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몸과 마음으로 갚으시오
하지만 이때, 구석에 서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고 애썼던 월령안이 다짜고짜 뛰어나왔다.
“조심해요!”
동시에, 황제 옆에 앉아 있던 육장봉이 훌쩍 뛰어오르며 위쪽으로 몸을 날렸다.
퍽!
육장봉은 허공으로 뛰어올라 병풍을 발로 차 버렸다. 육중한 병풍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에 흩어졌다.
“으악!”
“앗……, 내 얼굴이!”
병풍 뒤에 있던 영녕후 세자와 청희 장공주는 연달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곧 두 사람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혼절했다.
그와 동시에, 월령안도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손불사를 받아냈다. 하지만 그녀의 힘이 부족해 손불사를 받아낸 뒤, 둘은 계단 아래로 함께 굴러떨어졌다.
“너무 무겁잖아요!”
월령안은 손불사 대신 바닥에 부딪칠 준비를 하고, 애써 그를 끌어 안았다.
하지만 그녀가 예상했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팔의 묵직한 느낌도 사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월령안은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드높은 천장이었다. 곧이어 육장봉의 얼굴이 커다랗게 보였다.
“당신…….”
‘육장봉이 날 구해 준 건가? 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나?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다 기댔소?”
육장봉의 낮은 목소리로 가볍게 웃었다.
“지금은 상황이 적절하지 못하군. 다 기댔으면 일어나시오.”
월령안은 육장봉의 팔에 기댄 채였다. 몸이 비스듬히 기울었지만, 육장봉의 손힘이 지탱해 준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월령안은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일어섰다. 하지만 발아래가 계단이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말았다.
“앗…….”
월령안은 한 발을 허공에 디뎠다. 또 넘어질 것 같자, 육장봉이 손을 내밀어 잡아 주었다. 그리고 살짝 끌어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
“참, 사람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하는군.”
“저……. 가, 감사합니다.”
월령안의 얼굴이 순간 확 붉어졌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육장봉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 내 모습은 멍청하고 바보 같겠지? 아! 남들 보기 부끄럽네.’
육장봉은 고개를 숙이고 월령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억하시오. 목숨을 살려 준 은혜이니, 몸과 마음으로 갚으시오.”
그는 월령안이 반응하기 전에 바로 손을 풀었다. 그다음 뒤로 한걸음 물러서더니 주의시켰다.
“발아래는 계단이니 조심하고.”
월령안은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몰래 숨을 들이마시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몸을 돌리더니 덤덤한 얼굴로 육장봉에게 읍했다.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월령안은 끝까지 읍했다. 게다가 한참이 지나도록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육장봉은 그녀의 앞을 막아선 채, 저지하지도, 일어나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를 가려 주듯 그녀의 앞을 막아섰을 뿐이다.
월령안은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얼굴에 떠오른 홍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별 것 아니오.”
육장봉은 힐끗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월령안은 시선을 거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 구석에 계속 숨어 있기로 했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육장봉에게 밀쳐져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손불사가 보였다. 그는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고인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월령안은 재빨리 뛰어가 손불사를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손 영감님, 괜찮아요?”
“살살해, 살살…… 아프니까.”
손불사는 허리를 잡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는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육가 놈은 사람도 아니야. 나를 분명히 받았으면서 보호해 주기는커녕 이 늙은이를 내던졌어. 아이고, 내 허리야…….”
월령안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손불사도 자신처럼 육장봉의 품에 넘어졌더라면 어떤 광경이 연출되었을지 차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장면은 너무 ‘아름다워’ 똑바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월령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불사를 옆에 앉힐 때까지 묵묵히 부축했을 뿐이다.
사고가 벌어진 다음, 종친들은 깜짝 놀라 곧바로 멀찍이 피했다. 그래서 그들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장군왕의 반응이 유독 빨랐다. 그는 월령안이 오늘 일을 벌일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단지 이렇게 큰일을 벌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청희 장공주는 끝났구나!’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모든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원하는 것이면 다 가졌던 청희 장공주가 일개 상인의 손에 처절하게 패할 줄이야.
장군왕은 사람들 뒤에 서서 착잡한 시선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문밖에 있던 금군도 소리를 듣자마자 재빨리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황제와 친왕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보호했다.
황제는 연신 뒷걸음치며 차가운 시선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육장봉이 계단을 내려와서야 황제는 명령을 내렸다.
“영녕후 세자를 잡아들이고 청희 장공주를 보호해라. 아무도 장공주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하나같이 말이 아니군! 정말 내가 만만하다고 여기는 건가?’
“예, 폐하!”
금군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영녕후 세자를 묶었다.
“폐하, 공주께서 다치셔서 피를 흘리고 계십니다.”
금군 병사는 청희 장공주를 보자, 당황해서 바로 황제에게 보고했다.
“어의에게 살피라고 해라.”
황제는 냉혹하고 무정하게 말했다.
“네, 네.”
어의들은 놀라서 어찌할 줄 몰랐다. 그들은 황제의 말을 듣자, 전전긍긍하며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골치가 아파졌다.
“폐하, 장공주 마마께서는 얼굴을 다치셨습니다. 상처가 조금 크다 보니……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청희 장공주가 자기 얼굴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는, 이 어의들이 가장 잘 알았다.
그들은 청희 장공주를 위해 얼굴 관리 약을 여러 가지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얼굴이 망가졌으니, 그녀가 어떤 소란을 피울지 몰랐다.
황제는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목숨에는 지장이 있느냐?”
‘얼굴이 망가졌다니 잘 됐군. 그 아름다운 얼굴을 잃고도, 여전히 남자들이 자기에게 목숨을 바치게 할 수 있을지 보고 싶구나.’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어의가 다급히 말했다.
“생명에 지장이 없다면 되었다. 장공주가 은침으로 혈 자리를 봉한 흔적이 있는지 샅샅이 살펴보거라.”
이것이야말로 지금 황제가 가장 신경 쓰는 일이었다.
황제는 최근 며칠 동안, 청희 장공주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 관대하게 대했다. 그 바람에 조계안까지 다치게 한 것을 떠올리자, 당장 청희 장공주를 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누구라도 황제를 가지고 놀고도 무사할 수는 없다. 고종 황제가 금지옥엽처럼 아끼던 청희 장공주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의도 눈치가 있어서 남녀가 유별하다느니, 공주는 존귀하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다.
어의는 손불사에게 물어, 혈 자리를 봉하려면 일반적으로 명치에 침을 꽂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대전에 있는 내관에게 가위를 가져오라고 한 뒤, 청희 장공주 명치 부위의 옷을 잘라냈다.
이렇게 하면 청희 장공주에게 결례를 범하는 것도 아니었고,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도 있었다.
“폐하, 장공주 마마의 명치에 은침 두 개가 박혀 있고, 또 침 자국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어의는 확실한 증거가 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일어서서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바로 이 말을 듣고 싶어 할 것이다.
“은침을 빼내라.”
어의의 말을 들은 황제는 놀라지 않았다.
조금 전에 선보였던 손불사의 실력은, 그의 의술이 태의원의 여러 어의보다 훨씬 고명함을 깨닫게 했다.
손불사가 단호하게 한 말이니 분명 사실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황제도 종친들 앞에서 어의에게 검증하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폐하.”
어의는 아무 말 없이 사람들 앞에서 청희 장공주의 명치에 박혀 있는 은침 두 개를 뽑아냈다.
“쿨럭!”
은침을 빼내자, 청희 장공주는 피를 왈칵 토했다. 그녀의 입에서 선혈이 전혀 멈추지 않고 계속 뿜어져 나왔다.
어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다급히 손에 든 은침을 옆에 두고 지혈하려고 했다. 하지만 갖은 방법을 다 써도 피는 멈출 줄 몰랐다.
어의는 도저히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아 서둘러 보고했다.
“폐하, 장공주 마마께서 계속 피를 토하고 계십니다. 피가 도저히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할 듯합니다.”
곧, 청희 장공주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어의의 몸에도 피가 잔뜩 묻은 채였다.
“손 신의.”
황제는 서둘러 손불사를 바라보았다. 청희 장공주는 지금 죽어서는 안 됐다. 적어도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됐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가 음모를 꾸며 청희 장공주를 죽였다고 소문이 날 것이다.
“괜찮습니다. 기혈이 역류하는 것뿐입니다. 금방 진정될 겁니다.”
손불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이까짓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죽지만 않으면 됐다.’
황제는 안심하고 명령했다.
“먼저 장공주를 진맥해라.”
“네, 폐하.”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어의도 더는 청희 장공주의 토혈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그녀의 맥을 짚었다.
맥을 짚던 어의의 안색이 갑자기 흐려졌다.
“폐하, 태기가 있습니다. 두 달 정도 되었습니다.”
황제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그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 자리에 있던 종친들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비록 방금 손 신의가 청희 장공주는 회임한 지 두 달이 되었다고 했지만, 내심 오진이 아닐까 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어의가 동일한 진단을 내렸다.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대전 안에 낮고 덤덤한 목소리가 울렸다.
“장공주 마마께서는 줄곧 거처에만 틀어박혀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최근에 마지막으로 외출 하셨던 때는 춘일연 날입니다. 그보다 일찍이는 설을 쇨 때 입궁하셔서 황궁 연회에 참석하셨습니다. 그 사이에 장공주 마마께서는 외출하신 적이 없으시니, 영녕후 세자가 불임이라면, 혹시 영녕후의 아이가 아닐런지요?”
사람들은 말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느긋하게 말하는 육장봉의 모습이 보였다.
종친들은 당장 뛰어가 육장봉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이토록 충격적인 일을 이렇게 무심하게 말해 버리다니. 정말 이래도 되나?’
‘육장봉은 우리를 죽일 셈인가?’
‘그런 이야기는 우리가 가고 나서 하면 안 되나?’
그들은 오늘 약왕 손불사를 위해 증인이 되어 주려고 온 것뿐이었다. 황실의 추문까지 듣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황실의 추문을 한두 가지 들은 게 아니었다. 그들이 머릿수가 많지 않았더라면, 황제가 그들을 살려 보내지 않았을 거라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사람들은 잔뜩 굳은 얼굴로 떠나야 할지, 남아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다행히 황제도 그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여러 백부, 숙부와 국공께서는 수고가 많으셨소. 청희 장공주는 몸이 허약하니 당분간 황궁에서 휴양할 거요. 여러분은…….”
황제가 입을 열자마자, 사람들은 다급히 말했다.
“장공주의 병이 위중하여 폐하의 근심이 크십니다. 신들은 절대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