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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30)화 (330/1,004)

330화 제가 할아버지를 오해했어요

장 부승상은 역시 장 부승상이었다. 한순간에 바로 평소대로 돌아왔다.

“서, 성은이 망극합니다.”

물론, 황제의 말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장소원이 낙원에서 정절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밖에서 추태를 부리지 않았으니 가문의 다른 여식들의 평판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장씨 가문의 명성을 더욱 높여 줄 수도 있었다.

장 부승상은 마음속으로 장소원의 일을 어떻게 이용해 이익을 최대치로 끌어올릴지 단숨에 계산을 마쳤다.

하지만 얼굴에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슬픈 표정을 유지했다.

황제는 장 부승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니 그래도 동정이 갔다. 좋은 말로 위로해 주고, 두어 걸음 배웅도 해 주었다.

장 부승상은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에서는 슬프고 처량한 기운을 풍겼다.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장 부승상이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황궁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그가 수심에 잠긴 모습을 목격했다. 비록 무슨 일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사사로이 이야기를 나눌 때는 다들 장 부승상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장 부승상의 수심에 찬 어두운 표정은 그가 마차에 오르기 전까지만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장 부승상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저택으로 돌아가자.”

“네.”

장씨 가문의 마부는 손을 떨더니, 재빨리 마차를 몰아 장씨 저택으로 돌아갔다.

마차는 장씨 저택 앞뜰까지 들어갔다. 장 부승상은 마차에서 바로 내리지 않고, 마차 문을 사이에 두고 마부에게 일렀다.

“얼른 낙원에 사람을 보내 원 아가씨를 모셔와라. 장씨 가문에는 순결한 아가씨들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알겠느냐?”

“소인, 알겠습니다!”

마부는 대답하자마자 마차에서 뛰어내려, 곧장 빠른 걸음으로 떠나갔다.

장 부승상도 마차에서 내리더니 하인들을 물렸다. 그리고 홀로 서재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노쇠한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침착했다.

그는 엄격한 목소리로 하인에게 말했다.

“월 삼낭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거라. 찾거든, 당장 묶어서 형부에 보내라.”

월 삼낭은 황제가 원하는 사람이었다. 장 부승상은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건드릴 수가 없었다.

“나리, 월 삼낭과 원 아가씨는 외출하셨는데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서재 안의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오지 않았다고? 허……. 원숭이였던 내가 오늘은 나무에서 떨어졌구나.”

장 부승상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는 월 삼낭이 작정하고 도망쳤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로서는 그녀를 찾지 못할 것이다.

“역시, 나도 이젠 늙었군.”

‘어린 계집애 하나가 감히 내 머리 꼭대기서 놀려고 드는구나. 심지어 내 손녀딸도 지킬 수가 없다니.’

장 부승상은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댔다. 대단히 지친 얼굴이었다.

“나리…….”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이 걱정스러운 듯 불렀다.

장 부승상은 손을 내젓고 눈을 떴다. 그리고 평온한 기색으로 말했다.

“다섯째를 불러오너라. 그리고 부인에게 전해라. 원아가 죽었는데, 만족하냐고.”

“네, 나리.”

장씨 가문의 하인은 순간 멍해졌지만, 속으로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밖을 나갔다. 장 부승상의 부인은 설씨 가문 출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씨 가문의 오공자가 서재에 나타났다.

“할아버지.”

제멋대로 구는 다섯째였지만, 장 부승상 앞에서는 공손한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 공손함에는 분노가 숨어 있었다.

장 오공자는 마음속으로 탐탁지 않아 하고 있었다.

장 부승상 같은 늙은 여우가 다섯째 손자의 반항심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단지 모른 척할 뿐이었다. 그는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키고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다섯째 왔느냐? 앉거라.”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장 오공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다섯째야, 이 할아비는 괜찮단다.”

장 부승상은 늙은 티가 났다. 하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다섯째는 역시나 효성이 지극한 아이군. 아주 좋아!’

장 오공자는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장 부승상의 자애롭고도 단호한 눈과 마주하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았다.

장 부승상은 장 오공자를 보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섯째가 눈 깜짝할 새에 어른이 되었구나. 어렸을 때 너는 말이다, 모든 형제 중에서 가장 총명했단다. 또 간도 제일 컸었지. 네 형들과 동생들은 평소에 나를 만나면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찍소리도 내지 못했단다. 도망가지 못해 안달이었지. 오직 너만이 매일 이 할아비 서재로 기어들어 왔단다. 내 붓을 뽑아내 책에 낙서하는 건 물론이고 책상 아래 숨어서 할아비를 놀라게 하려고 했지.”

장 부승상은 다섯째를 자애롭게 바라보았다. 여느 노인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옛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한번은 네가 내 책상 아래에서 잠이 들었어. 그때 집안사람들 모두 너를 몇 시진이나 찾았단다. 그래도 너를 찾지 못하자 네가 길을 잃은 줄 알고 급히 밖으로 나가서 찾았지. 나중에야 생각이 나더구나. 네가 어쩌면 서재에 숨어들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할아비는 아직도 기억한단다. 그때는 겨울이었는데, 서재에는 화로도 없고, 창문이 열려 있었어. 그런데 이 개구쟁이는 무슨 생각인지 홑옷 바람으로 책상 아래서 몇 시진이나 있었던 거야. 내가 널 안았을 때는 온몸이 얼음장 같았지. 의원은 네가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했어.

콩알만 한 녀석이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그 울음소리가 새끼 고양이보다 더 작았지. 할아비는 마음이 너무 아팠단다. 내 목숨으로 바꿔서라도 널 살리고, 네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지. 다행히, 하늘도 무심하지 않아, 우리 다섯째를 데려가지는 않으셨구나.”

장 오공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장 부승상의 얼굴에는 그리움의 미소가 번졌다.

장 오공자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할아버지…….”

“모두 다 지나간 이야기야. 이제 다섯째는 다 자랐지. 군자답게 바르고 정직하게 자라서 이 할아비도 무척이나 기쁘단다.”

장 부승상은 다섯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다 갑자기 한숨을 내쉬면서 무기력하게 말했다.

“다섯째야, 네가 외사촌 형의 일로 이 할아비를 원망하는 걸 알고 있다. 또 네 마음속에서 이 할애비는 양심이 없는 냉혈한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얘야……. 넌 이 할아비의 어려운 점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다섯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는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씨 가문은 할머니의 친정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친정이기도 했다. 설씨 가문은 그의 외삼촌 댁이었다.

‘외삼촌에게 자식이라고는 외사촌 형 하나뿐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어떻게…….’

장 부승상은 장 오공자의 소리 없는 반항을 뜻밖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섯째야, 넌 네 외사촌 형을 안타깝게 여기지. 하지만 넌 네 누님과 누이동생, 그리고 시집간 고모들을 생각해 보았느냐? 만약 원아의 일이 소문 난다면, 다른 여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느냐?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 생각해 보았느냐?”

“하, 하지만…….”

다섯째는 멍해졌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장 부승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각을 못 해 봤겠지? 또는 생각은 해 봤지만, 현실을 마주하기 싫었던 거로구나.”

“그럼 외삼촌 댁을 도와주실 수는 없나요? 그리고 제 어머니……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언짢아하실까 봐 울지도 못해요. 몰래 눈물만 닦는다고요.”

다섯째는 울먹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모두 설씨 가문 사람이었다. 설씨 가문과 장씨 가문이 그토록 친밀한 관계인데도 할아버지가 왜 이토록 매정한지 알 수 없었다.

장 부승상은 소리 없이 오열하는 다섯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기특함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손자가 감정을 중요시하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장씨 가문의 후계자라면 감정만 중요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잘 가르치면 된다.’

장 부승상은 통곡하는 다섯째를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다섯째야, 나도 네가 외삼촌을 돕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단다. 나라고 안 그러고 싶었겠느냐? 하지만 다섯째야, 잊지 마라. 네 가족은 외삼촌만 있는 것이 아니란다. 네 삼촌과 큰아버지도 있단다.

장씨 가문에 딸린 식솔이 수만 명이야. 나더러 어떻게 도우라는 거냐? 설씨 가문이라는 그 배는 이미 뒤집혔다. 내가 가족들을 데리고 배에서 내리지 않는다면, 너, 네 아버지, 누이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조카들까지 죽게 될 판이다.

다섯째야, 네가 만약 이 할아비라면 어떻게 했을 거냐?”

장 부승상의 질문은 그의 눈빛처럼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모든 장애물을 뚫고, 장 오공자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장 오공자는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마치기 전에 장 부승상은 또 한마디 덧붙였다.

“다섯째야, 원아가 죽었단다.”

장 오공자는 그 자리에서 넋이 나갔다. 순간, 동공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장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이 장소원을 낙원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녀를 데리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겉모습은 비참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심지어 발버둥 칠 힘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장씨 저택에 도착한 것은 더없이 끔찍한 꼴을 한 시체 한 구뿐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장 부승상은 장 오공자를 데리고 장소원을 보러 갔다.

장 오공자는 장소원의 다친 얼굴과 몸의 상처를 보면서 믿을 수 없는 듯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의 큰 누이동생, 그 교만하기 짝이 없던 귀족 아가씨가 어떻게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외사촌 오라버니의 부고를 받았을 때조차, 그녀는 눈시울만 붉혔을 뿐이었다.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부리지 않았다.

“다섯째야, 봐라…… 네 큰 누이동생이 다른 사람의 흉계에 걸려들어 최음제에 중독됐다. 그런데 이 할아비가 무능해서 복수하기는커녕, 다른 아이들의 명성 때문에 원아가 죽어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얘야, 네 마음속에서 이 할아비가 냉혈한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 할아비는 장씨의 족장(族長)이자 장씨 가문의 가장이다. 도저히 내 마음 가는 대로는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사람이 아닌, 전체 가문을 염두에 두는 것이란다.

다섯째야, 이 할아비도 원아만 생각하면 가슴 아프단다. 원아도 너와 마찬가지로 모두 내 손주야. 내 목숨으로 네 목숨을 바꾸고 싶었던 것처럼, 지금도 내 목숨으로 원아를 살리고 싶단다. 하지만 내 목숨과 원아의 목숨을 바꾸지는 못해. 불쌍한 우리 원아를 살릴 수가 없구나.”

장 부승상은 마지막에 가서는 흐느끼느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섯째야, 이 할아비는 늙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손녀 하나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 알겠느냐?”

“할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장 오공자는 서글프게 침통해 하는 장 부승상을 바라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장 부승상에게 머리를 계속 조아렸다.

“할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할아버지를 오해했어요…….”

“얘야, 절하지 말아라, 하지 마.”

장 부승상은 떨리는 손을 뻗어 힘겹게 그를 일으켜 세웠다.

“할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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