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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29)화 (329/1,004)

329화 나 육장봉이 수호하겠소

월령안은 하는 수 없이 저항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무기력하게 육장봉의 품에 안긴 채, 낮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저 이렇게 있는 게 너무 힘들어요. 대장군, 제가 일어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월령안은 육장봉의 품에 엎드려 있었다. 두 손은 육장봉의 가슴팍에 대고, 무릎은 육장봉의 무릎과 맞대고 있었다. 이 자세는 아주 이상하고 불편했다. 육장봉이 지탱해 주고 있었지만, 월령안도 힘이 들었다.

월령안은 다시 부탁하기는 했지만,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 남자가 얼마나 악랄한지는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육장봉은 바로 알았다고 했다. 점잖게 손을 풀더니, 월령안을 부축하는 등 대단히 협조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사람이 육장봉이 맞는지 대단히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월령안이 놀란 얼굴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 멍한 얼굴에서, 육장봉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지금 당신의 몸이 허약하니…… 지치게 하면 안 되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월령안을 쉽게 놔주지 않았을 것이다.

월령안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대장군의 배려에 감사라도 드려야 하나요?”

‘그래, 이래야 악랄하기 그지없는 육장봉이지.’

“별말씀을.”

육장봉은 염치가 무언지도 모르는 듯 가볍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넙죽 받았다. 그리고 일어나서 그릇을 옆의 작은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면서도 월령안에게 부드럽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침대로 올라가시오. 무리하지 말고.”

‘역시 어린 아가씨라서 조금만 놀려도 발끈하는군.’

육장봉의 수작에 시달린 월령안은 화를 낼 기운조차 남지 않았다.

그녀는 육장봉의 말대로 침대에 눕기는커녕 일어서서 육장봉에게 읍했다.

“낮의 일은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대장군께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대장군께서 시키실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반드시 두말하지 않고 따르겠습니다.”

육장봉이 어떻게 생각하든 월령안은 그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 주변에는 부릴 사람이 넘쳐나오. 당신 하나 없다고 해도 부족하지는 않소.”

육장봉은 월령안의 앞에 서 있었다. 불빛 아래서 파리하고 가냘프지만, 더없이 강인한 여인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건가? 아까는 내 품에 안겨 연약하고 나긋나긋하게 굴더니. 왜 일어나서는 다시 냉정하게 대하지?’

육장봉은 마음속에서 울화가 치솟았다. 낮에 벌어졌던 일을 떠올리자,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위험에 빠졌는데 왜 내가 준 호각을 쓰지 않았소?”

그는 온종일 이 문제를 고민했다.

‘위험에 빠졌을 때 말을 타고 날 찾아올 줄은 알면서도 내가 준 호각은 쓰지 않다니. 월령안은 도대체 나를 믿는 건가, 믿지 않는 건가?’

이 아가씨는 나이도 어린데 그의 기분을 온종일 들쑥날쑥,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육장봉이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십 년 전, 북요에 어머니를 만나러 갔을 때 딱 이렇게 불안하고 조마조마했었다.

그러나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충분히 강해졌다.

지금은 어머니를 만나더라도 평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그가 그답지 않게 행동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는 그를 대단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육장봉은 촛불 아래에 서 있었다. 그가 한쪽에 서 있는 것만으로, 미약한 불빛이 커다란 몸집에 전부 가로막혔다.

월령안이 고개를 들고 어둠 속에 서 있는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나운 시선에 겁이 더럭 났다.

월령안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또 적당한 이유도 둘러댈 수 없었다. 그저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깜빡했어요.”

월령안은 늘 혼자 스스로를 지켜왔다. 그 세월이 길었던 탓에 자기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기댈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당연히, 육장봉이 그녀에게 준 호각도 잊고 있었다.

낮에 벌어진 일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녀는 월 삼낭이 좋은 의도로 만나자고 한 게 아님을 짐작했다. 그래서 암기도 많이 챙겼다.

하지만 월 삼낭과 장소원이 예상보다 더 악독할 줄은 몰랐다.

궁지에 몰린 순간에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깜빡했다고?”

육장봉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지막한 말투에는 억눌린 울화가 담겨 있었다.

이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월령안이 호각을 아까워서 안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일한 가능성은 위험에 닥쳤을 때, 그를 떠올리지도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말을 타고 군영으로 그를 찾아간 것은 궁지에서 벗어난 뒤에야 떠올린 생각이 분명했다.

이건 월령안의 탓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음속의 울화를 억누르고 명령조로 말했다.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오. 월령안, 알겠소?”

다시는 이런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월령안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두운 눈망울에는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장군, 이러는 건 절 보호하기 위해서인가요?”

그 순간, 육장봉은 손을 뻗어 월령안을 와락 품에 안고 그녀의 슬프고 무력한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자신이 있으니 더는 슬퍼하지도, 막막해하지도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월령안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을 떠올리자, 육장봉은 끝내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앞으로 여생 동안, 당신 월령안은 나 육장봉이 수호하겠소.”

“하…….”

월령안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다시 읍했다.

“그럼 앞으로…… 대장군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육장봉은 말을 하지도, 월령안을 부축해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는 월령안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시간이 모든 것을 증명할 것이다.

육장봉은 몰래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에 남아 있는 약간의 아쉬움을 감췄다.

“앉으시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줄 테니.”

“네.”

월령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이 떠난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제자리에 앉았다. 평소와 다름이 없는 기색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다리를 덮었다.

방 안의 분위기는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까와 달리 지금 아주 평온했다.

육장봉이 나서서 의자를 조금 뒤로 당겼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당하되, 너무 가까워서 불편하지는 않을 거리를 유지했다.

이를 본 월령안은 피식 웃었다. 사실, 육장봉도 다정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단지 그 다정함이란 게 그의 기분에 달렸을 뿐이다.

“당신이 낙원에서 나온 뒤, 말 한 필을 빼앗았잖소. 그 말의 주인은 북요 황제의 편지를 전하러 온 사절이었더군. 그자가 죽었소.”

육장봉은 장소원을 처리한 일을 말하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월령안과 여러 번 교류를 해 본 결과, 그가 본론만 말을 해야 그녀가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 죽었다고요?”

월령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시 상황이 긴박해서 제가 말을 빼앗기는 했지만, 그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은 확실해요.”

“맞소. 사람은 장씨 가문 하인이 죽인 거요. 이 일은 내가 이미 폐하께 보고했소. 낙원의 일은 일단락 지어졌으니, 당신을 귀찮게 할 사람은 없소.”

육장봉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한 일을 슬그머니 드러냈다.

그러나 월령안은 이 몇 마디만 가지고도 육장봉이 큰 힘을 썼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또 한 번 대장군께 은혜를 입었네요.”

육장봉이 제때 입궁해서 황제 앞에서 그녀를 감싸 주지 않았더라면, 장씨 가문은 그녀에게 북요의 사절을 살해한 죄명을 뒤집어씌웠을 것이다.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조정으로 편지를 가져오는 사람을 죽였다면, 황제가 그녀를 쓰려고 하더라도, 육체적인 고통을 적지 않게 겪어야 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녀가 장씨 가문에게 약점이 잡힌다는 점이다. 앞으로 장씨 가문에서 그녀에게 보복하고 싶으면 이 일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이 일을 법대로 처리한다면, 그녀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설령 산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월령안답게 살 수는 없었다.

육장봉은 그녀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랐다.

“작은 일일 뿐이오.”

육장봉은 손을 들고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사실은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몸과 마음으로 갚으라고 재차 일깨워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그런 말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육장봉이 말했다.

“궁에서 사람이 왔소. 청희 장공주의 일 때문이던데, 알고 있었겠지?”

“전 청희 장공주가 분위기를 조성하고 시기가 무르익기를 더 기다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조급해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요.”

월령안은 홀가분한 얼굴로 말했다. 청희 장공주를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게 분명했다.

육장봉은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죽인 사절이 가지고 온 것은 북요의 공문서요. 북요 황제가 남원대왕 야율제에게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렸소. 지금의 야율제는 가짜지. 수단이든, 머리든 진짜 야율제보다는 못하오. 그 가짜가 이번에 돌아가면 왕위는커녕 목숨만 부지해도 감지덕지하겠지.”

여기까지 말한 육장봉은 비꼬는 어조로 덧붙였다.

“청희 장공주는 어디서 이 소식을 알았는지 서둘러 입궁했소. 영녕후부가 황성사 사건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내놓는 대가로 폐하의 보호를 얻으려고 한 거요. 감히 다른 요구는 할 수가 없었겠지. 화가 나지만 풀 데가 없으니 먼저 당신한테 손을 뻗은 것이오. 당신이 이미 대책을 세웠다는 것은 알고 있소. 마음껏 손을 쓰시오.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있으니까.”

청희 장공주는 장소원과 똑같았다. 진정한 적에게 복수할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잘못을 전부 월령안에게 덮어씌우고 화풀이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장소원이든, 청희 장공주든 월령안에게 손을 뻗는다면, 육장봉의 분노를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 * *

장 부승상은 사죄하러 입궁했다. 황제는 장소원의 상황을 고려해서, 손녀를 잘 가르치지 못했다고 질책하지는 않았다. 다만 사람을 죽인 하인을 내놓으라고만 했다.

황제가 이렇게 쉽게 넘어가자, 장 부승상은 속으로는 ‘이게 아닌데’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화제를 바꾸었다. 장소원이 최음제에 취해 낙원에 있으며, 장 부승상이 사람을 보내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원아가…….”

장 부승상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자신이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장 부승상은 입궁할 때부터 후회와 자책, 피폐함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의 대부분은 연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로 충격을 받았다.

“장 부승상, 걱정하지 말게. 장봉이가 제때 도착했으니 장 낭자는 이미 무사하네. 얼른 사람을 데려가게.”

황제는 홀가분한 어조로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곧 화제를 바꾸더니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장 부승상, 낙원에서 벌어진 사건은 장봉이가 이미 낱낱이 밝혀냈네. 원흉은 월 삼낭일세. 그 사람을 해치는 의자도 월 삼낭이 제공한 것이고. 짐은 월 삼낭이 자네 장씨 가문의 친척임을 알고 있으나 법률이 그러하니, 월 삼낭은 죗값을 치러야 할 걸세. 짐은 장씨 가문이 월 삼낭을 감싸지 않기를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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