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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37)화 (337/1,004)

337화 환자가 중요하지요

월령안 일행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손불사 일행도 곧 도착했다.

손불사는 황제의 특별 허락을 받아 마차를 타고 입궁했다. 월령안도 사양하지 않고 바로 손불사의 마차에 올라, 그와 함께 입궁했다.

육십과 육십일은 원래 관직이 있어 입궁할 자격이 있었다. 둘은 묵묵히 마차의 좌우에서 따라갔다.

황궁이라고 해서 바깥보다 안전하다는 법은 없었다.

마차가 멈추자, 황제의 측근인 이반반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그는 손불사와 월령안을 데리고 명화전(明和殿)으로 갔다.

명화전 안에는 이미 종친들과 태의원 사람들이 와 있었다.

손불사는 그 광경을 보고도 전혀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고인다운 풍모를 드러냈다. 하지만 속으로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는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또 너그러운 군왕이기도 했다. 이런 군왕을 둔 것은 백성들의 복이었다.

“손 신의, 이분은 염친왕(炎親王), 이분은 종친왕(宗親王), 이분은 장군왕, 이분은 이국공(理國公)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이반반은 손불사를 대단히 존중했다. 자리에 있는 종실의 친왕과 군왕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종친들의 소개를 마친 뒤, 서로 익숙해지라는 뜻에서 어의들도 소개해 주었다.

이반반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소개를 전부 마친 뒤 말을 이었다.

“청희 장공주 마마께서는 병풍 뒤에 계십니다. 장공주 마마의 옥체가 허약하셔서 바람을 맞으면 안 됩니다. 손 신의께서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환자가 중요하지요.”

손불사는 내내 엄숙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 한마디를 제외한 다른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덕분에 고인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월령안은 그의 옆에서 똑같이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손불사가 의원을 그만두고 무당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이처럼 신선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겁을 주면 대단히 잘 먹혔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 납시오!”

대전 밖에서 내관의 높고 뚜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있던 종실의 친왕, 군왕, 국공들이 일어나 황제를 맞이했다.

월령안도 그 사이에 끼어, 다른 이들과 같이 읍했다.

“예를 거두어라.”

황제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공식적인 장소를 제외하고 신하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게 하는 때는 매우 드물었다.

황제는 이반반의 옆에 서 있는, 백발이 성성한 손불사를 보더니 눈이 반짝였다.

“보아하니, 이분이 바로 손 신의겠구나?”

“폐하를 뵙습니다.”

손불사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올리는 셈이었다.

황제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네. 짐 또한 손 신의의 명성을 익히 들어 왔지. 오늘에야 손 신의를 만나게 되었구려.”

그 자리에 있던 친왕들과 군왕들은 일개 평민인 손불사가 그들을 보고도 고개만 끄덕였을 뿐,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리지 않자 속으로는 다소 불쾌해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손불사가 황제에게 예를 올릴 때조차 공손하지 않았고, 황제 또한 손불사를 크게 탓하지 않는 모습을 보자 언짢던 마음이 편해졌다. 손불사는 신분에 연연하지 않은 사람임을 확인한 탓이었다.

‘이 사람은 역시 속세에서 벗어난 고인(高人)이구나!’

손불사는 황제처럼 사근사근하지 않았다. 그저 황제를 힐끔 보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어렸을 때 한기에 노출되는 바람에, 날만 추워지면 무릎 관절이 편치 않으실 겁니다. 그렇지요?”

“신의구나!”

황제는 더없이 놀랐다.

“손 신의, 묻지도 않고, 맥도 짚지 않고 한 번 보았을 뿐인데 어떻게 짐의 불편함을 알았는가?”

“보고, 듣고, 묻고, 맥을 짚는 것 중에 기색을 살펴보는 것이 첫째입니다.”

손 신의는 거만한 태도로 설명하더니 덧붙였다.

“폐하께서는 최근 몇 년간 과로로 인하여 기력의 소모가 심하십니다. 종종 기력이 부족하고, 피로하시며, 잠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드실 텐데요. 어떻습니까?”

밤일에도 당연히 문제가 있을 테지만, 손불사는 말하지 않았다. 남자, 그것도 황제이니만큼 체면을 지켜 줘야 했다.

“그렇다네!”

황제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손불사를 바라보았다.

“손 신의가 치료할 수 있겠는가?”

이 증상들은 어의들도 모르고 있었다.

최근 이 년 동안 기력이 점점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어의를 부를 수는 없었다. 그가 몸이 불편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신하들이 이 기회를 틈타 정사에 적게 신경 쓰고 쉬라고 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그동안 억지로 버텨 왔다. 또 그럴듯하게 잘해 왔다. 지금까지도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손 신의는 그를 본 순간 바로 알아보았다. 그의 의술은 태의원 사람들의 의술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사소한 문제일 뿐입니다. 잠시 후, 제가 폐하께 처방을 하나 내어 드리겠습니다. 몇 첩만 드시면 호랑이 같은 기운을 회복하실 겁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일과 휴식을 적당히 조절하셔야 합니다. 시간이 나시면 오금희(五禽戱 – 다섯 가지 짐승의 자세를 흉내 내 만든 양생법)를 연습하십시오. 건강에 좋습니다.”

손불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진료를 이렇게도 할 수 있다고?’

손불사의 이 말에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특히 태의원의 어의들은 하나같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손불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들은 말을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폐하께서 과로로 기력이 부족하시다고?’

‘왜 우리는 전혀 몰랐지?’

‘이 신의는 정말 능력이 있는데.’

“손 신의의 말에 안심이 되는구나.”

황제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진짜 용건이 떠올랐다.

“손 신의, 이번에 자네를 부른 것은 짐의 고모인 청희 장공주를 진찰하기 위해서라네. 어의가 진찰한 바로는 청희 장공주는 심장의 기가 부족하고, 맥이 약하며, 오장육부의 정기가 쇠약하여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네. 손 신의가 장공주를 진찰해 주기를 바라네.”

청희 장공주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것은 어의 한 명이 아닌, 태의원 전체가 진찰해서 모두 똑같이 내린 결론이었다. 또한, 황제가 청희 장공주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고 특별히 후대해 주는 이유기도 했다. 어쨌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데, 곧 죽을 사람과 따질 필요가 없었다.

“네, 제가 지금 청희 장공주 마마를 진찰하겠습니다.”

손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제의 말속에 숨겨진 뜻을 알아챘다.

‘진찰을 하라는 거지 꼭 치료를 하라는 것은 아닐세.’

손불사는 이해했다.

사실 손불사는 청희 장공주의 병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청희 장공주가 진짜 아팠든지, 꾀병을 부리든지 상관없었다. 약왕이라는 그의 명성과 방금 그가 황제 앞에서 보인 그 재주가 있으니, 그가 내린 진단을 다들 그대로 믿을 것이다.

진찰이라면 그가 전문가였다. 그와 같은 신의가 한 진단을 누가 감히 의심하겠는가.

손불사는 침착하고 여유롭게 병풍 뒤로 걸어갔다. 고작 두어 걸음 뗐을 뿐인데, 병풍 뒤에서 구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 났어요. 장공주 마마께서 또 구토하십니다.”

장공주의 궁녀가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장공주는 괜찮으냐?”

“화영(畫映)아, 호들갑을 떨지 마라. 나는 괜찮단다.”

청희 장공주는 상냥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꾸짖었다. 그리고 병풍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청희 장공주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허약했다. 마치 언제든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장공주 마마…….”

궁녀 화영은 울먹거렸다. 청희 장공주 때문에 서글퍼하는 것 같았다.

“내 옷을 갈아입혀다오. 내가 실례했네. 손 신의, 잠시만 기다려 주게.”

청희 장공주의 목소리는 허약하고 무력했다. 하지만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듯했고, 절망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몇몇 나이 지긋한 친왕은 청희 장공주의 목소리를 듣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눈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예전의 활발하고 생기발랄한 소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그 소녀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손불사는 병풍 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옅은 조롱이 섞여 있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다니. 이 장공주는 참 재미있는 인물이군.’

병풍 뒤에 잠깐 소란이 일어났다. 궁녀가 청희 장공주를 부축해서 일으키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하지만 청희 장공주는 일어나다가 또 넘어졌다.

이때, 궁녀 화영이 울먹임이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공주께서는 많이 허약하십니다. 소인이 힘이 부족하니, 월 낭자께 공주를 돌보도록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화영아,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청희 장공주의 목소리는 더욱 가늘어졌다.

“그리해라!”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곧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월령안은 어디 있느냐?”

“소녀 여기 있습니다.”

월령안은 그제야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황제가 당도했을 때, 그녀는 묵묵히 귀퉁이로 물러났다. 그리고 황제의 기분을 거스를까 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황제는 병풍을 가리켰다.

“네가 가서…….”

바로 그때, 대전 밖에서 육장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신이 늦었습니다.”

육장봉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침착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목소리가 먼저 존재감을 나타냈다. 그 목소리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패기가 담겨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평상복 차림을 한 육장봉이 대전의 입구에 나타났다.

그의 표정은 날카로웠고 분위기는 남달랐다. 단지 거기에 서 있었을 뿐인데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기세를 감추고 있었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등장으로 빛을 잃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사람들의 이목은 전부 육장봉에게 쏠렸다. 누구도 그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월령안은 고개를 기울여 힐끔 보았을 뿐이다. 그녀는 아침의 예물 사건 때문에 육장봉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도 이 남자가 천지의 정기를 독차지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외모로나 재능으로나 모두 뛰어났다.

그가 나타나는 바람에 대전이 빛을 빼앗겨 어두워진 듯했다.

“장봉아, 네가 어찌 왔느냐?”

황제는 육장봉을 보고 기쁨을 드러내며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계…….”

그러다 대전 안에 다른 사람도 있는 게 떠올랐다. 그는 하려던 말을 중단하고, 딱 한마디만 물어보았다.

“괜찮으냐?”

“전부 괜찮습니다. 폐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육장봉은 대전 안으로 들어서며 황제에게 읍했다.

황제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되었다.”

“폐하, 신이 방금 대전 밖에서 궁녀가 장공주 마마의 시중을 들지 못하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인지요?”

육장봉의 기세는 날카로웠다. 그가 단지 한마디 물었을 뿐인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다.

황제는 조금 뒤로 물러앉으며 육장봉과 거리를 벌리고 대답했다.

“그랬지. 사실이다.”

육장봉의 말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폐하, 국고는 풍족하지 않습니다.”

육장봉이 침착하게 말했다.

“뭐라고?”

황제는 의아한 얼굴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의 화제 전환이 너무 빨랐다. 장공주의 궁녀에 관한 이야기가 왜 국고 이야기로 넘어갈까. 혹여 호부에서 추밀원에 자금을 더 주지 않아서 화가 났다 해도, 지금은 정사를 논할 상황이 아니었다.

“폐하, 주나라 황궁에는 쓸모없는 사람을 둘 여유가 없습니다. 장공주 마마의 시녀로서 장공주 마마의 시중도 제대로 들지 못하다니. 이런 자를 때려죽이지 않고 조상처럼 모시라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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