 알겠느냐?”

금군이 장기간 후궁에 드나드는 것은 아무래도 적합하지 않았다.

황제는 자기 여인이 다른 사내와 사통한 사건을 한 번 겪은 뒤로 이런 문제에 아주 예민해졌다.

“신, 명을 받들겠습니다.”

육장봉은 담담하게 대답하고 예를 올리지 않았다. 그는 황제 앞에서 편안하게 행동했다. 황제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육장봉과 황제는 평소에 이렇게 지내는 것이 분명했다.

월령안은 손불사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육장봉과 황제가 교류하는 방식을 보고, 속으로는 깜짝 놀랐다.

황제 앞에서 이토록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육장봉은 역시 황제가 매우 아끼는구나!’

월령안은 운이 좋았다. 그녀가 육씨 가문에서 쫓겨났던 걸 알고 손불사는 속으로 육장봉의 매정함과 냉혹함을 원망했었다. 그러나 저 모습을 보니 그에게 크게 밉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황제가 육장봉에게 보이는 신임이나 권세로 보아, 그녀를 짓밟는 것은 개미 하나 죽이는 것처럼 쉬웠을 것이다.

심지어 육장봉이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가 그녀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만 하면, 그에게 잘 보이느라 그녀를 죽어라 짓밟을 사람은 넘쳐났을 것이다.

황제는 청희 장공주의 거처를 지정한 뒤, 드디어 잊고 있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손 신의, 오늘 고생했네. 다친 데는 없는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손불사는 우아하게 일어서서 황제에게 포권했다.

‘괜찮을 리가 있나? 난 안 괜찮아!’

그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지도, 병풍에 깔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육장봉은 가차 없이 그를 내던졌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허리가 정말 아팠다.

지금도 허리가 계속 아팠다. 하지만 황제 앞에서는 고인다운 풍모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얕잡아 보지 못하도록, 아파도 괜찮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짐이 손 신의에게 가르침을 청할 일이 있네. 신의, 괜찮겠나?”

황제가 온화하게 물었다.

황제가 입을 열자, 이반반은 대전의 사람들에게 눈짓했다. 곧이어, 대전 안에 있던 내관 모두가 물러갔다.

육장봉도 월령안에게 눈짓했다. 이를 본 월령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내관의 뒤를 따라 조용히 물러갔다.

명화전에는 황제와 손불사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이 없자, 황제도 더는 감추지 않았다. ‘말 못 할 사정’을 하나하나 손불사에게 말해 주어, 진료하게 했다.

손불사는 비록 거만하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황제가 직접 입을 연 데다가, 태도도 이렇게 좋으니 그도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바로 자리에 앉아 황제를 자세히 진찰하기 시작했다.

* * *

명화전 밖.

월령안은 가장 마지막에 명화전을 나간 사람이었다. 밖으로 나간 그녀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었다. 육장봉을 피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 둘이 가장 뒤로 떨어졌다. 앞에서 걷던 내관과 금군 병사는 모두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월령안은 그들을 쫓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육장봉은 벌써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나와 좀 걷겠소?”

월령안이 말했다.

“좋아요.”

그녀가 뭘 어쩌겠는가. 육장봉은 무언가 묻는다 해도 그건 통보에 가까웠다.

“어화원(御花園)으로 갑시다. 거기 경치가 좋더군.”

육장봉은 월령안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함께 황궁을 노닌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제일 먼저 떠오른 장소는 어화원이었다. 어화원 말고는 그녀를 어디로 데리고 가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월령안이 잠시 머뭇거렸다.

“어화원에서 비빈 마마들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

어화원은 정전(正殿)과 후궁의 중간에 있었다. 어화원을 나서면 바로 황제가 정무를 보는 전전이 나왔지만, 그곳에는 비빈들이 드나들 수 없었다.

어화원은 정전과 가까운 곳이다 보니 그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월령안이 보기에 육장봉과 함께 어화원에서 산책하는 일은 그리 좋은 선택 같지 않았다.

“그럼…… 수원(獸苑)으로 가지.”

육장봉은 자주 황궁에 드나들었다. 그러나 난각을 제외 하면 딱히 가 본 곳이 없었다. 고작해야 수원 정도일까. 월령안이 어화원이 적절하지 않다고 하니, 바로 수원이 떠올랐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수원에서는 진귀하고 색다른 동물을 많이 키웠다. 내관들에게 듣기로는 후궁들도 수원의 동물을 좋아한다고 했다.

‘월령안도 여자니까 좋아하겠지?’

정작 월령안은 어디에 가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대장군, 수원이 명화전과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

명화전은 전전에 있었다. 수원은 이름만 들어도 동물과 관련 있는 장소이다. 십중팔구 좋은 냄새가 날 리 만무했다. 그런 곳이라면 황제가 정무를 보고, 머무는 곳과는 아주 멀리 떨어졌을 것이다.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황제와 사이가 좋은 육장봉이야 황궁에서 마음껏 돌아다니고 산책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아니었다.

육장봉은 침묵하고 월령안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내가 말한 두 군데 다 문제가 있는 곳인가? 아니면 월령안이 나를 완곡하게 거절하는 건가?’

월령안은 육장봉의 시선을 느끼곤 서둘러 말했다.

“대장군, 폐하께서 손 신의와 말씀을 얼마나 나누실지 모르니, 차라리 이 주변을 걷는 건 어떠십니까?”

육장봉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는 황궁을 자주 드나들기는 했지만, 사실 황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세 번째 선택지를 도저히 떠올릴 수 없어, 그녀의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명화전 주변에는 풍경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화초나 수목 한 그루조차 없었다. 그저 백옥이 깔린 회랑과 계단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다섯 걸음마다 금군 병사 한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곳곳마다 삼엄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금군이 감히 육장봉을 감시하지는 못하겠지만, 월령안은 어디를 가던 금군에게 감시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월령안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 명화전 왼쪽에 있는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는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금군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육장봉이 있는 한, 감히 이쪽을 감시할 금군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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