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두 달이 지났습니다
육장봉은 황제가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반걸음 비켜 주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존재감 없이 서 있던 영녕후 세자가 보였다.
“영녕후 세자 왔는가? 언제 들어왔느냐?”
황제는 영녕후 세자를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신,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신은 대장군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영녕후 세자는 앞으로 나서며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그의 시선에는 두려움이 한층 묻어 있었다.
‘육 대장군은 정말 무시무시하군.’
그의 뒤에 서 있는 동안, 육 대장군의 기세가 얼마나 강렬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알겠다.”
‘함께 들어왔다고? 왜 나는 못 봤지?’
황제는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결국 물어보지는 않았다
육장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장공주 마마께서 병이 위중하시니 곁에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세자께서는 평소에 장공주 마마를 보살피는 데 익숙하셨을 터이니, 일단 세자께서 장공주 마마를 보살피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제가 말했다.
“허락하노라.”
황제는 지금 육장봉의 일 처리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가 나서서 청희 장공주 옆의 사람을 처리하고, 황제를 위해 오명을 뒤집어써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육장봉의 말을 듣자,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허락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영녕후 세자는 진심으로 청희 장공주를 걱정하고 있었다. 황제의 말을 듣자, 두려움도 무릅쓰고 황제에게 읍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부랴부랴 병풍 뒤로 갔다.
손불사도 영녕후 세자를 따라서 병풍 뒤로 향했다.
청희 장공주는 창백한 얼굴로 기운 없이 평상에 누워 있다. 그 모습을 보자, 영녕후 세자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의 걸음도 더욱 빨라졌다.
영녕후 세자가 청희 장공주와 두어 걸음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손불사는 옆으로 늘어뜨린 손을 살짝 움직여 그의 종아리를 향해 빙침 하나를 날렸다.
영녕후 세자는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앗…….”
결국 영녕후 세자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청희 장공주의 몸 위로 넘어져 버렸다.
“앗!”
청희 장공주는 왜탑에 누워 두 눈을 살짝 감은 채, 대책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중이었다.
영녕후 세자가 갑자기 넘어질 때도 청희 장공주는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몸에 깔리자, 그 고통에 그녀는 입을 벌리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기회가 왔군.’
손불사는 손에 들고 있던 알약을 청희 장공주의 입안으로 튕겨 넣었다.
알약은 물을 만나면 바로 녹는 것으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을 마친 손불사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 일도 없었던 척했다.
“무슨 일이냐?”
황제는 어른을 공경하는 사람답게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켜 물었다.
“아, 아닙니다.”
영녕후 세자는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기어 일어나,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손불사가 병풍 밖으로 걸어 나가 황제에게 말했다.
“영녕후 세자께서 너무 서두르시다가 장공주 마마의 몸 위로 넘어지셨습니다. 큰일은 아닙니다.”
“영녕후 세자, 조심하게. 짐의 황고모가 그토록 연약한데 그렇게 짓누르면 쓰겠나.”
황제는 불쾌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영녕후 세자는 다급히 걸어 나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신이 꼭 조심하겠습니다. 절대 다시는 공주를 다치게 하지 않겠습니다.”
“음.”
황제는 대답하고 다시 앉았다.
“나리, 괜찮으세요?”
청희 장공주는 울먹이는 말투로 상냥하게 물었다. 암담하던 눈가에 물기가 일렁거렸다. 한없이 연약하고 불쌍해 보였다.
사실 그녀는 지금 화가 나서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영녕후 세자에게 깔리는 바람에 몸이 욱신거렸다.
하필 지금은 화를 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방금 무언가 입안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입을 다물을 때, 입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청희 장공주는 영녕후 세자의 침이 그녀의 입 안으로 튀었나 의심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영녕후 세자가 더욱 싫어졌다. 얼굴의 미소도 유지하기 힘들 것 같았다. 오늘따라 정말이지 뭐 하나 순조로운 게 없었다.
영녕후 세자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럽게 청희 장공주의 옆에 다가갔다. 그리고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공주, 나는 괜찮소. 공주는 괜찮소? 내가 방금 넘어지는 바람에 많이 아팠소? 어디가 불편하오? 어의더러 와서 보라고 하겠소.”
그 눈길과 말투는 마치 청희 장공주를 도자기 인형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그의 말투가 조금이라도 거칠었다가는 청희 장공주가 부서지기라도 할 것 같다는 투였다.
“나리,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저는…… 저는 괜찮아요.”
청희 장공주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가득 고였다. 마치 크나큰 서러움을 당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 입 밖에 내지 않고 홀로 묵묵히 감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서러움을 꾹 참는 듯한 모습이 영녕후 세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청희 장공주의 손을 꽉 움켜쥐고 말했다.
“공주, 두려워하지 마시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내가 있잖소! 내가 있는 한, 누구도 감히 당신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오.”
손불사는 그 장면을 보면서 눈꼴이 시었다. 두 사람이 채신머리없이 구는 모습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슬슬 약효가 나타날 때가 되자, 손불사가 입을 열었다.
“공주, 손을 내미십시오. 맥을 짚어 보겠습니다.”
청희 장공주는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고 순진하게 물었다.
“맥도 짚어야 하는가? 신의는 보기만 해도 내가 무슨 병인지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저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공주 마마께서는 정말 제가 말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손 신의는 청희 장공주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그는 청희 장공주가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했다. 특히 이 연약하고 천진난만한 분위기는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쉽게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속세를 벗어난 고인이었다. 고인이 어떻게 여색의 유혹에 넘어가겠는가.
“신의, 말해도 괜찮네. 난, 나는…… 무섭지 않네.”
청희 장공주는 말로는 무섭지 않다며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마치 크게 놀란 듯, 몸도 더 심하게 떨렸다.
이 모습을 본 영녕후 세자는 마음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그는 어린애를 달래듯 청희 장공주를 안고 등을 토닥거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공주, 무서워하지 마시오. 내가 있잖소. 내가 있소.”
속세를 벗어난 고인 손불사는 그들을 흘겨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잠재웠다. 그리고 영녕후 세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공주 마마의 부군이십니까?”
“그래요, 맞아요.”
청희 장공주는 수줍게 입을 열었다. 마치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손불사는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이들을 흘겨볼 뻔했다.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 몸의 본능을 억제하고 짜증을 참으며 말했다.
“장공주 마마께서는 세자께서 불임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알아요. 하지만 전 개의치 않아요.”
청희 장공주는 입술을 깨문 채로 영녕후 세자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나리와 평생 함께할 수만 있다면 전 만족해요.”
“무엄하다!”
하지만 영녕후 세자는 화가 났다. 이런 일을 사람들 앞에서 까발리다니, 너무 망신스러웠다.
손불사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병풍 밖의 사람들도 모두 들었다. 몇몇 친왕, 군왕, 국공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의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청희 장공주와 영녕후 세자가 혼인한 지도 이십여 년이 지났는데 줄곧 아이가 없는 걸 보면, 둘 중 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손불사의 다음 말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속세를 벗어난 고인 손 신의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냉소를 지었다.
“하지만 장공주 마마께서는 회임하신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이 일은 알고 계십니까?”
“엥?”
“뭐라고?”
‘청희 장공주가 회임한 지 두 달이 됐다고?’
‘애 아비가 누군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 눈을 반짝이며 흥분한 얼굴로 옆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세상이 뒤집힐 큰 추문이었다.
황제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라고? 회임? 두 달째라고?’
그중에서도 청희 장공주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그녀는 손불사에게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허튼소리다! 내가 만약 회임했다면 어의들이 어찌 모를 수 있겠느냐?”
“이 돌팔이 같으니라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어찌…… 공주가 어찌 회임하겠느냐? 의술을 알기는 하는 것이냐?”
영녕후 세자도 화가 나서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손불사는 싸늘하게 비꼬았다.
“제가 의술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그런데 세자비께서 간통했는지 안 했는지, 세자께서는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너…… 이 돌팔이! 죽여 버리겠어!”
영녕후 세자는 분노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손불사에게 달려들었다.
손불사는 일찌감치 대비하고 있었다. 미리 병풍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비꼬았다.
“장공주 마마, 어의가 왜 회임한 사실을 진찰해 내지 못했는지, 정녕 이유를 모르십니까? 은침으로 혈자리를 막아, 심장이 뛰는 속도를 늦추어 맥박도 허약하고 무력해지게 했지요. 그러니 어의라 한들 어찌 알아내겠습니까?”
“뭐라고?”
황제는 영녕후 세자가 불임인데 청희 장공주가 회임한 지 두 달이 되었다는 청천벽력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또 손불사의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손 신의, 방금 뭐라고 했느냐?”
청희 장공주는 넋이 나갔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손불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깊은 후회와 공포로 가득했다.
‘나는 이제 끝났구나! 아니, 아니야…… 그래, 아직 내게는 세자가 있어!’
이 손가 놈이 죽고 어의가 아무것도 진찰하지 못한다면, 그녀에게는 아직 살 기회가 있었다.
“나리, 전, 저는 이대로 못 삽니다. 저자가 이렇게 절 능멸하는데 저자가 살아 있다면…… 전 영원히 제 결백을 증명할 수 없어요. 나리, 저 신의라는 작자의 말은 절 죽으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청희 장공주는 슬픔을 금할 수 없다는 듯 통곡했다.
영녕후 세자는 원래부터 손불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공주는 옥처럼 순결하고 고결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녀가 어찌 다른 남자와 사통할 수 있겠는가.
이 순간, 청희 장공주의 말을 듣자, 영녕후 세자는 더욱 분노에 타올랐다. 손불사가 병풍 밖에 서 있는 것을 보자, 생각도 하지 않고 병풍을 넘어뜨리고 손불사를 덮쳤다.
“이 돌팔이 놈! 죽여 버리겠다!”
우당탕!
영녕후 세자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육중한 병풍이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다.
“으악!”
갑자기 벌어진 일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다.
바로 이때, 손불사는 병풍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발아래는 계단이었다. 도망치려 해도 이미 늦었다.
게다가 그는 나이도 많았다. 신체 반응이 젊은 사람을 쫓아가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는 잠깐 멍해졌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갈 때 너무 서두른 나머지 발을 삐끗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손불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속으로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저도 모르게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상상했다.
청희 장공주는 이 모습을 보자, 순간 눈앞이 환히 트이는 듯했다.
그녀는 이 손가 놈의 능력을 얕잡아 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손불사가 죽고 어의들이 진찰해 낼 수 없다면, 저놈의 말은 헛소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