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황위는 원래 내 것이니까
무엇보다도 약왕 손불사는 일개 의원이라 해도, 의술이 대단히 뛰어났다. 과거 그가 의술을 베풀며 다닐 적에는 수많은 강호인을 구했다.
약왕곡에서 배출한 의원만 해도 오랫동안 강호에서 의술을 베풀었다. 그들은 모두 강호 여러 문파의 존중을 받았다.
그렇다 보니 손불사는 강호에서도 지위가 꽤 높았다. 만약 조정에서 나서서 청희 장공주를 진료하라고 했는데, 손불사가 승낙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가 거절한다면, 황제는 조정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손불사에게 타협하도록 강요해야 했다.
그때, 손불사가 죽어도 굴복하지 않는다면, 많은 강호인이 나서서 그를 보호할 것이 뻔했다.
황제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 강호인들은 필요하다면 조정과 적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손불사를 보호할 것이다.
조정과 강호의 관계는 원래 미묘했다. 황제는 늘 강호인들이 신하로서 조정에 복종하고, 쓰이기를 바랐다. 손불사 때문에 조정과 무림 사이의 알력을 심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 녀석은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대들다니. 내 아우라는 녀석이 참…….’
황제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넌 하루라도 월령안의 편을 들지 않으면 입에 가시라도 돋느냐?”
“황형, 그렇게 말씀하시면 재미가 없죠.”
조계안의 옷에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털면서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희 장공주는 손불사를 지명해서 진료하라고 했죠. 지금 손불사는 진료에 동의했습니다. 그저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을 부르라는 것이잖아요? 안 될 게 뭐가 있습니까? 왜, 청희 장공주가 남부끄러운 병에 걸렸답니까?”
“남부끄러운 게 무슨 상관이냐? 이것은 황실의 체면이 걸린 문제란 말이다! 손불사가 이런 요구를 제기한 건 짐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더냐!”
황제는 역정을 냈다.
“황형을 믿으라고요? 왜 황형을 믿어야 하는데요? 단지 황제라서?”
조계안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비꼬며 말했다.
“천하의 모든 백성은 황형이 그들에게 좋은 삶을 살게 해 줄 거라고 믿었어요. 전쟁과 굶주림이 없는 삶을요. 하지만 결과는요? 황형은 그들의 신뢰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조계안! 선을 넘지 마라!”
황제는 두 눈을 붉혔다. 그의 이마의 핏줄이 튀어나왔다. 그는 옆에 늘어뜨린 손을 움켜쥐고 두 눈을 부릅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게 분명했다.
조계안은 웃으며 말했다.
“바른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입니다. 황형은 명군이잖아요. 당연히 듣기 좋은 말만 들을 수는 없어요. 바른말을 들어야죠. 이건 황형이 직접 한 말이잖아요?”
“당장…… 썩 물러가거라!”
황제는 화가 나서 탁자 위의 옥 문진을 집더니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조계안에게 던졌다.
퍽!
문진이 조계안의 이마에 부딪혀 큰 소리가 났다. 선혈이 가면을 타고 줄줄 흘렀다.
조계안은 고개를 들고 차갑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더없이 싸늘해 온정이라고는 없었다.
“계안아!”
황제는 당황해서 갈팡질팡하며 말했다.
“계안아, 지, 짐은 정말로 널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짐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황제는 화가 나서 문진을 내던지던 순간 아차 싶었다.
그는 조계안이 피할 줄 알았다.
“폐하의 분노와 은혜는 모두 성은이지요.”
조계안은 황제를 차갑게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황형, 제가 무례했습니다.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돌아서서 떠나갔다.
“계안아……!”
황제는 조급해져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 나갔다. 하지만 조계안은 난각을 나서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졌다.
“계안아! 돌아오너라!”
황제가 쫓아 나갔을 때는 청색 두루마기의 옷깃만 보였다. 그가 어떻게 소리를 지르든 그 옷깃의 주인은 조금도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는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이반반이 제때 나서서 부축했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반반, 짐이 잘못한 것이냐?”
황제는 일어서서 옆에 서 있는 이반반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막연함이 가득했다.
이반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꿋꿋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잘못이 없습니다.”
황제는 잘못을 하지 않는다.
황제는 단지 고조 황제의 영향을 너무 깊게 받아 좋은 황제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좋은 황제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조정 신하들이 말하는 좋은 황제에 맞춰야 하나? 아니면 백성들이 말하는 좋은 황제에 맞춰야 하나?
황제는 두 눈을 감고 무기력하게 말했다.
“계안이는, 그…… 아직은 공무를 처리해야 하니, 이번에는 밀실로 숨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육장봉을 찾아갔을 거다. 너는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거라. 그리고 설옥고, 됐다……. 궁의 설옥고는 육씨 가문에서 진상한 거였지. 장봉이에게 설옥고가 부족하지는 않을 거다. 네가 직접 계안이의 옷을 챙겨서 장군부로 가져가거라.”
황제의 눈에는 깊은 후회뿐이었다.
‘내가 그깟 청희 장공주 일 때문에 계안과 다투다니.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네, 폐하.”
이반반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물러가려는 순간, 내관 하나가 눈치도 없이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폐하, 청희 장공주 마마께서 급한 일로…….”
“썩 물러가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는 발을 들어 그를 차 버렸다.
“아이고……!”
내관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졌다. 그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황제는 노기 띤 얼굴로 엄하게 말했다.
“끌어내라! 앞으로 누구든 감히 제멋대로 청희 장공주의 말을 전한다면 모두 쳐 죽일 것이다!”
“네, 폐하.”
이 말을 들은 이반반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황제와 함께 청희 장공주를 열 번 이상 만났다.
청희 장공주는 매일 온갖 이유를 내세워 황제에게 자신을 보러 오게 했다. 그리고 매번 황제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말을 했다.
심지어 어제는 대장공주로 책봉해 달라는 이야기까지 꺼냈다.
이반반은 황제의 얼굴에서 죄책감을 읽었다. 이러다 청희 장공주에게 설득당해 그녀를 대장공주로 책봉할까 걱정이 되었다.
황제가 일단 명령만 내린다면 밖에서는 청희 장공주가 황제의 신임을 얻었고, 황제가 고모를 중시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조계안이 제때 입궁한 덕분에, 황제는 더는 청희 장공주를 상대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황제가 불만이 생긴 이상, 이반반도 손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아랫것들을 단속할 수 있었다. 이 며칠 동안 황제가 청희 장공주를 우대한 덕분에, 아랫것들이 그녀의 편을 들고 있어 잔뜩 벼르던 참이었다.
이반반은 황제를 부축하며, 시선을 내리깔고 눈 속의 한기를 감췄다.
월령안이 보고하자마자 조왕 전하가 난각에 나타났다. 그리고 청희 장공주가 사람을 보내 황제를 불렀다.
그는 이것이 전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청희 장공주 마마께서도 선을 넘으셨군!’
이반반은 황제를 부축하여 천천히 돌아갔다.
* * *
이 무렵, 경안궁.
청희 장공주는 오래도록 기다렸지만, 황제는 오지 않았다. 또 내관도 보고하러 오지 않자,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희 장공주는 눈을 감고 말했다.
“난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봐라. 조왕이 폐하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야겠다.”
“네, 장공주 마마.”
궁녀가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대답하고 물러갔다.
이각이 지났을 무렵, 궁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청희 장공주의 옆에 서서 허리를 숙이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장공주 마마, 조왕 전하께서…….”
“알았다. 나가 보아라.”
청희 장공주는 말을 듣고도 담담한 기색을 띠었다. 말투도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웠다.
궁녀는 움츠러든 채 묵묵히 물러갔다.
“조계안!”
청희 장공주는 붉은 입술로 중얼거리며 가볍게 웃었다.
황제가 오지 않을 것을 알자, 청희 장공주는 더는 침대에 누워 아픈 척하지 않았다. 맨발로 일어나더니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그윽한 눈빛으로 먼 곳을 내다보았다. 황제의 난각이 있는 방향이었다.
한참 후, 청희 장공주는 시선을 거두었다. 문득 창턱에 활짝 핀 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꽃줄기를 꺾더니 꽃잎을 사정없이 짓이겼다. 선혈처럼 눈을 찌를 듯한 붉은 액체가 그녀의 하얀 손을 물들였다.
청희 장공주는 고개를 숙이고 그 광경을 힐끔 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나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야!”
‘황위는 원래 내 것이니까!’
* * *
조계안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육장봉의 서재에 나타났다.
육장봉은 눈을 들어 그를 힐끗 보더니, 손에 든 일거리를 내려놓았다.
“폐하와 싸웠나?”
‘폐하가 조계안에게 손을 쓸 정도라니. 조계안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길래?’
조계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도 하지 않았다.
“청희 장공주, 그 여자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너도 그 여자를 조심해. 고작 며칠이 지났는데 황형이 저도 모르게 그 여자에게 마음을 쓰고 있더라. 정말 대단한 수완이야.”
육장봉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름답고 연약한 여인은 항상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지. 폐하도 남자야.”
조계안은 멸시하면서 비꼬았다.
“독사 같은 여인도 보호할 가치가 있나? 황형은 최근 몇 년간 조정 신하들이 떠받들기만 하는 바람에 정신을 못 차렸어. 자기가 정말로 세상에 다시없는 명군인 줄 안다니까.”
육장봉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는 조계안이 황제를 헐뜯는 소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친형제라, 싸워 봤자 칼로 물 베기였다.
조계안이 겉으로는 성질이 나빠 보여도, 사실 마음이 가장 여렸다. 황제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달랜다면 조계안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길 것이다.
“월령안이 입궁해서 손불사가 청희 장공주를 진료할 걸 승낙했다고 했어. 하지만 손불사는 청희 장공주의 병 때문에 무슨 은밀한 일에 연루될까 걱정이 되어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을 붙여 달랬거든.
그것 때문에 황형이 기분이 나쁘다고, 난각에서 펄펄 뛰고 난리도 아니었어. 청희 장공주가 못된 짓을 하는 건 탓하지 않고, 손불사가 오만한 것도 탓하지 않으면서, 월령안만 무능하다고 탓하잖아. 너도 우습지 않아?”
육장봉이 우습게 여기는지 어떤지는 조계안도 몰랐다. 하지만 육장봉이 웃는다면 우는 것보다 훨씬 꼴사나울 것이다.
육장봉은 그를 바라보며 쌀쌀하게 말했다.
“그분은 황제다.”
황제는 아무나 탓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조계안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황제라도 이치에 맞게 행동해야지.”
육장봉은 가볍게 웃으며 비꼬았다.
“누가 감히 폐하와 이치를 따질 수 있겠어?”
조계안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이어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누가 감히 황제와 이치를 따지겠어? 난 자꾸 그분이 황제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뭐야. 내 황형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말이야.”
육장봉이 말했다.
“뭐든 적당히 해라. 너도 너무 오지랖 부리지 마.”
육장봉이 볼 때, 황제는 제왕으로서든, 형님으로서든 조계안에게 충분히 잘해 주었다.
조계안은 화가 나 이를 악물었다.
“넌 도대체 누구 편이야?”
육장봉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원래 누구의 편도 아니다.”
조계안은 원래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 했다.
하지만 그의 이마의 상처를 보니,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짐작이 갔다.
조계안은 황제를 질책하는 말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항상 유순하고 동생을 아끼는 황제가 손을 댔을 리가 없었다.
“너…… 됐어. 너하고는 말하기 싫어.”
조계안도 생각을 해 보더니 자신이 확실히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떳떳했던 그였지만, 순간 자신감이 조금 사라졌다.
하지만 육장봉 앞에서는 자신이 지나쳤음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