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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32)화 (332/1,004)

332화 감히 조정에 조건을 내걸다니

그때 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꼿꼿하게 서 있던 육십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월 낭자께서 그들을 감싸 주신다면, 분명 무사할 겁니다.”

육십일은 일부러 ‘분명’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 안에 담긴 뜻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가 왜 감싸 줘야 하죠?”

월령안은 의미심장하게 육십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상벌 기준이 분명한 것은 좋은 원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육장봉 옆에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은 줄은 몰랐네. 과묵한 육십일이 육십보다 훨씬 총명하군. 자기네 장군 편을 들 줄도 알고.’

하지만 그녀는 순순히 당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월 낭자의 말씀이 맞습니다.”

육십일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전히 조용히 옆에 선 채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월령안이 말했다.

“육십일은 꼭 당신네 장군의 중용을 받겠네요.”

육장봉의 이 몇몇 수하는 정말 하나하나가 총명하고 살뜰했다.

과거 육장봉이 정실로 맞아들인 월령안을 무시했을 때, 그의 열두 친위대 모두가 그녀를 낯선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경계하고, 그녀를 웃음거리로 삼았다.

지금 그녀는 육씨 가문과 전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열두 친위대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바로 태도를 바꿨다. 예전에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그녀를 반쯤 주인처럼 모셨다.

그들은 육장봉이 좋아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면 싫어했다.

솔직히 말해, 육장봉에게 이런 수하들이 있는 게 아주 부러웠다. 문득, 그녀는 추수와 상천이 그리워졌다.

‘그들 둘은 북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야율제는 죽었다. 철광산의 일도 마무리를 지었다. 슬슬 그 두 사람도 돌아올 때가 되었다.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살집이 있는 내시 총관이 금군과 함께 걸어 나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 사람이 황제의 측근인 내시 총관 이반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월령안은 다급히 정신을 차리고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이반반은 황제의 심복이었다. 그는 상대가 소 승상, 장 부승상이라고 하더라도 억지로 웃는 낯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신분이 낮은 월령안 앞에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반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

“월 가주, 손 신의가 오셨소?”

“소녀가 이 총관을 뵙습니다. 소녀는 사죄하러 온 것입니다. 손 신의를 모셔오지 못했습니다.”

월령안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반반이 그녀를 웃으며 맞은 것은 육장봉 때문이 확실했다.

“모셔오지 못했다고?”

이반반은 웃음을 거두고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월령안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손 신의는 사람마다 칭송하는 신의지요. 저도 돈을 내서 집으로 모셔와 진료했을 뿐입니다. 그분이 누구를 진료하는지는 제가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총관께서 양해해 주세요. 저도 도저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상대가 황제였기 망정이다. 다른 사람이 부탁했더라면 그녀는 실컷 비웃어 줬을 것이다.

‘뭐야, 손불사를 모셔서 진료를 받고 싶으면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그녀도 환자의 가족일 뿐이다. 손불사가 누구를 진료할지 말지, 그녀가 결정할 수는 없었다.

‘자기가 손불사를 모시지 못하면서 왜 내 탓을 하지?’

“그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소. 내가 궁금한 건 딱 하나요. 월 가주, 이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반반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이 총관, 소녀는 무능합니다.”

월령안은 깔끔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한마디 덧붙였다.

“손 신의는 폐하께서 청희 장공주 마마의 진료를 맡기고 싶으시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거절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반반 얼굴이 살짝 풀렸다. 마음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월령안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모르지만,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조왕 전하뿐만 아니라 육 대장군도 이 월 가주를 특별하게 대했다.

황제야 월령안을 얼마든지 싫어할 수 있었다. 월령안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가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그녀를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육 대장군에게 밉보이는 것은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조왕 전하에게 밉보였다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월령안이 울상을 하며 말했다.

“이 총관, 총관께서도 손 신의의 아들이 왜 죽었는지 아시지요? 그 탓에 손 신의는 간이 작고 누구한테 밉보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분은 아들이 죽고 난 뒤, 대갓집의 진료는 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세웠습니다. 이 규칙은 무려 이십여 년이나 이어졌지요.

지금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손 신의의 규칙은 자연스럽게 폐지될 겁니다. 그러나 손 신의는 간이 작아 감히 사적으로는 청희 장공주 마마를 진료하지 못할 겁니다.”

“무슨 뜻인가?”

월령안의 말은 이반반의 귀에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간이 작아 대갓집의 진료를 하지 않는다. 황제의 명령이 있으면 규칙은 폐지해야 한다. 약왕은 그래도 경우가 바른 사람이군. 자기의 의술이 고명하다고 안하무인이지는 않구먼.’

“손 신의는 청희 장공주 마마를 진료할 때, 종실 사람이나 다른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합니다. 자신의 치료 과정에 증인이 되어줄 수 있게 말입니다.”

월령안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을 마치고 또 다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손 신의가 청희 장공주 마마를 믿지 못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총관께서도 아시다시피 청희 장공주 마마의 병은 여러 어의도 속수무책이지 않습니까. 분명 매우 까다로운 병이겠지요. 손 신의도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단지 옛일이 재연될까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손 신의를 위해 증인이 되어 줄 만한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월령안은 최대한 완곡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반반은 여전히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한낱 평민이 감히 조정에 조건을 내걸다니. 무엄하네!”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이 총관, 약왕은 제 하인이 아닙니다. 전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는 두 손을 이반반 앞으로 내밀었다.

“아니면 이 총관, 저를 가두라고 하세요. 전 정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저 같은 일개 상인 집안 여인은 지위도 낮습니다. 소녀는 정말로 약왕을 부릴 재간이 없습니다.”

진료를 받으려면 손불사의 조건을 허락해야 한다.

진료를 받지 않으려면 그녀를 가두면 된다.

월령안은 자칭 명군이라는 황제가 그녀처럼 무고한 사람의 죄를 어떻게 다스리는지 볼 셈이었다.

황제가 이번 일로 죄를 뒤집어씌워 그녀를 가둔다면, 온 변경 사람들에게 소문을 낼 것이다. 황제가 얼마나 무능하길래 자기가 손불사를 어쩌지도 못하고 무고한 환자 가족에게 화풀이하는지 말이다.

그때가 되면 누가 더 곤란해지고, 망신을 당하게 될지 알게 되리라.

월령안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반반도 당연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는 황제가 아니었다. 월령안도 황실의 노복(老僕)이니 역대 월씨 가주처럼 황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월령안, 이 사람은 선천적인 반골(反骨)이군.’

그는 뚫어지게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짢다는 듯 대답했다.

“이 일은 내가 폐하께 보고하고 다시 상의하는 거로 하세.”

그로서는 월령안을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생각해 보니 육 대장군과 조왕 전하가 있는 한, 황제도 월령안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 총관께 폐를 끼쳤네요.”

월령안은 읍하며 예를 올렸다. 또 미안해하며 불안한 표정도 지었다. 그 표정이든 행동이든, 전혀 잘못된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이반반은 코웃음을 치고 돌아서서 떠나갔다.

‘폐하께서 주신 기한의 마지막 날에야 와서 보고하다니. 월령안은 지금 도발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잘못을 꼬집을 수도 없고. 이 일은 원래 폐하께서……. 됐어, 폐하께서 잘못하실 리가 없어. 단지 폐하께서 불쾌해하실까 걱정이로군.’

이반반은 어두운 얼굴로 난각으로 돌아가 보고했다. 또 월령안의 말을 잘 다듬어 최대한 완곡하게 전달했다.

하지만 황제는 말을 듣고 여전히 불같이 화를 냈다.

“월령안, 간이 부었구나! 감히 짐에게 조건을 흥정한다는 말이냐?”

“왜 황형에게 조건을 흥정할 수 없는데요? 황형이 능력이 되면 직접 가셔서 손불사를 데리고 오시면 되잖아요? 왜 월령안이 가서 데려와야 하는 건가요?

월령안이 황형이랑 무슨 사이길래요? 또 손불사랑은 무슨 사이인데요? 황형이 손불사를 찾아 청희 장공주의 진료를 받게 하고 싶은 거면서 월령안을 핍박하다니. 황형, 염치가 있어요?”

황제는 욕을 한마디 했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난각 밖에서 조계안이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이 시간에 어떻게 돌아온 것이냐?”

황제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합니다, 황형. 이 아우가 때를 잘못 맞춰 왔군요. 제 실수로 황형의 염치없는 모습을 보고 말았네요.”

조계안은 난각 안으로 걸어 들어온 뒤, 황제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거만하게 앉았다. 그는 황제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비꼬듯 말했다.

“황형, 계속, 계속 욕을 하시죠. 이 아우는 한 나라 황제가 과연 어디까지 염치없이 구는지 구경하고 싶거든요.”

“조계안!”

황제는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허!”

조계안은 비웃고 황제를 흘겨보았다.

“제 발이 저리니까 화를 내는 겁니까? 그럼 사람을 죽여 입을 막을 건가요? 먼저 이반반을 죽이고, 그다음에는 이 아우를 죽이시려나요?”

옆에서 듣던 이반반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너는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

황제는 화가 치밀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계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음울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어엿한 제왕이 약왕을 데려오지 못하자, 어린 상인을 협박하는 것을 저는 미처 몰랐네요. 황형, 만약 이 일이 소문이 난다면 황형의 체면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황제가 말했다.

“짐이 언제 월령안을 협박했느냐? 약왕은 월령안이 데려왔으니, 짐은 단지 월령안에게 약왕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황제도 월령안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계안은 황제의 말이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약왕의 규칙은 예전부터 정해져 있는 건데요. 황형께서 대놓고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도 황형이 이토록 염치없을 줄은 몰랐다.

‘이건 전부 청희 장공주, 그 고약한 여자 때문이야! 그 여자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성을 간다!’

“규칙이라고 할 게 뭐가 있느냐? 월령안이 약왕에게 정씨 가문의 여식을 진료하게 한 것은 규칙에 어긋나지 않고, 입궁하여 청희 장공주를 진료하게 하는 것은 규칙을 어기는 것이란 말이냐?”

황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계안은 화가 나서 실소했다.

“그렇다면 황형이 직접 약왕에게 입궁하라고 명령을 내려서 청희 장공주를 진료하게 하면 될 게 아닙니까? 왜 꼭 월령안을 찾으셔야 하는데요?”

“짐은…….”

황제는 입을 뻐끔거렸지만,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차마 약왕이 자신의 체면을 봐주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너그럽고, 현인을 우대하는 제왕이라면 이깟 일로는 약왕의 죄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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