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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28)화 (328/1,004)

328화 내가 대신 마셔 주겠소

“장군, 아가씨는 이미 깨어나셨습니다. 다만 몸이…….”

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장봉은 긴 다리를 놀려 남원 쪽으로 갔다.

“대장군…….”

집사가 막아 나서려 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자마자 육일이 손을 내밀어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자네라면 고분고분 가서 저녁 식사와 방을 준비하겠네. 어떤가?”

“네. 네…….”

집사는 두 다리를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살기와 생명의 위협을 느겨 감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어서 가보게.”

육일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집사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다음 입구를 지키고 섰다. 남을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뜻이 빤히 보였다.

집사는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물러갔다.

“마님 가문의 하인들은 영 신통치 않군.”

육일은 고개를 저으며 평가했다.

* * *

남원.

육장봉은 들어가기도 전부터 월령안의 애교 섞인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먹기 싫어요. 너무 맛없잖아요……. 아니, 아니, 아니에요. 배불러요. 정말 배불러서 그래요. 더 이상 못 먹겠어요. 여기서 더 먹었다가는 살이 쪄서 예쁘지 않을 거고요.”

“배부르긴 뭐가 배불러. 내가 다 들었거든. 맛이 없어서 싫은 거잖아.”

이는 약이 바싹 오른 손불사의 목소리였다.

“아이참, 말도 못 하게 하시네. 본인이 요리 솜씨도 없으면서 주방에 가서 탕을 끓였잖아요. 이런 걸 두 그릇이나 마셨으면 이미 성의는 충분히 봐 드린 거예요. 미리 말해 두는데, 때려죽여도 세 그릇은 안 마셔요.”

월령안의 목소리에는 병약한 기운이 섞여 있었으나, 그래도 활기가 있었다.

육장봉의 차가운 눈매가 얼마간 부드러워졌다. 발걸음도 더욱 빨라졌다.

“이건 약선(藥膳 – 약재를 넣어 조리한 요리)이야. 약선을 누가 맛으로 먹더냐?”

탕을 들고 있는 손불사는 몹시 약이 오른 모양이었다.

육장봉은 입구에 서서 월령안이 뾰로통해서 말하는 것을 보았다.

“약선에 선(음식을 뜻하는 ‘膳’과 좋다는 뜻의 ‘善’이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한 말장난 - 역주) 자가 들어 있으니 당연히 맛있어야죠. 맛이 없으면 그냥 약을 먹지 왜 약선을 먹겠어요?”

“약선에는 약(藥)자도 들어가 있잖아. 약처럼 먹으면 안 되겠냐?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굴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금을 들고 와서 나에게 약선 처방을 내려 달라고 사정하는지 알아? 난 그런 사람들을 상대도 하지 않았어. 그런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끓인 거야. 그걸로 만족해.”

“무슨 약인데 한 끼에 세 그릇씩 마셔야 하나요? 다른 거도 못 먹게 하고? 일부러 그러는 걸 거야. 일부러 날 골탕 먹이는 거죠? 한 그릇이면 되는데 하필 세 그릇이나 끓여 내다니. 이렇게 맛없는 걸 어떻게 마시라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직접 만들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냥 몸을 조리할 처방전을 내 달라고 했지. 처방전 하나에 천 냥이나 받았으면 된 거 아니에요? 이렇게 맛없게 해 놓고, 양심에 떳떳해요? 제 돈값은 한 거예요?”

“소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바람에 물을 좀 더 넣은 것뿐이야.”

손불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흠흠…….”

육장봉은 입구 한참 서 있었음에도 방 안의 두 사람이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인기척을 내서야만 했다.

“육장…… 대장군?”

월령안은 고개를 들어 단정하게 서 있는 육장봉을 보자 미간을 살짝 구겼다. 눈에 불쾌함이 드러났다.

‘명월산장의 하인들은 뭐 하는 거야? 육장봉이 내 방까지 왔는데도 왜 아무도 알리러 오지 않았지?’

월령안은 불만을 얼굴에 드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육장봉이 오늘 그녀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을 떠올리고, 약간의 불쾌감은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걸 단념한 채 육장봉에게 인사하려고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솔직히 말해 지금 그녀의 모습은 손님을 만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손불사는 육장봉을 등지고 있었다. 월령안의 말을 듣자 고개를 돌려 힐끗 보고는 불쾌해서 말했다.

“자네는 어째 또 왔는가?”

“일어날 필요 없소.”

월령안이 일어나자, 육장봉은 긴 다리를 쭉 뻗어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불사의 손에서 약선을 건네받았다.

“손 신의, 수고하셨습니다. 이 약선은 제게 주십시오. 제가 마시게 하겠습니다. 그만 가서 쉬시지요.”

손불사는 말문이 막혔다.

이 방에는 손불사와 월령안 말고도 하녀 한 명이 옆에 있었다.

하녀는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육장봉이 손을 들자 하녀는 다급히 물러갔다. 뜀박질하는 모습이 토끼보다도 빨랐다.

손불사를 상대하기는 더욱 쉬웠다. 육장봉은 그의 손에서 약선을 받아 들고 ‘아주 예의 바른’ 모습으로 그를 내보냈다.

손불사는 자기가 어떻게 월령안의 방에서 걸어 나왔는지도 몰랐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나온 뒤였다.

“손 신의,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모셔다드리지요.”

그는 다시 들어가려 했지만, 육일이 앞으로 다가와 굳은 얼굴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얀 이를 드러낸 미소가 밤에 보니 무서울 정도로 험상궂었다.

‘무시무시하군!’

손불사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덜덜 떨고 있었다.

‘육장봉 그 녀석은 말을 잘 듣더니만, 그놈 옆의 사람들은 왜 이렇게 흉악한가? 게다가 저 미소는 사람을 잡아먹겠다는 뜻인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손불사는 다시 들어가려는 생각을 바로 포기했다. 그는 애초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는 듯, 뒷짐을 지고 침착하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손불사와 시녀가 나간 뒤, 크지 않은 방 안에 육장봉과 월령안 두 사람만 남았다.

월령안이 일어나려고 하자, 육장봉이 저지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 앉은 뒤에야 자기가 잠옷만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을 가져오고 싶었지만, 욕장봉이 바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과 그의 무릎은 고작 주먹 하나만큼의 사이를 두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려면 일어날 수도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육장봉이 몸을 옆으로 돌려 주어야 지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개짐(옛날, 천으로 만든 생리대)까지 찬 상황이라, 육장봉의 앞으로 지나가려면 꽤 볼썽사나울 것 같았다.

월령안은 생각하다가 결국 묵묵히 이불을 끌어당겨 다리를 덮었다.

이불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육장봉의 무릎이 자신의 무릎에 맞닿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조금 더 뒤쪽으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침대에 눕지 않은 이상, 더는 뒤로 물러날 자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육장봉이 보는 앞에서 침대에 눕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너무 난처했다.

월령안은 점잖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참지 못하고 욕을 퍼붓고 있었다.

‘육장봉이 오늘 나를 구해 준 것은 정말 고마운데, 좀 정상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는 거야? 이게 무슨 짓이야. 정말…… 사람을 잡으려고 하네.’

원래는 육장봉에게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다. 또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고, 두둑한 선물을 준비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는 육 대장군을 보니, 아무리 무심한 월령안이라도 방 안의 분위기가 야릇하게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육장봉의 시선은 강렬하지도, 그윽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육장봉의 그 차가운 눈매를 마주하려니 어쩐지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답례의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

육장봉의 차갑고 침착한 눈매에는 마치 불길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계속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온몸이 뜨거워졌다. 마치 최음제의 약효가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심지어 목도 바싹 말랐다.

이 느낌은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월령안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방 안의 야릇한 분위기를 어떻게 깰지 몰라 막막했다. 곁눈질로 육장봉 손에 든 약을 본 순간, 이상하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대장군, 약을 주세요. 지금 마실게요.”

그녀는 약을 다 마시고 난 다음, 피곤하니까 내일 이야기하자고 할 생각이었다.

‘나는 너무 똑똑해. 이렇게 좋은 핑곗거리도 생각해 내다니.’

월령안이 우쭐거리는 얼굴을 하자,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이게 식었는지 내가 먼저 먹어 보겠소.”

그는 약을 월령안에게 건네주지 않았다. 그릇을 들어 올리더니 고개를 숙여 한 모금 마셨다. 곧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역시 맛이 없군. 당신이 싫어할 만하오.”

냄새만 맡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으나, 입에 넣으니 역하고 시큼한 것이 그릇을 헹군 물맛이 나는 것 같았다. 전장에서 먹었던 쌀겨를 넣어 대충 끓인 죽보다 삼키기 힘들었다.

‘손 신의가 어떻게 달인 건지 모르겠군. 월령안이 먹으려면 참 힘들겠는데…….’

육장봉이 미간을 찌푸리자, 월령안은 어쩐지 웃고 싶어졌다.

“괜찮아요. 그렇게 못 먹을 맛도 아니에요. 아까는 제가 손불사랑 장난을 친 거예요. 먹지 못하겠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대장군, 약선을 주세요. 이게 맛은 없지만, 효과는 아주 좋아요. 또 안에 들어간 약재도 귀한 거라서 낭비할 수는 없어요.”

“괜찮소. 육일더러 약 처방대로 약을 지어 오라면 되오. 낭비를 할 수 없으니 이 약은…… 내가 대신 마셔 주겠소.”

육장봉은 말을 마치자마자 그릇 안의 약선을 단숨에 삼켜 버렸다.

“아니, 이건…….”

월령안은 그를 막으려고 했다. 일어나는 순간, 무릎이 육장봉의 무릎에 닿았다. 순간 휘청하더니 육장봉의 품으로 넘어졌다.

“제 발로 안기는 거요?”

육장봉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는 전혀 사양하지 않고 한 손으로 월령안의 허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월령안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몸으로 갚겠다는 뜻이군. 난 은혜를 갚는 것은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하오. 특히 당신의 보답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드오.”

월령안은 육장봉이 변태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품에 안긴 월령안의 창백한 얼굴에는 홍조가 드리웠다. 그녀는 약이 바싹 올랐다.

‘이 쓸모없는 몸뚱이 같으니! 아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날 희롱하는 육장봉이 제일 문제라고.’

그녀는 고개를 들고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짐짓 육장봉의 희롱을 못 들은 척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대장군, 이 약은 피를 보충해 주는 거예요. 대장군이 마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네요. 그리고 이 손은 좀 놓아 주시겠어요? 제가 전혀 움직이지 못하겠네요.”

월령안은 몸을 일으키려 시도했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은 무슨 무쇠 집게라도 되는 듯했다. 도저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남자는 참 악랄하다니까.’

육장봉은 월령안을 꽉 끌어안고 귓가에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 구역질 나는 약도 마셨는데, 내게 조금이라도 보상을 해 주지 않을 건가?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갚을 줄 알아야지. 령안.”

월령안의 귀가 파르르 떨렸다. 귓가가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귀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졌다. 가뜩이나 허약해진 몸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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